21세기의 춘궁기는 오는가(?)

▲ 한철수(편집위원)
-황금찬 시인의 '보릿고개'로 보는 맥령기

"밑에서/아이가 울고 있다./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할아버지가 울고 있다./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어머니가 울고 있다./내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눈물을 생각한다.//에베레스트는 아시아의 산이다./몽블랑은 유럽,/와스카란은 아메리카의 것,/아프리카엔 킬리만자로가 있다.//이 산들은 거리가 멀다./우리는 누구도 뼈를 묻지 않았다./그런데 코리아의 보릿고개는 높다./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며 갔다./― 굶으며 넘었다./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코리아의 보릿고개,/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소년은 풀밭에 누웠다./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황금찬 원로시인이 1965년 시집 "현장"에 발표한 '보릿고개'의 전문이다. 보릿고개가 어찌 시인만의 젊은 시절을 회상했을까 혹정의 일제, 해방의 기쁨도 잠시 동족상잔(同族相殘)으로 인한 가난의 고개.

보릿고개를 춘궁기(春窮期) 혹은 맥령기(麥嶺期)라 한다. 한해 양식이 바닥이 나고 보리마저 아직 여물지 못한 곡우(穀雨)부터 망종(芒種)까지 양력 5~6월은 식량사정이 아주 딱하고 어렵고 배고픈 고개.

일제강점기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고 8 ·15광복 후 1950년대뿐만 아니라 1960년대까지 연례행사로 찾아 온 우리민족이 넘기 힘든 큰 고개 넘을 때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근근이 살다보니 산은 온통 민둥산이 되었다.

-진대법은 세계최초 구체적 보릿고개 구제관련 법

그래서 "보릿고개는 태산보다 높다.", "고개 중 가장 넘지 못할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다."라 백성은 시름했고,  에베레스트, 몽블랑, 킬리만젤로... 세계의 어떤 준령과 산보다도 더 높고 높은 산이 코리아의 보릿고개라 황금찬 시인은 노래한 했다. 

보릿고개가 어찌 근현대의 일일까. 그 고개를 처음으로 선보인 문헌은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 ?~197)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국천왕이 재위 중 계속되는 엄청난 기근으로 백성들이 고생을 하자 명재상 을파소로 하여금 구휼정책을 명했다. 마침내 을파소는 고국천왕16년(194년)에 매년 음3~7월부터 관가에서는 곡식을 호구 수에 따라 나누어 빌려주고 수확기인 10월에 환납(還納)하는 진대법(賑貸法)을 대안으로 내 놓았고, 이로 인해 백성들이 빈곤을 덜어 주었다고 한다. 이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자 짓을 했던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던 귀족에게는 경종을 울리는 제도였으며, 훗날 조선 정조에 이르러 김육을 통한 대동법을 실행하는 모태가 되기도 했다.  을파소의 진대법은 세계최초의 실용복지정책으로 사표에 남아있다.

모두들 윤택하고 살고 있다는 21세기에 갑자기 무슨 보릿고개냐고 손사래를 치겠지만, 요즈음 모두들 죽겠다 한다. 자장면 값이 올라 울겠고, 기름 값이 올라 돌겠고, 생활필수가격이 올라 미치겠고, 아이들 사교육비 올라 펄쩍 뛰겠고, 대학등록금이 다락으로 뛰어 죽겠고, 은행이자에 치어 죽겠고, 높아지는 세금에 또 돌겠고, 쇠고기수입 때문에 여럿이 죽겠고... 어찌 미치고 돌고 죽겠게 만드는 일이 이뿐이겠는가. 아무튼 이래저래해서 미치고 돌고 죽겠다고 한다.

 -21세기 춘궁기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해

노(老) 시인이 젊은 시절 흐느낌을 보고 함께 울었던 21세기의 춘궁기가 다시 올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잖다. 백성들은 이미 불안한 마음을 부여안고 있다. 노 시인이 넘고 싶지 않아도 넘어야하는, 넘지도 못하고 먼저 죽어버린, 9천 미터의 산에 아이들이 드러누워 상상의 보리알을 씹는 형국을 만들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본디 나랏일을 맡고 있는 "재상(宰相)"의 ‘재(宰)’는 '요리를 하는 자, 고기를 나누어 주는 자'를 ‘상(相)’은 '눈과 같은 나무'라는 의미로 "소경의 지팡이처럼 남의 보행을 돕는 자"를 이르던 말이다. 10세기의 을파소, 18세기의 김육과 같은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살리는 지혜롭고 자애로운 명재상이 오늘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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