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소파(小波)'는 1920년 번안시를 발표함으로 암시

어린이날 86돌을 맞아 소파와 어린이를 다시 생각 해
'어린이'라는 말에 꿈, 희망, 사랑을 담겨 있어
 

소파 방정환.
소파 방정환선생이 어린이날을 1923년 5월1일에 정했으니 올해로 86돌이 된다. 그는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천대받고 학대받던 아동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어린이'라는 단어를 만들었고, 세계 최초로 '어린이날'과 '어린이인권선언문'을 만들어 어린이를 위한 계몽운동을 주도한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위인이다.

33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오직 어린이만을 위해 자신의 열정을 다하다 소천한지 77년이 지난 지금에도 5월만 되면 그 누구보다도 우리의 뇌리에 남는 것은 시대적 배경이 일제강점기 임에도 그 억압에 굴하지 않고 어린이 운동을 전개한 창의적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동문학가로, 어린이계몽가로, 시인으로, 번역가로, 독립운동가인 선생과의 사자후(死子逅)는 기쁨보다 경의가 앞서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망우리 사색공원에서 만해 한용운, 월파 김상용, 박인환 시인과 우연한 회포를 풀고 남양주로 떠나 한국인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서정시인 청록파(靑鹿派) 조지훈을 만나고 5월 어린이날 86주년을 맞아 소파 방정환을 찾기 위해 다시 망우리를 발길을 돌린다.

여기서 '사자후(死子逅)'란 '죽은 이와 우연히 만나다 또는 죽은 이와 만나 허물없이 지내다'라는 의미다. (글쓴이 주)

아차산 망우사색공원의 방정환 묘소.

-소년입지회와 '어린이'

어린이 창간호.

색동옷은 흔히 '색동저고리' 혹은 '까치저고리'라고도 한다. 명절 때 여자 아이들이 주로 입고 돌날에 남자아이들이 입는다. 색동저고리의 유래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따라 액땜을 하고 복을 받기 위하여 5방색(五方色)을 이어 붙여 입혔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가 어린이와 색동회에 관심을 두었던 것은 색동저고리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방정환은 19세기와 20세기가 공존하던 1899년 11월 9일 서울 야주개(현 서울 종로구 당주동)에서 싸전과 어물전을 경영하는 아버지 방경수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첫돌에 색동저고리를 입었으리라 본다. 4세에 삼촌을 따라 보성소학교에 간 것이 인연이 되어 머리를 깎고 전교생 중 가장 어린 나이로 유치반에 입학함으로 신학문을 접하게 되지만 넉넉했던 집안이 졸지에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궁핍해진 살림 때문에 12살의 어린 누나를 시집보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마 이로 인해 민족의 슬픔보다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방정환의 불후의 명작 동요 "형제별"이 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의 행적을 연도별로 찾아본다.

형제별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번쩍번쩍 정답게
지내더니
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별 만 둘이서
눈물 흘린다.
<1923년. "어린이" 권 8호>

1909년(11살) 매봉보통학교에 뒤늦게 입학하였고, 1910년(12살) 미동보통학교로 전학 분격적인 근대 수업을 받고 졸업한 방정환은 사업가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선린상업학교에 들어갔다. 1913년(15살) 정환의 아버지는 인쇄공이었고 땔나무를 해다 팔아 학비를 벌어야 하는 고달픈 생활이었지만 신학문에 대한 열망은 활화산처럼 솟아 최남선의 아동잡지인 "소년(少年), 아이들보이, 붉은 저고리, 새별"등을 통해 독서와 창작에 열정을 쏟았고, 춘원 이광수의 잡지 '청춘'에 투고한 글이 실려, 글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1914년(16살) 학교마저 그만두어야 했던 방정환은 이듬해 한 달에 5원씩을 주는 토지조사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여기서 만난 유광열과 함께 '청년구락부'라는 단체를 만들어 연극을 만드는 등의 문화운동을 펼쳤다.

"청년 방정환은 책을 읽고 글 쓰는 일을 즐겨했다. 육당 최남선 선생이 이끌었던 "청춘(靑春)"이라는 잡지에 '낙화(洛花)'라는 한시를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써 보내 실렸는데, 아마 그것이 방정환이 최초로 활자로 인쇄된 글이 아닌가 싶다."고 늘 옆에서 지켜보던 유광렬의 증언한다.

방정환이 제정한 '어린이 날'을 보도한 동아일보(1923년 5월1일)

1917년(19살) 음 4월 8일 그는 기미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자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딸인 용화 씨와 결혼하면서 제동 처가에 머물면서 천도교의 지원을 업고, 본격적인 소년운동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생모가 며느리를 본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그해 5월 8일에 세상을 등졌지만 유광렬, 이중각, 이복원 등과 비밀결사대인 ' 청년구락부'를 결성한다.

1918년(20살) 첫 아들 운용을 얻고, 손병희가 운영하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1919년(21살) 3.1운동 때 천도교 비밀신문인 "조선독립신문(보성전문 학보)"을 찍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일주일 동안 고추를 당하기도 했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이 땅의 소년소녀들을 바르게 키우는 일이 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그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말, 동경으로 건너가 동양대학 철학과에서 '유학(幼學)과 아동심리와 아동문학'을 전공하면서 천도교 동경지부장을 맡는다.

1920년(22살) 장녀 영화가 탄생하고 천도교 종합잡지인 "개벽(開闢)"을 창간하자 이 잡지의 일본 특파원으로 활약하면서 '잔물'이란 필명으로 8월25일 '어린이 노래-불 켜는 아이'를 발표하면서 아동문학 관련 글들을 쓰기 시작하였다.

불 켜는 아이

기난 긴 낮 동안에 사무를 보던
사람들이 벤또 끼고 집에 돌아와

저녁 먹고 대문 닫힐 때가 되며는
사다리 짊어지고 성냥을 들고
집집의 장명 등에 불을 켜놓고
달음질 해가는 사람이 있소

은행가로 이름 난 우리 아버지는
재주껏 마음대로 돈을 모으겠지
언니는 바라는 대신이 되고
누나는 문학가로 성공하겠지

아 나는 이 다음에 크게 자라서
이 몸이 무엇을 해햐 좋을지
나 홀로 선택할 수 있게 되거든
그렇다 이 몸은 이와 같이
거리에서 거리로 돌아다니며
집집의 장명 등에 불을 켜리라

그리고 아무리 구차한 집도
밝도록 훤하게 불 켜 주리라
그리하면 거리가 더 밝아져서
모두가 다 같이 행복 되리라

거리에서 거리로 끝을 이어서
점 점점 산 속으로 들어가면서
적막한 빈촌에도 불 켜 주리라
그리하면 세상이 더욱 밝겠지

여보시오 게 가는 불 켜는 이여
고달픈 그 길을 외로워 마시오

외로이 가는 불 켜는 이의
이 몸은 당신의 동무입니다.
<개벽 창간호에 '잔물[小波]' 이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발표한 시>

이 시를 번안하면서 자신의 호인 소파(小波)의 근간인 '잔물'이라는 암시를 내놓았고, 아이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아이들은 나라의 동량(棟梁=기둥)이라 하지 않았던가.

-"사랑의 선물" 발간은 영원한 어린이의 친구임을 확인

번안동화집 '사랑의 선물' 박문서관(1920연대)

방학을 맞아 서울에 와 1920년(22살) 5월1일 "천도교소년회"를 "개벽" 주간 김기전, 이정호와 함께 조직하고는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사랑하며 도와갑시다."라는 슬로우건을 내걸었다. 당시 읽을거리가 없었던 어린이들에게 외국동화를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펴내게 된다. 이 책은 방정환의 유일한 단행본이며,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학대받고, 짓밟히고, 춥고, 어두움 속에서도 우리처럼 또 자라는 불쌍한 어린 영들을 위하여 그윽히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파의 소년(어린이)운동의 동기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1921년(23살) 일제에 저항운동을 도발했다는 이유로 박달성 등과 함께 체포당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안데르센, 그림, 아라비안나이트' 등의 작품 중 엑기스를 뽑은 '사랑의 선물'을 동경에서 발간하게 된다.

-'5월1일 어린이날'과 "어린이" 그리고 "색동회"

'오늘은 어린이날 희망의 새 명절 어린이날'제하의 어린이 헌장을 발표한 동아일보. 

1922년(24살) 기미독립운동의 주동자로 몰려 옥고를 치르던 그의 후견인 의암 손병희 선생이 3월에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5월 6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천도교소년 창립1주년'을 맞이하여 "10년 후 조선을 어린이에게 투자하라." 원문은 "10년 후 조선을 려(廬)하라"는 내용을 가두에서 전단을 뿌리고 선전하며 5월1일 어린이날의 취지를 담은 행사를 치른다. 이날 행사는 당시 동아일보는 "오늘은 어린이날, 어린이를 위한 처음 축복, 오후3시 전국에서 선전"이라는 제하로 대서특필 한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참되고 씩씩하게 자라는 가운데 인정 많은 소년이 됩시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자동차와 창가대를 동원, 대대적인 행사를 거행함으로써 우리나라 '어린이의 날’의 효시가 되었고 이 행사의 지도위원은 방정환. 김기전. 구중회. 차상찬. 박달성 제씨."

방정환에게 1922년은 일생에서 자장 바쁜 한 해 였다.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메시지를 동경에서 서울에 전달했고, 서울의 동지들은 그 일을 실천했다. 6월에는 번안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개벽사에서 출판했으나 이 책은 워낙 인기가 많아 몇 년 후 박문서관으로 판권을 바꿔 계속 출간하게 된다. 이 무렵 잡지 "개벽, 신여성" 등 여러 잡지에 소파를 비롯한 다양한 필명으로 '동요, 동화, 동극, 수필, 소론, 기행문, 탐방기, 인물평' 등 다방면의 집필활동을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安昌南)이 고국을 방문할 때 비행행사를 동아일보로 하여금 주최하도록 하고, 그 내용을 개벽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문학적 재질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희망을 던지는 글들을 많이 발표했다.

동경 유학시절의 방정환.

1923년(25살) 3월 1일. 그의 어린이계몽운동과 아동문학의 초결정체인 소년잡지 월간 '어린이'가 드디어 창간되었으니 바로 색동회 창립 직전의 일이다. 이 잡지는 소파와 초기 색동회원의 소년운동 활동무대였다. 소파는 "어린이"잡지의 창간과 "색동회"조직의 동기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짓밟히고, 학대받고, 쓸쓸스럽게 자라는 어린 혼을 구원하자. 이렇게 외치면서 우리들이 약한 힘으로 일으킨 것이 소년운동이요, 각지에 선전하고 충동하여 소년회를 일으킨 몇 가지 일입니다."

위 글의 '소년회'는 천도교소년회와 유사한 '소년단'이고 '소년문제연구회'가 바로 '색동회'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색동회의 창립정신은 바로 소파가 이야기한 "어린홍익의 구원"이다.

"'색동회'는 1923년 5월 1일 일제 암흑기에 소파 방정환을 중심으로 강영호, 정순철, 진장섭, 손진태, 고한승, 정병기, 조준기 선생들 8명이 일본 동경에서 색동회를 조직하고 1921년 소파 방정환 선생이 창안한 '어린이'란 말을 쓰기로 하였으며, '어린이날'을 제정하여 어린이 문화운동과 어린이 인권운동, 구국운동을 전개한 한국 최초의 어린이 문화운동 단체이다."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최초의 어린이 모임이 있은 후 조재호, 마해송, 윤극영, 정인섭, 이헌구 등 많은 유학생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고 전한다.

1922년이 어린이계몽운동의 준비였다면 1923년(25살)은 실천하는 해이다. 5월1일 '조선소년운동협회'를 통해 "어른에게 드리는 글, 어린 동무에게 주는 말,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지를 12만장을 제작 본격 홍보에 나섰고 성대한 '어린이날' 행사를 치르고 6월, 7월에 색동회를 통해 "전조선소년지도자대회 및 아동예술강연대회"를 개최함으로 절정에 이른다.

5월1일 어린이날 포스터.(자료출처:도깨비뉴스)

어린이를 위한 최초 선언문 (1923년 5월 1일 발표)

▶소년운동의 기초 조건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다.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절을 행하게 하라.

▶어른들에게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치어다 보아 주시오.
-어린이를 가까이 하시어 자주 이야기하여 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같은 것을 때맞춰 하도록 하여 주시오.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산보와 원족 같은 것을 가끔가끔 시켜 주시오.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 타일러 주시오.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만한 놀이터와 기계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末梢)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어린 동무들에게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어른들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뒷간이나 담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같은 것을 버리지 말기로 합시다.
-꽃이나 풀을 꺾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전차나 기차에서는 어른들에게 자리를 사양하기로 합시다.
-입을 꼭 다물고 몸을 바르게 가지기로 합시다.

1924년(26살) 전국 소년지도자대회를 열어 어린이 단체를 하나로 뭉치게 했고, 이듬해 40 여 개 단체를 모아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했다. 1월 어린이지를 통한 자유화(自由畵) 공모, 5월1일부터 4일까지 '제2회 어린이날 기념행사'를 1일 어린이대회, 2일 어머니대회, 3일 아버지대회, 4일 노동소년위안회로 나누어 원유회(園遊會=소풍)형식으로 열어 이미 80여년 전에 지금의 '가정의 달' 행사를 치렀다.

1925년(27세) 1월에 차남 하용을 낳았고, 제3회 어린이날 행사는 오색의 전단에 수십만 장 뿌리고, "우리의 희망은 어린이, 앞날의 임자는 어린이, 내일을 위하여 어린이를 잘 키우자"라는 현수막을 들고 시가행진과 자신이 개사(번안)한 어린이날 노래를 불렀으며, 40여개의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맡았다.

어린이날 노래(외국 곡/방정환 작사)

(1절)기쁘다 오늘날 오월 일일은
우리들 어린이의 명절날일세
복된 목숨 길이 품고 뛰어 노는 날
오늘이 어린이의 날

(2절)기쁘다 오늘날 오월 일일은
반도 정기 타고난 우리 어린이
길이 길이 뻗어날 새 목숨 품고
즐겁게 뛰어 노는 날

(후렴)만세 만세를 같이 부르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기쁜 맘으로
노래를 부르며 가세
<출처: 동아일보. 1925년 4월 30일자 부록판>

5월 첫째 일요일로 어린이날을 바꾼 뒤의 포스터. (자료출처:도깨비뉴스)

이 노래는 소파가 1925년 5월 1일, 제3회 어린이날을 경축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곡은 당시 유행하던 서양 행진곡 풍의 야구 노래인 '장엄하고 활발한 야구수들아'로 2/4박자 경쾌한 노래며, "어린이"제7권 제4호 (1929년) 의 표지에 곡과 가사가 실렸다.

1926년(28세) 어린이날 행사는 순종의 국장으로 인해 행사를 중단했고, 6.10만세사건 예비주동자로 투옥되었다. 7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어린이와 직업"이라는 제목으로 주파를 탄다.

1927년(29세) "어린이"지 1월호부터 당시 교과서로 사용될 만큼 어린이의 도덕경인 '어린이 독본'을 20회에 걸쳐 실었으나 이해 어린이날 행사는 '소년운동연합'과 '오월회'과 대립하여 따로 치루는 불행도 있었으며 방정환은 오월회와 손을 잡고 10월 16일 '조선소년연합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아 어린이 날을 5월 첫째주 일요일로 정한다.

1928년(30세) 2월 7일 어머니대회를 주관했고, 4얼에는 차녀 영숙이 태어났다. 3월22일 조선소년연합회가 '조선소년총동맹'으로 바뀌면서 그가 주창한 어린이운동과 방향이 달라지자 소년운동단체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 어린이지, 동화구연, 강연회, 라디오를 통해 어린이의 동무로 남기로 한다. 5월1일 천도교기념관에서 열린 동화구연대회에 1천 5백여명이 참가하는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10월 2일부터 10일까지는 어린이사와 개벽사가 주최하고 색동회기가 주관, 동아일보가 후원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열어 20여 나라의 아동예술을 접하게 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으며, 소파는 이를 4년간 준비했다고 전한다. 이듬해 3월1일 월간지 "학생"을 발간한다.

-유명한 이야기꾼, 35개의 필명으로 글을 써

1929년 3월1일 창간한 월간지 "학생".

이처럼 지칠 줄 모르게 어린이 운동에 앞장선 선생은 동요·동화·소년소설·동극 창작에 힘쓰고, 많은 외국 동화를 번역해 어린이들에게 마음의 양식을 제공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어느 곳을 가나 구수한 입담으로 주변에 사람을 모이게 했다.

그가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듣는 이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고 슬픈 이야기를 하면 듣는 이들은 눈물을 옷깃에 적셨다 한다. 그를 감시하던 순사 가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끝내 눈물을 흘려 그에게 "순사를 울린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그는 어린이만이 아니라 어디서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고, 감옥에 가 서는 죄수들에게 병원에 들러서는 간호원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사용한 필명은 "잔물(동요 등 아동문학). 소파(小波 대표적인 호), 소파생, SP, SP生, CWP, CW生, 목성(牧星), 북극성(北極星.탐정소설), 몽견초(夢見草 실화 미담 등), 몽중인(夢中人), 견초(見草), 쌍(雙)S, 쌍S生, SS生, 길동무, 잠수부, ㅈㅎ生, ㅅㅎ生, 은파리(은파리 연재시 사용), 파영(波影), 김파영(金波影), 파영생(波影生), 물망초, 깔깔박사, 영주(影州), 운정(雲庭), 김운정, 운정거사(雲庭居士), 삼산인(三山人), 성서인(城西人), 직이영감, 편즙인, 일기자, 파영북웅 무려 35개나 된다. '

-어린이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장편소설 '칠칠단의 비밀'

방전환의 동명소설로 만들어진 만화영화 포스터.

방정환이 북극성이란 필명으로 연재한 '칠칠단의 비밀'은 암흑기이자 일제의 강점기를 맞아 고통받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북돋기 위해 재미와 모험을 다룬 쓴 소설이다.

그가 앞서 발표한 '동생을 찾으러'는 일제 때 청나라 인신매매단에 납치를 당한 여동생 순희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오빠 창호의 활약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칠칠단의 비밀'도 인신매매를 다룬다. 곡마단의 남자 아이(상호)와 여자 아이(순자)는 남매 인지도 모르고 자란다. 그리고 부모와 조국도 모르고 일본인 단장의 말만 믿고 곡마단에서 일본인 고아로 생각하며 묘기를 부리며 살아간다.

 그런데 어떤 노인(남매의 외삼춘)을 통해 조국과 부모를 알게 되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상호와 순자를 괴롭히던 곡마단은 원래 비밀 범죄단체인 칠칠단과 중국 만주지방까지 오가며 쫓고 쫓기는 모험을 한다는 것이 큰 줄기다.

이 소설은 1978년 박승철 감독이 동명의 제목으로 만화영화로 제작 당시 어린아이들을 극장으로 몰리게 하였고, 최근 3D 애니메이션이 제작 중에 있어 세기를 넘나드는 어린이들의 좋은 교양물로 남고 있다.

-영원한 어린이의 친구 뚱보아저씨 33세로 눈을 감아

'뚱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뚱뚱했던 소파는 1931년 7월 23일 오후 6시 34분, "말도 마부도 새까만 흑마차가 나를 데리러 왔어. 어린이들을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라는 말을 남기고 33 세의 짧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평생 어린이를 잘 키우는 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라 믿었다. 이 믿음에 따라 어린이와 어린이 사랑 운동에 온 몸을 바쳤다. 애국자이자 교육자, 아동문학의 선구자인 방전환은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가 죽은 지 5주년이 되는 날인 1936년 7월 23일 아차산 망우리추모공원에 안장하고 "동심여선(童心如仙), 어린이의 벗 소파방정환 묘"의 비를 세웠고, 60주기가 되는 1991년 5월의 문화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1936년에 세운 묘비. 화장을 한후 납골묘형식으로 사용하였다.

-새로이 발굴된 소파의 글

1918년 2월 9일 "신청년" 창간호. 소파생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암야(闇夜)

가을밤 어두움
점점 깊어가는 침묵
구 중애 눈 뜨인 나
숨을 죽이고 있음이
나의 방은 바다 속 같다
이 어두움 속에
나의 마음...
붕어와 같아
어둠속을 헤맨다.

1918년 12월. 한용운이 발간한 "유심" 제3호. 상금으로 오십전을 받았다. ㅈㅎ생이라는 필명을 썼다. 

마음

보이면 보이지 않고 흔적도 없으니
그 한번 동(動)하면 못할 것 없고
그 가는 곳마다 사업(事業)이루니
귀(貴)여움 무한하다 우리의 마음

뜨거운 불길이 데우지 못하며
힘있는 세력이 빼앗지 못하며
굳센 물결이 씻지 못하니
그 조화(造化) 무한하다 우리의 마음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바라나
마음만 국세면 못할 일 없네
세계가 넓으나 그보다 크니
그 크기 무한하다 우리의 마음

이 보배 이 조화 향하는 곳에
뉘 능(能)히 막아 낼 장사 없나니
갈아서 빛내세 더욱 힘있게
닦아서 키우세 우리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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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향(望鄕)

잔 물

산으로 가도
바다로 가도
속살대는 소리가
부럽게 들리고
산머리 넘어도
저녁해 저무는데
아아 내 몸만
그림자 외로워라.
이 몸이 날으는 새 같으면
이렇게 울지는 않으련만
아아 내 고국(故國)은 머나먼 산 뒤
흰 구름 저쪽에 있는 것을.

서울서 자주 밟던
잔디밭 그 위에
떨어진 낙엽(落葉)이
지금은 춤추리라.

아아, 님아 애인(愛人)아
잔디를 거닐 제
그대 찾던 내 발자국
마음 속에 찾아봐라.

피리는 붉은 입술로
노래같이 자미(滋味)로운 말소리 들으면서
정타는 어린 가슴 터질 듯이 뛰놀며
행복(幸福)스런 몇 날을 그곳에 보내도다.

산 넘고 들 넘어 내가 온 이곳을
잎 지는 나무 밑에 외로이 생각하며
잠잠이 우는 양이 눈에 보여...
아아 애인을 둔 여인(旅人)은 더 아프구나.
<1920년 10월 개벽 제5호. 잔물이라는 필명을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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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빙 수

1
"조선의 여름이란 낮에는 몹시 따가워도 저녁때의 서늘한 맛이 정말 좋아요."
밤중까지 푹푹 삶아내는 나라에서 살다가 온 일본 사람들이 저녁마다 이 말을 한다. 우리는 여기서만 살아서 이 특별한 맛을 모르고 지내지만 조선의 달빛[月色]이 특별히 밝은 것처럼 여름날의 저녁은 특별히 맑고 서늘하다. 여름날 저녁에 얼음집에 수그리고 기어 들어가는 사람은 이 맛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고마운 저녁이 오기까지, 높다란 하늘에 아득히 떠서 서늘한 기운을 솔솔 내리는 별들이 나타나기까지 그때까지가 얼마나 길다란 낮[晝]이냐. 넓다란 길바닥과 지붕의 기왓장까지 불볕에 타고 있고 소도 말도 걸음을 걷지 못하고 더위에 늘어지는 뙤약볕에 오직 한가지 바닷물보다도 더 푸른색으로 쓰인 얼음빙(氷)자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것이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것이냐....

그것은-적어도 고 한 때에 있어서는- 마치 범람한 물결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에게 구원의 배같이 고마운 것이다. 유별난 취미도 없거니와 쌉쌀한 것밖에 아직 맥주 맛을 모르는 나는 더우면 의례 빙수 집을 찾아간다.

대롱대롱 서늘한 소리가 나는 주렴발을 헤치고 들어설 때 벌써
나는 더위의 물결에 저 언덕을 잡은 사람이 된다. 물이 흐르는 얼음을 손이 시려서 수건으로 싸쥐는 것을 보기만 하여도 이마의 땀이 도망을 한다.

스윽- 스윽-
아이스크림보다도, 밀크셰익보다도 정말 얼음의 얼음맛을 즐길 수 있기는 갈은 얼음을 먹는 데 있다.
스윽- 스윽-
그 얼음 갈리는 소리를 들어보라. 새하얀 얼음비가 눈발같이 흩어져 내리는 것을 보라. 벌써 등덜미의 땀이 다 기어들어가지 않았느냐.

우박이나 싸래기같이 거칠게 갈은 얼음을 돈 내고 먹는 사람은 잠시일망정 불행한 사람이다. 사알-살 갈아서 참말로 눈결같이 갈은 고운 얼음을 삽죽 떠서 혓바닥 위에 가져다 놓기만 하면, 씹을 것도 없이 깨물 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 혀도 움직일 새 없이 스르르 녹아버리면서 달콤한, 향긋한 찬 기운에 혀끝이 환해지고 입 속이 환해지고 머릿속이 환해지면서 가슴 속 뱃속 등덜미까지 찬 기운이 돈다.

참말 빙수는 많이씩 떠먹기를 아껴하면서 혀끝에 놓고 녹히거나 빙수 물에 혀끝을 담그고 시원한 맛에 눈을 스르르 감으면서 기뻐하는 유치원 아기들같이 어리광쳐가며 먹어야 참맛을 아는 것이다.

2
아무리 더워도 얼음 가는 소리만 듣고도, 눈결같이 갈려 흩어지는 것만 보고도 벌써 땀이 기어드는 것이니까 보통은 한 그릇이면 더 그 찬 것을 먹을 용기를 계속하지 못한다.

나는 그 눈결 같은 얼음을 혀끝 위에 놓고 어느 틈에 녹는가를 보려는 재미, 혀끝으로부터 입 안 머릿속 가슴 배 등덜미로 술기운보다도 더 속히 전기같이 돌아가는 것을 느끼고 앉아 있는 재미에 한 그릇 먹고는 반드시 또 한 그릇을 계속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뼈가 저리게 어쩔 줄을 모르게 차가와지는 것만 아니면 몇 그릇이든지 이어 먹을 것 같다.

순회강연차 평안도에 갔을 때, 오산학교에서 이야기하다가 기차시간이 닥드려서 인사도 할새없이 강단에서부터 달음박질을 하여 8분 동안이나 뛰어가고도 3분이 모자라서 급행차를 타지 못한 일이 있었다.

꼭 그 차에 타고 가야 할 터에 타지를 못하였으니, 꼭 올 줄 알고 기다리는 곳에서 큰 야단이 날 것을 생각하니 통지라도 미리 해야겠어서

"전보" 하니까
"여기는 아직 우편소가 생기지 않아서 전보를 못 놉니다."

"그러면 전화라도!" 하니까
"전화도 우편소가 없으니까" 하였다. 속으로
"이런 데서도 사람이 사는가" 하였다. 전화도 전보도 하지 못하는 곳에서 급한 병이 생기거나 뜻밖에 재변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더위에 시달려 견디다 못하여 허위허위 얼음을 구하러 갔더니
"오늘 기차편에 얼음이 오지 않아서 오늘은 없습니다. 내일이나 가져오면 있지요. 날마다 기차편에 얼음을 가져다가 파니까요."

기가 탁 막힌다. 기차도 자동차도 다니지 않는 곳, 아주 얼음을 생각도 못하고 온 여름을 지내는 시골을 생각하면 서울 같은 곳에서 마음대로 얼음을 먹고사는 사람들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아아, 해가 지자면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코에 이마에 손에 땀이 솟는다. 철필을 던지고 빙수집으로 가자. 얼음 가는 스윽- 스윽- 소리를 들으러 가자.

(1928.7. 별건곤. 필명은 파영을 사용했음.)

*본고는 한국방정환재단(http://www.korsofa .org)의 동의를 얻어 작품과 사진 등을 일부 게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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