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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사색 공원의 사자후(死子逅)-4. 월파 김상용
대표작은 "남으로 창을 내겠소"
2008년 02월 03일 (일) 17:41:29 한철수 편집위원 guji2311@hanmail.net

허무를 통해 저항, 전원을 동경한 망향시인
동양적 허무주의를 느끼게 하는 독특한 시세계

묘비는 1956년 5주기를 기려 월파위원회에서 세워

   
 
  월파 김상용  

어느새 2008년 1월도 며칠 남지 않았다. 사자후 연재를 오랜 시간 멈춘 상황이라 왠지 망우산을 오르는 것이 조금은 낯설다. 대한도 지나고 입춘 추위가 코를 에는 한 겨울 형제 약수터를 지나 숨이 차오른다. 한쪽 구석에 작은 묘갈이 있다. 묘에는 미처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다. 묘비와 시비가 합쳐진 "월파(月坡) 김상용(金尙鎔) 지묘(之墓)" 네 번째 사자후의 주인공이다.

김상용은 망우산의 모든 문인이 그랬듯이 나라를 빼앗긴 시절. 꿈이 가득했던 우리의 터전은 잘못된 시절을 탓하기 보다는 노래로 승화를 시키는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커다란 친일행각은 없었으나 친일파의 낙인이 왠지 더욱 더 초라해 보이는 겨울날이다.

모처럼 망우산에서 김상용 시인과 사자후를 한다. 여기서 '사자후(死子逅)'란 '죽은 이와 우연히 만나다 또는 죽은 이와 만나 허물없이 지내다'라는 의미이다. (글쓴이 주)

드러누워 '향수'를 노래한 시인의 초라한 묘

김상용(1902~1951)의 묘갈 뒷면에는 드러누워서도 고향 연천을 바라보는 듯하다. 아니 못 이룬 시인의 꿈이 아스라이 배어있다.

김상용(1902~1951)의 묘갈 뒷면에는 드러누워서도 고향 연천을 바라보는 듯하다. 아니 못 이룬 시인의 꿈이 아스라이 배어있다.

<망향(望鄕)>

"인적(人跡)이 끊긴 山속
돌을 베고
하늘을 보오

구름이 가고
있지도 않은
고향(故鄕)이 그립소"
   
 
묘비 왼쪽에 ' “檀紀四二三五年 八月 十七日 京畿道 連天서 나셔서, 四二八四年 六月 二十二日 釜山서 돌아가셨고, 四二八九年 二月 三十日 이 자리에 옮겨 뫼시다.”고 그의 생과 졸을 간단히 적었다. 그의 49년 삶과 문학세계를 추적해 본다.

김상용은 아버지는 기환(基煥)이고 어머니는 나주 정씨 사이에서 1902년 음 8월 27일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왕림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호는 월파(月坡)이며, 시조 시인 김오남(金午男:1906~1996))이 그의 여동생이다. 아버지는 한의사로 만 여 평의 농지를 가진 부농이었기에 그의 유년 시절은 다복했다고 한다..

   
 

1917년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하였다가 18세의 나이에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제적당하고는 낙향했다가 보성고보로 전학 1921년에 졸업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과를 나와 보성고보에서 교편을 잡다가 곧 이화여자전문대학에 재직하다가 태평양전쟁이 터졌다. 일제는 즉시 영문강의를 폐강, 1943년 종로2가에서 동료 김신실과 장안학원을 경영을 하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군정 아래 그는 뜻하지도 않은 강원도지사로 부임한 일이 있었으나 실권도 없고, 통역관에 역할에 지나지 않은 것을 깨닫고는 몇 달 만에 사직하고 상경한다.

 이화여자대학교 복귀하여 영문학을 가르치다가 돌연 도미(渡美) 1946년 보스턴대학에 유학했다. 월파는 9 ․ 28 수복과 함께 공보처 고문 겸 구(舊)코리아타임 사장도 역임했다.

1551년 음 6월 22일 부산에서 피난 중 김활란(金活蘭)댁 파티에서 먹은 음식의 식 중독으로 사망했다. 그때 나이 마흔아홉 살이었다. 지금의 묘는 그가 죽은 지 1년 뒤 이곳으로 옮겼고, 5주기를 맞아 '고 월파선생 이장위원회'에서 1956년 6월 24일 월파선생 묘 앞에 화강암으로 비를 세웠다.

1926년부터 본격적인 창작과 번역 활동

월파의 최초 문학활동은 1926년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동아일보에 '일어나 가거라'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후 '이날도 앉아서 기다려 볼까, 무상(無常), 그러나 거문고줄은 없고나' 등을 연달아 발표했지만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월파가 문단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5년 "시원(詩苑)"에 발표한 '나, 무제(無題), 마음의 조각' 등 김상용 특유의 시를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이로부터 일제하의 불안시대에 처한 울분을 담은 서정시 '망향(望鄕), 물고기 하나' 등을 주로 "문장(文章)" 지면을 이용하였다.

<일어나거라>

아침의 대기는 우주에 찼다.
동편 하늘 붉으레 불이 붓는데
근역(槿域)의 일꾼아 일어 나거라
너의들의 일때는 아침이로다.

농무(濃霧)가 자욱한 신상(神爽)한 아침
죽은듯 고요한 경쾌(輕快)한 아침에
큰 소래 웨치며 일어 나거라
너의들의 잘때는 아침이 아니다.

아침의 대기를 흠씬 마시며
공고(鞏固)한 의지와 굿굿한 육체로
팔 다리 걷고서 일터에 나오라.
혈조(血潮)의 전선(戰線)에 힘있게 싸호자.

-처녀시. 1926년 동아일보 전문-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한 시원.  
이 시는 김상용의 처녀발표작으로 보고 있다. 제목처럼 어두운 현실에서 희망을 전달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달리 부르는 근역(槿域)을 표제어로 삼았고, '아침, 굿굿한 육체, 힘있게' 등 생기가 넘쳤지만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나머지 작품들은 민족의 비애와 분노로 이어진다.

1935년 시원에 발표한 '무제(無題)'를 보면 "천년 만년을 있노라면/그 바람은/내 무덤의 풀일망정/씻고 갈듯 하다만은". 라고 적었다. 허무에서 벗어나려는 작가의 몸부림 그리고 예언자적 정신보다는 그저 시인이 도달할 목적지가 자연이라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 절정은 '물고기 하나'이다.

<물고기 하나>

웅덩이에 헤엄치는 물고기 하나
그는 호젓한 내 심사에 걸렸다.

돐새 너겁 밑을 갸웃거린들
지난 밤 져버린 달빛이
허무로이 여직 비칠리야 있겠니?
지금 너는 또 다른 웅덩이로 길을 떠나노니
나그네 될 운명이
영원 끝날 수 없는 까닭이냐. 

-1935년 "시원(詩苑)"-

시집 "망향"에 도드라진 자연귀의 정신

본격적인 글을 발표한지 13년 만인 1939년 그의 유일한 시집인 "망향(望鄕)"을 발간한다. 이 책에는 우수와 동양적인 체념이 관조적 서정시들이 주를 이룬다.

   
 
  월파의 첫 시집 망향.  

'망향'은 말 그대로 '고향을 그리워한다.'로 귀결된다. 이 시집에는 월파의 시세계가 잘 나타나는 주옥같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월파의 대표작 '남으로 창을 내겠소'를 비롯하여 '괭이, 노래 잃은 버꾹새, 어미소, 여수, 향수' 등으로 꾸몄다. 망향의 글제의 대부분이 자연이다. 그의 시작(詩作) 초기부터 절정에 이르는 망향까지 자연 속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인이 인생을 관조하면서 담담한 심정이 동양적 허무를 느끼게 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오

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여동생 김오남 시조시인  

월파의 대표작 ‘남으로 창을 내겠오’의 전문이다. 자연 속에서 조용히 생을 관조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그의 시세계는 동양적 허무가 잘 표출하고 있다. ‘왜 사냐건’ 물으니, ‘웃지요’라 답에서 ‘그냥’ 웃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우는 건지….

함축성과, 표현의 간결성과, 그리고 탄력성이 한 번에 묻어나는 월파의 시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시이다. 왜 전원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그의 대답은 몇 날 몇 밤을 새워도 다 못할 말을 ‘웃지요’라는 단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그 ‘웃지요’ 한 마디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한 번에 나타내는 웃음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넓적 무우룩한 쇳조각, 너 괭이야
괴로움을 네 희열로
꽃밭을 갈고,
물러와 너는 담 뒤에 숨었다.

이제 영화의 시절이 이르러
봉우리마다 태양이 빛나는 아침
한 마디의 네 찬사 없어도
외로운 행복에
너는 호올로 눈물지운다.”
-망향. 문장사. 1939-

같은 시집의 ‘괭이’ 전문이다. 밭을 가는 괭이를 마치 친구를 부르듯 시인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외로운 행복을 홀로 흐느끼는 시인 자신을 괭이로 승화시켰다. 이는 일제의 탄압에 대한 체념 또는 소극적인 대응을 소극적인 도피나 전원으로의 귀의의 성향은 아닐까.
월파는 창작은 물론 이시기에 번역활동도 함께했다. 영문학자로서 포(Poe, E. A.)의 ‘애너벨리’를 “新生 27.(1931.1)” 키츠(Keats, J.)의 ‘희랍고옹부’ “新生 31.(1931.5.)”, 램(Lamb, C.)의 ‘낯익던 얼굴’ “新生 32.(1931.6.)”, 데이비스(Davies, W. H.)의 ‘무제’ “新生55. (1933.7.)” 등의 작품을 번역하여 해외문학의 소개에도 이바지하였다.

   
 
  월파의 고향 연천군 군남면에 세운 시비.  
 
그의 별명은 오뚜기, 암울한 시절도 있어

   
 
  1983년. 김학동 편저. 새문사.  
 

“김상용평전”을 쓴 모윤숙시인은 월파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의 키는 자그마해도 아주 다부진 인상을 주었다. 웃는 모습은 그 여덟팔자 굵은 눈썹 밑에서 한일자로 자지러지는 것이었는데, 또 어딘가 몰래 체소(體少)한 것과는 다르게 무게가 있는 양반이었다.’ 고 기술했다.

그를 알고 있는 원로작가들은 그의 별명이 ‘오뚜기’ 혹은 ‘지월공(地月公)’ 이랄 만큼 키가 작고, 통통하고, 가슴이 딱 바라졌었다. 한때는 백인계 러시아 사람과 5원 내기 팔씨름을 해서 이길 만큼 통뼈였으며 힘이 좋았고 동그랗고 통통한 얼굴에 유난히 숱이 많은 눈썹, 일종의 매력을 풍겨 호감을 주는 타입이기도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월파에게도 1940년대를 통해 피할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일제의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 조선의 징병제 실시를 규정한 병역법 개정이 1943년 8월 1일부터 시행되면서 “국민총력조선연맹”은 7일까지의 일주일간을 ‘징병제 실시 감사 결의 선양주간’으로 정하고 대대적인 결의 선양대회를 벌였다. 이 일환으로 매일신보는 8월 1일∼8일에 걸쳐 현역 화가들의 삽화를 겻들인 징병을 축하하는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를 연재했다. 여기서 ‘님은 일본의 천황을 의미’하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반도 청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현역 시인 김팔봉, 김용제, 김상용, 노천명, 김동환, 이하윤 등이 같은 제목으로 글을 실었다.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월파가 이외에 매일신보에 발표한 ‘영혼의 정화(1942.1.21)’, ‘성업의 기초 완성(1942. 2. 19)’ 등의 시가 친일행각에 포함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월파는 암울했던 당시 자신의 모습을 해방 후 산문집 “무하선생방랑기(無何先生放浪記 1951.)”를 통해 월파 자신도 비통한 시대의 소산물임을 짐작케 한다. '우리에게 한때 울지도 웃지도 못하던' 그런 시대가 있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채 이정표를 잃어버린 나그네처럼 기항지 없는 비운의 역사가 있었다. 마치 고향이 있으되 고향을 잃어버린 방황자의 모습이었고, 목숨이 있으되 숨통이 막혀버린 그런 비극의 연속을 체험해 왔다. 이른바 고향을 찾아 헤매는 그런 얼굴이 곧 작자의 얼굴이었고 또 우리의 얼굴이 아니었던가. 그의 마음이 잘 도드라진 작품을 소개한다.

<노래 잃은 뻐꾹새>

“나는 노래 잃은 뻐꾹새
봄이 어른거리건
사립을 닫치리라.
냉혹한 무감을
굳이 기원한 마음이 아니냐.

장미빛 구름은
내 무덤 쌀 붉은 깊이어니

이러해 나는
소라(靑螺)같이 서러워라

'때'는 지꿎어
꿈 삼켰던 터전을
황폐의 그늘로 덮고…

물 깃는 처녀(處女) 도라간
황혼(黃昏)의 우물ㅅ가에
쓸쓸히 빈 동이는 노혔다.”
-망향. 문장사. 1939-


월파선생을 구리시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사자후를 하면서 월파의 글을 묵독하면서 이백의 ‘산중답속인(山中答俗人)’을 생각한다.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桃花流水杳然去(도화류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나에게 물은즉 어찌하여 푸른 산에 사는가?
웃고 대답하지 않으나 마음이 스스로 한가하다.
복숭아꽃 실린 물이 아득히 흘러가니
별천지요 인간 세상이 아니로구나.”

도화경은 아니지만 시인들에게는 누구나 돌아가고픈 본향 있다. 월파 역시 자신이 돌아 갈 곳이 어디인지 이백의 글로 대신한다.

   
 
  젊은 시절의 김상용.  
 

“인적 끊긴 산속/돌을 베고/하늘을 보오.//구름이 가고,/있지도 않은 고향이 그립소.” 그의 작품 ‘향수(鄕愁)’이다. 망우산 한 구석 인적도 드물고, 찾는 이 별로 없는 한적한 곳에 두러 누워 세상을 보면서 순수한 눈으로 일제강점기 서양시 번역과 서정시를 전파했던 월파. 그보다 조금 떨어진 곳의 한용운, 방정환, 박인환 등의 묘역에는 그들을 기리는 문학비가 있어 그들의 만년유택의 존재를 알리나, 최서해는 가족과 기념회에서 세운 별도의 문학비로 자신의 존재를 달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 좋은 시로 좋은 작가로 알려진, ‘남으로 창을 내겠소’ 주인공 월파 김상용의 존재는 그저 평범한 비석 하나뿐이다.
우리는 향토를 대표하는 인물을 논할 때 ‘생거(生居), 우거(寓居), 사거(死居)’ 모두를 포함시킨다. 여기서 생거란 우리고장에서 태어난 사람을, 우거란 이곳에 머물러 작은 업적을 남긴 사람, 사거란 죽어서 묘를 이곳에 둔 사람을 말한다.
월파선생은 사거로 구리시를 찾았다. 따라서 그의 명성에 알맞은 대우를 해야 할 것이다. 그의 묘 주변에 그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작은 문학비라도 세워야 할 것이다.

####김상용의 대표시####

<물고기 하나>

웅덩이에 헤엄치는 물고기 하나
그는 호젓한 내 심사에 걸렸다.

돍새 너겁 밑을 갸웃거린들
지난 밤 져버린 달빛이
허무로히 여직 비칠리야 있겠니?
지금 너는 또 다른 웅덩이로 길을 떠나노니
나그네 될 운명이
영원 끝날 수 없는 까닭이냐.

<어미소>

산성(山城) 넘어 새벽드리 온 길에
자욱 자욱 새끼가 그리워
슬픈 또 하루의 네날이
내(煙)끼인 거리에 그므는도다.

바람 한숨짓는 어느 뒷골목
네 수고는 서푼에 팔리나니
눈물로 잊은 네 침묵의 인고(忍苦) 앞에
교만(驕慢) 한 마음의 머리를 숙인다.

푸른 초원(草原)에 방만(放漫)하던 네 조상
맘놓고 마른목 추기든 시절(時節)엔
굴레없는 씩씩한 얼굴이
태초청류(太初淸流)에 비친 일도 있었거니.

<반딧불>

너는 정밀(靜謐)의 등촉
신부 없는 동방(洞房)에 잠그리라.

부러워하는 이도 없을 너를
상징해 왜 내 맘을 빚었던지

헛고대의 밤이 가면
설은 새 아침
가만히 네 불꽃은 꺼진다

<나>

나를 반겨함인가 하여
꽃송이에 입을 맞추면
전율한 만치 그 촉감은 싸늘해-

품에 있는 그대로
이해(이해)저편에 있기로
'나'를 찾았을까?

그러나 기억과 망각의 거리
명멸하는 수없는 '나'의
어느'나'가 '나'뇨.

<포구(浦口)>

슬픔이 영원해
사주(砂洲)의 물결은 깨어지고
묘막(杳漠)한 하늘 아래
고할 곳 없는 여정(旅情)이 고달파라.

눈을 감으니
시각(視覺)이 끊이는 곳에
추억이 더욱 가엾고

깜박이는 두 셋 등잔 아래엔
무슨 단란(團欒)의 실마리가 풀리는지......

별이 없어 더 서러운
포구의 밤이 샌다.

<태 풍>

죽음의 밤을 어질르고
문을 두드려 너는 나를 깨웠다.

어지러운 명마(兵馬)의 구치(驅馳)
창검의 맞부딪힘,
폭발, 돌격!
아아 저 포효(泡哮)와 섬광!

교란(攪亂)과 혼돈의 주재(主宰)여
꺾이고 부서지고,
날리고 몰려와
안일을 항락하는 질서는 깨진다.

새싹 자라날 터를 앗어
보수와 저애(저碍)의 추명(醜名) 자취하던
어느 뫼의 썩은 등걸을
꺾고 온 길이냐.

풀 뿌리, 나뭇잎, 뭇 오예(汚穢)로 덮인
어느 항만을 비질하여
질식에 숨지려는 물결을
일깨우고 온 길이냐.

어느 진흙 쌓인 구렁에
소낙비 쏟아 부어
중압(重壓)에 울던 단 샘물
웃겨 주고 온 길이냐.

파괴의 폭군!
그러나 세척과 갱신의 역군(役軍)아,
세차게 팔을 둘러
허섭쓰레기의 퇴적(堆積)을 쓸어 가라.

상인(霜刃)으로 심장을 헤쳐
사특, 오만, 순준(巡逡) 에의 버리면
순직과 결백에 빛나는 넋이
구슬처럼 새 아침이 빛나기도 하려니.


####월파 김상용의 연표####
<주요경력>
-1902년 음 8월 27일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왕림리 출생
-191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입학
-1919년~21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전학, 졸업
-1922년~27년 일본 릿교대학(立敎大學) 영문과 입학, 졸업
-1927년 보성고등학교 교사
-1928~43 이화여자전문대학 교수
-1943 장안서적 운영, 구 코리아타임
-1945년 경기도지사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1946~49년 미국 보스톤대학 유학. 49년 2월 귀국
-1950년 9 ․ 28 수복. 공보처 고문 겸 구(舊)코리아타임 사장 역임
-1951년 음 6월 22일 부산에서 식중독으로 사망

<문학활동>
-1926년 '일어 나거라’를 동아일보에 발표. 이후 ‘이날도 낮아서 기다려 볼까, 무상(無常), 그러나 거문고 줄은 없고나’ 등 계석 발표 본격적 활동.
-1935년 “시원(詩苑)”에 ‘나. 마음의 조각, 무제(無題) ’ 등 발표 문단에 알려짐.
-1939년 창작집 “망향” 출판 ‘남으로 창을 내겠소.’ 등 발표.
-1951년 산문집 “무하선생방랑기(無何先生放浪記)” 출판
-1956년 6월 24일 묘비와 문학비 세움.
-1983년 김상용전집. 김학동 편저. 새문사 출간.

*참조문헌:한국현대시 문학대계(10권. 이승훈. 지식산업사. 1984), 한국민족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원.1991.), 서울문학(박수진. 망우리공원문인묘지순례기.2004년), 연천군홈페이지. 함동선의 문학답사기-김상용 편, 한철수의 아차산이야기(구지옛생활연구소. 2003)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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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산
2008-02-09 15:48:09
대단하십니다.
망우산에는 많은 근대의 인물이 있는 줄 아는데, 한위원님! 문학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물 정보를 부탁드립니다. 좋은 공부하고 갑니다.-인창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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