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세월아 네월아 나달 봄철아 오고 가지 말아라
알뜰한 이팔 청춘이 다 늙어를 간다.
월미봉 살구 나무도 고목이 덜컥 된다면
오던새 그 나비도 되돌아 간다.

정선아리랑이 구슬프다고 했던가?
정암사(淨巖寺)를 찾아 나섰다. 한국의 5대 적멸보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정선을 찾아왔는데 모른척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서울에서 출발하여 기차를 이용한다면 태백선 고한역 하차 → 시내버스,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서울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원주 → 제천 → 영월 → 남면 삼거리 → 고한 정암사에 도달할 수 있다. 고한읍에서는 태백 방향이다. 만약 국도를 이용한다면 원주부근 → 새말 → 평창 → 정선 → 고한 정암사에 이를 수 있고 진부에서는 → 나전삼거리 → 정선 →고한 정암사에 도달할 수 있다. 마침 강원도 대관령 방향에서 오는 중이라 마지막 코스를 이용했다.

구절양장이라 했던가? 비비꼬인 양의 창자같은 길을 돌고 내달려 드디어는 정암사 경내에 다다른다. 약간 경사진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내린다.

정암사는 일주문 옆으로 작은 길이 있고 요사체 앞, 종각 부근까지 차를 끌고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처음이라 잘 몰라서 큰 길 옆에 차를 세우고 일주문을 거쳐 걸어올라 갔다. 드디어 정암사 경내에 들어섰다. 특이하게 경내의 중심을 물이 가르고 지나간다.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도 주변의 나무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푸근하다.

정암사는 강원도 정선군(旌善郡)의 깊숙한 산속에 자리한 고한읍(古汗邑) 고한리의 태백산(太白山) 기슭에 자리잡은 절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 속칭 갈래사(葛來寺)라고도 한다.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대국통(大國統)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唐)나라에서 사리(舍利)를 가지고 귀국, 창건하였다. 절의 입구에는 일주문(一柱門)이 있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선불장(選佛場)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수마노탑을 등에 진 고색(古色) 창연한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다. 만약 이곳을 찾아간다면 선불장을 찾아보고 그 역사를 살필 일이다.

이 밖에 중간 도량에 종루가 있고, 선불장 옆에는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자장각(慈藏閣), 삼성각(三聖閣) 등이 있다. 적멸보궁은 자장법사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모셔와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수마노탑은 전란이 없고 날씨가 고르며, 나라가 복되고 백성이 편안하게 살기를 염원하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영험한 곳, 혹은 대가람에는 여지없이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전설이 있다. 정암사라고 해서 특별하게 다를 것이 없다.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불교의 융성에 힘쓰던 자장율사는 28대 진덕여왕 때 대국통(大國統)의 자리에서 물러나 강릉에 수다사를 세우고 평온한 정신으로 살았다.

아마도 열반의 터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루는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내일 너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리라” 하였다. 놀라 깨어난 자장이 대송정에 이르니 문수보살이 나타나 “태백의 갈반지(葛磻地)에서 만나자” 하고 사라졌다.

그 말을 따라 태백산에 들어가 갈반지를 찾아 헤매던 자장은 큰 구렁이들이 나무 아래 서로 얽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갈반지라 여겨 ‘석남원’(石南院, 곧 정암사)을 지었다.

자장은 석남원에 머물며 문수보살이 나타나기를 몹시 기다렸다. 어느 날 다 떨어진 가사를 걸친 한 늙은이가 죽은 개를 삼태기에 싸 들고 와 “자장을 보러 왔다” 하였다. 스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귀에 거슬렸던 자장의 시중이 호통을 치니, 그 늙은이는 천연덕스럽게 “자장에게 전해라. 그래야 갈 것이다”라고만 대꾸했다. 문제는 언제나 이런 신화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자장은 이 말을 전해 들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시중을 시켜 늙은이를 쫓아버리게 했다. 그러자 그 늙은이는 “아상(我相,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거나 남을 업신여기는 교만한 마음)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리오” 하고 탄식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곧 삼태기를 뒤집으니 죽은 강아지가 푸른 사자로 변하였다. 늙은이는 그 사자를 타고 빛을 뿌리며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바로 그 늙은이가 문수보살이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자장이 그 뒤를 곧바로 쫓았으나, 이미 문수보살은 떠나 가버린 뒤였다. 이후 자장은 몸을 남겨두고 떠나며 “석 달 뒤 다시 돌아오마. 몸뚱이를 태워버리지 말고 기다려라” 하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한 스님이 와서 오래도록 다비하지 않음을 크게 나무라고 자장의 몸뚱이를 태워버렸다. 석 달 뒤 자장이 돌아왔으나 이미 몸은 없어진 뒤였다. 자장은 “의탁할 몸이 없으니 끝이로구나! 어찌하겠는가? 나의 유골을 석혈(石穴)에 안치하라”는 부탁을 하고 사라져버렸다.

한편, 이전에 자장이 사북리의 산꼭대기에 불사리탑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계속 쓰러짐에,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눈 위로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 적멸보궁, 사찰터에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을 짓고, 갈래사(葛來寺)라 하였다고도 전한다. 칡으로 인연이 이어진 절터라 그런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지금도 고한에는 갈래초등학교가 있고 상갈래, 하갈래라는 지명이 있다. 아마도 갈래사라는 절 때문에 남겨진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다. 정암사는 숙종 39년(1713)에 중수되었으나 낙뢰로 퇴락하니 6년 뒤 다시 중건되었고, 1771년과 1872년에, 그리고 지난 1972년 다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6.25이전 이곳에 광산이 들어서기 전의 정암사는 아마 더없이 조용한 절간이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대처도 수백킬로미터 떨어진 그야말로 심심산골이었다. 백두대간의 가장 심원한 계곡에 깊이 젖어들어 속세를 잊고 정진할 수 있던 곳이었다.

정암사는 우선 접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기운으로 충만해있는 절이다. 그러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좁은 듯 넓고, 넓은 듯 좁은 길과 협착한 공간인 듯하면서도 슬기롭게 그것을 이용한 넓은 안목 때문으로 보인다.

다만 지금은 관광객이 늘어 선승들의 조용한 구보를 방해하고 있다.
새로 단장한 일주문에 들어서면 티끌 하나 없는 마당이 펼쳐진다. 수행자의 발심이 느껴지는 곳이다. 우람한 축대 위에 세워진 육화정사가 왼쪽으로 보이고 범종각이 정면에 나타난다.

적멸보궁은 범종각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범종각을 지나 작은 다리를 지나 건너가면 가슴 높이의 야트막한 돌담을 두르고 있는 적멸보궁과 그 앞뜰은 차분하게 단장된 정원처럼 운치가 흐른다.

경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종루이다. 종루 부근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다가가 보니 작은 물고기들이 동심을 만들어내며 움직인다. 지나가는 스님에게 여쭈어보니 열목어란다. 작은 계곡줄기 옆에 세워진 아낸 간판에 열목어라고 적혀 있기도 하다. 가만히 살펴보니 열목어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물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가 사라진다. 정암사 열목어 서식지(淨巖寺熱目魚棲息地)란다.

안내판이 서 있는데 강원도 정선군(旌善郡) 고한읍(古汗邑) 고한리 정암사 일대에 있는 열목어 서식지를 일컫는 말이란다. 열목어는 냉수성(冷水性) 어족으로, 아무리 더운 여름에도 수온이 20℃ 이하를 유지하는 곳에서만 살 수 있다.

또 물이 얕고 흐름이 완만하며 바닥에 자갈이 깔려 있는 산란장이 있어야 하며, 숨을 수 있고 월동할 수 있는 깊은 늪이 있어야 한다. 신라 때의 고찰인 정암사 일대는 열목어의 서식 요건을 고루 갖춘 세계 최남단의 분포지로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근래 보호구역 내 벌채와 상수도 공사, 광산개발 등으로 서식환경의 파괴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러 철저한 보호대책이 요망되고 있다. 열목어는 천연기념물 제73호이다.

열목어는 물이 맑고 찬 곳에서만 산다. 여름에 수온이 섭씨 20도 이상 올라가는 곳에서는 살지 못한다. 그런 조건을 갖추려면 일단 나무가 우거져 수면이 태양의 직사광선을 받지 않아야 한다. 한여름의 온도를 생각해 보니 열목어가 사는 곳이라면 거기가 심산유곡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열목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은 정암사 계곡과 경북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 계곡 일대로, 각각 천연기념물 제73호, 제74호로 지정돼 있다.

열목어는 육식성이어서 물속에 사는 곤충이나 어린 물고기들을 잡아먹는다. 쥐를 포식했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열목어도 자라면 제법 몸길이가 될 것이다. 쥐를 잡아먹었다는 말이 믿어지지는 않지만 반박할 내용도 없고 주장할 논거도 나에게는 없다. 머리끝에서 꼬리 끝까지가 보통 40∼70cm이고, 때로는 1m 이상 되는 것도 있다.

그 정도 크다면 쥐라고 먹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곳 계곡은 그다지 넓지 않고 생물은 만만치 않다. 등지느러미와 꼬리지느러미 사이에 기름지느러미가 따로 있고, 눈동자보다 작은 흑갈색 반점이 온몸에 흩어져 있어 다른 물고기와 쉽게 구별된다. 눈이 녹는 3, 4월에는 암컷과 수컷이 산란과 방정을 하기 위해 한곳에 모여 온통 소란을 피워댄다.

눈에 열이 많아 눈알이 새빨갛다고 하며 열을 식히기 위하여 찬물을 찾는 까닭에 열목어(熱目魚)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여항어라고도 했다. 탄광 개발 전에는 고한과 사북을 흐르는 개천에도 어른 팔뚝만한 열목어가 숱하게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정암사 경내의 작은 계곡 일부에서만 살고 있다.

열목어를 바라보다 우측으로 난 돌다리를 건너니 작은 나무가 서 있다. 작지만 위엄 있는 나무다. 자장율사가 지팡이를 꽂아놓았는데 싹이 나 지금의 나무가 되었다는 설명이 쓰여 있다. 사실이라면 수령이 1,300살이 넘는다. 주장자가 바로 이곳이다.

주장자에 다시 싹이나 자랐다고 한다. 고개 들어보니 그 안쪽에 적멸보궁이 있다. 고색이 창연하게 깃든 기둥과 단청이 하얗게 날아간 서까래, 귀퉁이가 비바람에 깎여 둥글 넙적하게 된 돌계단…….

적멸보궁은 파란 기와를 올린 지붕을 제외하고 옛 세월 속에 멈춰 선 듯하다. 적멸보궁 앞으로 흐르는 냇물 소리는 참으로 우렁차다. 양택풍수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곳은 사람이 입거하기에 그리 좋지 않으며 늘 두통에 시달리며 근심걱정이 떠나지 않으며 유택으로 사용할 경우는 벙어리가 난다고 했는데 절은 괜찮은 것인지.

부처의 사리는 보궁 뒤에 있는 천의봉 절벽 위 중간 지점의 수마노탑에 봉안돼 있다. 마노석이라는 이름의 석회암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상륜부를 청동장식으로 씌운 수마노탑은 한반도에서 보기 드문 7층 모전석탑이다. 어쩐지 여주 신륵사의 모전석탑이 생각난다. 적멸보궁은 다른 사찰의 적멸보궁처럼 부처상을 모시지 않았다.

다시 나와 산 중턱을 바라보면 꿈처럼 보이는 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보물 제410호로 지정돼 있다. 탑으로 올라 가려면 적멸보궁 오른편으로 난 비탈을 찾아 계단을 따라 200미터 이상을 올라야 한다. 계단이 겹겹으로 놓여지고 가파른 산길이라 좌우로 지현자를 그리며 만들어져 있다.


탑에 오르면 정암사의 전경이 고즈넉하게 내려다보인다. 아담한 산신각과 여전히 푸른 소나무가 보인다. 한눈에 보아도 삼성각이 풍수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탑을 내려가면 반드시 산신각에 들려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수마노탑을 참배하기 위해 산을 오르려는데 일단의 스님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큰스님으로 보이는 스님을 두 분의 젊은 스님이 부축하고 있었다. 합장을 하니 스님이 간단한 법문을 일러주시며 웃으신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도 맑은지.

스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시자 수행하던 시자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선물가방에서 작은 물건을 꺼내 모든 사람에게 돌려주었다. 손바닥 보다 조금 작은 물건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시한수가 적혀 있다.

그제야 어디선가 본 듯 낮이 익었다 했더니 조계종 총무원장이신 법장스님이었던 모양이다. 스님이 합장을 하고 내려간 다음 작은 선물을 펴보니 단주가 들어있다. 기쁜 마음으로 손목에 차고 수마노탑을 향해 오른다.

풍수를 따질 필요도 없이 적멸보궁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수마노탑으로 올라갔다. 수마노탑 앞에 서서 고한 쪽을 바라보면 정암사가 이곳에 절집을 조영한 이유의 일단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수마노탑에서 풍수를 논한다는 것도 어울리지 않을 수 있지만 어디 그냥 넘어가기에는 내 의식이 가만있지를 않는다.

수마노탑 뒤로 세속으로 뻗어나간 무한한 공간이 펼쳐지고 있는데 이른 봄날 오후에 보면 수마노탑은 서기의 파도가 몰아쳐오는 한 정점에 위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실감하게 된다.

수마노탑으로 올라가면서 본 은대봉 산록과 능선은 하늘을 떠받친 듯 장중하고 여유로워 수마노탑조영위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절이 전하는 정암사 유래역사를 보면, “태백산 정암사는 신라선덕여왕 14년(서기 645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자장율사가 당나라 산서성에 있는 청량산 운제사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세존의 정골사리와 치아, 불가사 패엽경을 전수하여 선덕여왕 12년에 귀국, 14년 을사년에 금탑, 은탑, 수마노탑을 쌓고 부처님의 사리와 유물을 봉안하였다.

적멸보궁 뒤 높은 곳에 세워진 수마노탑은 자장율사가 귀국할 때 서해용왕이 용궁으로 데리고 가서 준 마노석으로 탑을 쌓은 것이라 하여 수마노탑이라 한다. 금탑과 은탑은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귀한 보물에 탐심을 낼까 염려하여 영구히 보존키 위해 비장해두었다 한다. 적멸보궁이 모두 그러한 방식으로 비방한다.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신 곳이므로 불상을 모시지 않았으며 이러한 성지를 보궁이라 한다.”

한국에는 오대적멸보궁이 있다. 정암사 적멸보궁은 오대산(상원사), 사자산(법흥사), 태백산(정암사), 영취산(통도사 금강계단), 설악산 봉정암의 진신사리처 등 전국 5대적멸보궁중의 하나이다.

원래는 사리가 이곳 다섯 곳에만 있었지만 지금은 비슬산 용연사와 금산사 세존사리탑등으로 진신사리탑이 늘어난 것은 임진왜란 때 왜병이 진신사리를 훔쳐갈까 하여 사명대사가 왜적을 물리치고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나누어 모시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수마노는 광물 중 석영의 한 가지이다.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이 광물은 매우 아름다운 빛을 가지고 있으며 광택이 나는데 홍.흑.백의 세 종류가 있다. 도장이나 문방구 등의 장식품을 만드는데 씀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런 심상하지 않은 돌로 쌓은 탑이 수마노 탑이다. 정암사 수마노탑은 우리나라의 최고의 오지 중 한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처음 탑을 설치할 때는 지금보다 수십, 수 백 배 더했으리라. 그러한 점에서 그 공력이 현저함을 웅변하고 있다. 이 수마노 탑은 보물 410호로 지정되었다.

참배를 마치고 수마노탑(水瑪瑙塔)을 돌며 자세히 살핀다.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산 214번지가 행정주소란다. 수마노탑은 모전석탑 1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높이가 9m에 이른다. 모전석탑 형식으로 쌓았는데 회록색 계통의 석회암이라고 한다.

이 탑은 전탑계 모전석탑(7층)으로 탑신부를 구성한 횡전재는 회록색의 석회암으로 크고 작은 모양의 직육면체를 질서 정연하게 쌓아올려 수법이 정교하며 표면은 잘 가공 되어 마치 벽돌을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1층 탑신은 밑면이 178cm로 15단을 쌓아 높이 103cm 방형(方形)을 만들었고, 1층 탑신 남쪽면 중앙에는 감형을 설치하였는데 화강석으로 외경 폭 65cm, 높이 70.5cm, 외경 폭 41cm, 높이 59cm의 틀을 짜서 판석으로 문짝을 세워 2짝의 문임을 나타내고 중심에 쇠 문고리를 부착하였다. 옥개는 전탑의 전통적 형식인 추녀의 폭이 좁으며, 전각에서 살짝 들린 듯 하고 각층 전각 끝에는 풍경이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옥개의 체감 현상도 탑신과 마찬가지로 크지 않아 부드러운 느낌을 주며, 옥개 받침은 1층 7단부터 시작하여 올라가면서 1단씩 줄여 7층에서는 1단이 되었고 윗면의 층단도 1층의 9단부터 시작하여 올라가면서 1단씩 줄여 7층에서 3단이 되었다. 추녀에는 풍경이 달려있고 상륜부에 화강석으로 만든 노반이 있고 그 위에 모전재 2기를 얹어 청동제 상륜을 받치고 있다.

이 탑에 대한 유래를 살펴보면 신라 사적기(史蹟記)에 선덕여왕 12년(서기 643년) 자장율사(慈裝律師)께서 정암사를 창건하고 7년 후에 수마노탑을 건립 하였다고 전하나 고려시대의 건립으로 추정된다. 재료는 모전석, 층수는 7층, 기단 6단, 탑신은 감실 문비음각으로 상륜부는 청동제로 되었다.

사적(史蹟)에 의하면 이 태백산 삼갈반지(三葛盤地)에 삼봉이 있으니 동은 천의봉, 남은 은탑봉, 북은 금탑봉이며 그 가운데 3탑이 있으니 첫째 금탑, 둘째 은탑, 셋째 마노탑 인데 금․은 두 탑은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마노탑만 나타나서 전한다고 한다.

이 탑을 세우며 탑의 기단부에 사리, 불지절, 불장주(佛掌珠), 염주 패엽경(貝葉經)을 봉안하였다 하며, 이 탑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시대 중국의 오대산에 들어가 수도하고 본국으로 귀국할 때(서기 643년) 서해용왕이 자장율사의 불도에 감화되어 용궁에 들어가서 용왕으로부터 수마노석을 받아 쌓아 올린 탑이라 한다.

이 탑을 세운 뒤 조선 숙종 39년에 취봉당자인과 일종스님이 주동하고 천밀스님이 화주(化主)하여 그해 5월에 수마노탑을 중수하였는데 8월 15일 낙뢰로 인해 탑이 파괴되었으므로 6년 후에 천밀(天密)스님이 다시 발원하고 시주를 걷어 5층탑으로 축조하였다.

그 후 영조(英祖) 46년에 취암성우화상(翠岩性愚和尙)이 발원하여 은휴당시연과 단일당홍관이 협력하여 탑을 중수하고 찰우대를 조성하였고, 익년 5월에 낙성하였는데 원탑이 7층 동유장엄(銅鍮莊嚴)이 5층 풍경이 32구였다.

이 풍경은 바람만 슬쩍 불어도 맑은 소리가 공중에 가득 찼다. 백여년이 지난 광무황제 9년에 얼암서보화상(蘖癌西寶和尙)이 탑이 기우는 것을 보고 발원하고 백일기도를 하였더니 탑 우측 부근에서 한 무더기의 마노 보석을 발견 하였다고 한다. 그때 봉은사에서 화엄경판(華嚴經板)을 조각하고 해인사 대장경을 인출한 남호영기 대사와 협력하여 동년(서기 1872년) 5월에 준공했다.

천밀스님이 이 탑을 중수할 때 금․은 식기(食器)에 사리를 담아 봉안 하였던 것이 탑과 함께 파괴 되었으므로 그 속에서 염주 81교와 금주 5교 등을 걷어 1층 탑신에 안장하고 7층 탑으로 축조하였는데, 그 뒤에 49보령(寶鈴)이 하늘에 솟았는 듯 했다고 한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나 탑이 도괴 직전에 놓여 1972. 11. 8. 당시 문화공보부 문화재 관리국에서 국비 340만원을 들여 완전 해체 복원하였으나 광산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지역의 특성상 지반이 침하되고 탑의 균열이 심화. 1996년 총사업비 1억 9천 6백만원을 들여 기단석 이상 전면을 해체 보수 및 탑 보호시설․진입로를 정비하였다.

정암사의 가장 높은 곳, 적멸궁 뒤쪽으로 급경사를 이룬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만든 대지 위에 서 있어 경내 또는 절 입구 등 어디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

수마노탑은 사자모양의 산 정상에서 흘러내린 줄기의 중간에 멈추어선 듯 세워져있다. 그 뒤로는 날카로운 바위가 칼처럼 돌출되어 있으며 탑을 쌓기 위해 돌로 기단을 쌓아 그 높이가 제법이다. 겉으로 보면 길게 뻗어 내리는 급한 행룡간에 탑을 새운 듯 보이지만 돌로 쌓은 기단 아래를 살펴보면 당판의 흔적과 전순이 보인다. 말할 것도 없이 혈상을 갖추고 있다.

혈상을 갖추고 있다 해도 묘를 쓰지는 못할 곳이다. 뒤를 파고드는 바위의 모습이 여간 날카롭지 않아 이금치사를 당할 곳이기 때문이다. 다만 탑으로 세울 수 있는 혈처로는 지나치게 좋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전형적인 유혈의 혈상을 지닌 자리이기는 하나 바위가 날카로워 묘를 쓰기는 어려운 자리다.

탑은 2004년 7월 25일 이전에 보수 한 것 같다. 참배객을 위해 탑돌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주변을 넓히고 돌을 깔았는데 이제 막 공사가 끝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마도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도 이 공사가 끝난 모습을 보러 오신 것인지 모른다.

탑을 돌다 바라보니 정암사 경내가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이미 적멸보궁이 어떤 위치에 지어져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애석하게도 요사체는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피하지 못하고 직충을 당하고 있다. 물론 물을 돌렸지만 애초의 자연적인 기운은 피하지 못함을 생각할 때 요사체의 한 귀퉁이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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