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호(작가)
황 희 정승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 한 분이 그의 이웃에 살고 있었다.

워낙에 부지런한 할아버지는 그의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 습관 덕분에 결국은 마을에서 가장 이름난 부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여름철만 되면 남의 밭을 다니면서 보리이삭을 줍고, 가을철이면 하루 종일 남의 논바닥을 여기 저기 다니면서 벼이삭을 줍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흥, 잘 사는 영감이 추하게 저게 무슨 짓이람.”
“그러게 부자가 더 무섭다니까.”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손가락질을 하였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못 들은 척하고 해마다 그 일을 계속하였다.

어느 날, 이를 보다 못한 황 희도 궁금함을 참다못해 할아버지에게 묻게 되었다.
“할아버지, 거지처럼 왜 그런 걸 줍고 다니셔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웃는 낯으로 황 희에게 되묻게 되었다.
“왜, 내가 이런 걸 줍고 다니는 게 어때서 그러니?”

“할아버지는 창피하지도 않으셔요? 할아버지 댁에는 보릿가마며 볏가마가 늘 산더미처럼 쌓여 있 잖아요.”
황 희의 물음에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면서 다시 자세히 대답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런 일을 하는 게 창피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니?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이 있지 않 니? 알고 보면 산더미처럼 쌓인 볏가마나 보릿가마도 이런 이삭 하나하나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 이란다. 그리고 벼이삭이나 보리이삭에 매달린 낟알 하나하나가 이렇게 여물 때까지는 얼마나 많 은 농사꾼들의 땀방울이 필요했는지 아니? 그런 걸 생각한다면 이런 귀중한 낟알들을 논바닥이나 밭에 그냥 내버려둔다면 말이 안 되지. 아암, 벌을 받을 일이지. 이제 내 말을 좀 알아듣겠니? 하 하하- ”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난 어린 황 희는 그제야 조금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나중에 정승이 된 후에 그가 가장 검소한 생활을 하게 된 것도 어쩌면 어린 시절 이웃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큰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민족운동가이며 정치가였던 조만식 선생의 검소한 생활은 감히 일반 사람들로서는 흉내내기조차 힘들뿐만 아니라 그 정도가 지나쳤다고 한다.

그는 무명 두루마기를 항상 즐겨 입고 다녔는데 그의 두루마기에는 언제나 단추가 달린 것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단추를 단 두루마기를 즐겨 입은 것은 고름을 달면 그만큼 천이 들어가기 때문에 천을 아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리고 말총으로 튼튼하게 엮어 만든 모자를 즐겨 쓰고 다녔는데 그것은 모자를 대대로 물려주면서 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산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는 졸업식이나 입학식 때에는 예복을 입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초라한 평상복 차림의 옷을 입고 식에 임하곤 하였다. 이에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남강 이승훈이 넌지시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성스러운 오늘만큼은 내빈들의 눈도 있고 하니 제발 예복을 입으십시오.”

그러나 조만식 선생은 끝내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없는 것을 어떻게 입겠소? 난 교장 노릇을 못하면 못했지, 예복을 입을 생각은 없소.”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 는 옛말이 있다. 쓰지 않고 아껴야 큰 재산을 모을 수 있다는 우리 조상들의 가르침을 새삼 다시 한번 새겨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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