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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하신 증조부님의 명예회복을 진정으로 바란다.

닉네임
정병기
등록일
2006-12-31 07:12:53
조회수
14102
독립운동하신 증조부님의 명예회복을 진정으로 바란다.
진실.화해를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바랍니다.

저의 증조부님이신 고 정 용선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을 지난 30영년간 하다가 진실.화해 위원회를 증조부의 관련한 서류를 정식으로 접수하여 조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에 박 세미 조사관님이 담당하셨는데 다른 분이 조사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젖하고 이제는 전혀 다른 소식을 듣지 못하고 금년 2006년 경술년을 넘기는 것 같아 궁금합니다.

저의 증조부님의 관한 조사가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답변을 보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증조부 독립운동 밝히려 30년 `고군분투'>
1928년 경성형무소 감방에서 사망하신 증조부 명예회복 되어야 바람직.

1928년 경성형무소 감방에서 사망하신 증조부 명예회복 되어야 바람직.
이제 정부가 실질적인 행동에 나서야 할때.
구호 보다는 실천이 우선되는 태도 보여야 마땅.
왜 호적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면 나머지는 정부가 책임져야 하지 않는가?

미발굴 독립유공자에 정부가 발굴에 앞장서야 바람직
진정한 한국의 독립은 미발굴 독립유공발굴이 되어야 참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증손자인 나는 반드시 자손된 도리를 하고 싶다.
여러분 꼭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증조부(정용선)의 호적 주소는
성명:정용선
출생년월일:서기1883년12월17일생(명치16년12월17일생)
본젹지:경북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 391번지
거주지:대정3년 충청북도 청주군 양성면 도원리3통1호
대정4년 경북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7통10호
경북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1062번지
전국을 무대로 독립운동(독립자금 군자금)을 담당 하였다고 함

사망기록:제정호적에 소화3년5월20일 오후3시20분 경성형무소 감방(서기1928년5월20일오후3시20분사망)형무소에소 통지하여 호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꼭 저의 증조부에 대한 기록을 찿을 수 있게 관심을 가져 주시고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이모든것을 정부가 마땅히 해야 옳은것 같은데 가족에게만 자료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생각이 듭니다.그리고 일본인이 작성한 제정호적에 수형기록이나 옥사기록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호적을 검토하여 그에 해당하는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 할것 같습니다. 저는이번에"민족문제연구소"에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꼭 좀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친일문제가 청산되고 역사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현재 그동안 찿은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이제는 진정한 독립유공자 발굴에 정부가 앞장설때...
증보주의 진정한 독립운동의 명예회복을 원합니다.도움 좀 주십시요

경성형무소에서 사망하신 증조부 명예회복 바랍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받치신 증조부 구천을 맴돌고 계시네요?
이글을 보시는 역사학자분계서는 관심을 가져 주시기 당부 드립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친 고 정용선 증조부 명예를 회복시켜 주세요.

지금까지 20 여년째 증손자가 노력하고 있답니다.
제발 귀를 기울려 주셨으면 합니다.남의일로만 생각지 마시고 관심가져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증손자도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가유공자랍니다.

저는 저의 증조부(고 정용선)독립운동에 대한 자료발굴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20여년을 노력해 왔습니다만 아직까지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정호적원부에 수형기록과 사망기록이 있슴에도 판결문을 찿지 못하여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정부의 결단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친은 문맹인으로 살고 계시며 평생 어렵게 할아버지도 일찍 일제핏박과 고문에 돌아 가시고 고아 아닌 고아로 어렵게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신 분이십니다.

이미 저의 증보부자료에 대해서는 국가보훈처에 제출한지 오래이며 민족의 비극인 6.25사변 으로 인하여 경성형무소가 소실되고 지방에 본적지 면사무소가 소실되어 더이상의 자료를 수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번에 각하의 따뜻한 관심이 애타게 조상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후손들에게 큰힘이 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세한 자료는 국가보훈처 자료관리과 또는 선양과에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독립유공자 후손 시혜적 보훈정책 구조적 원인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가난 대물림과 배움기회 박탈, 또 계층 하락은 거꾸로 간 역사의 구조적 잘못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진정한 예우 차원이 아닌 시혜 차원에서 도입된 보훈정책도 가난·무지의 대물림을 고착화 고립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말보다 실천이 우선되어야 하며 힘없고 빽없는 서민과 관련한 독립유공자 발굴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독립운동가의 자손이자 국가유공자로서 일제침략에 항거하며 목숨을 바치며 옥중에서 순국하신 증조부(고 정용선)의 명예를 회복 하고자 20 여년의 세월을 노력하여 온바 있으며 아직까지 그 결과를 얻지 못하여 부득이하게 외교통상부에 글을 드리게 됨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전국은 물론 외무부를 통하여 찿은 자료가 결정적인 자료로서 미흡하여 주일 한국대사관을 통하여 일본 법무성의 자료를 구하고 있으며 일제침략기에 상당한 자료가 일본내 도서관이나 기록보존소에 보관되어 밝혀지고 있는 추세로 "역사바로세우기"관점과 국가와민족을 위해 순국하신 선열들의 명예회복 차원에서 외교관의 명예를 가지고 노력하여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도 한바 있으나 무성으로 일관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내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영원히 암흙속에 가리우게 되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제가 지금까지 노력한 모든 것을 정리하여 보내드리니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당부를 드립니다.자료중에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제정호적사본"과 미국의 '문서보존소 회신문" 도 있으니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몸이 불편한 국가유공상이자입니다. 하지만 제가 증조부의 명예회복을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이것을 찿을 사람이 없는 형편입니다. 이제 제가 조상의 명예를 찿지 않는다면 영원히 땅에 묻힐것입니다.

증보부(정 용선)께서 "경성형무소에서 순국하셨기에 더더욱이 자료가 있을것으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치밀한 계획과 탄압정치사로 볼때에 반드시 조선의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의 자료가 어디엔가 소장되고 있을것으로 사료됩니다.
어느덧 벌서 해방된지 60여년이 넘고 있습니다. 이문제들이 조속히 일본의 협조를 얻어 해결되어야만이 한일관계정상화와 더블어 일본의 국제적인 책임도 반드시 져야 될것으로 생각됩니다.반드시 국가외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받치신 애국선열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 지는데 주일한국대사관이 중요역활을 하여 주시기를 요망합니다.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증조부(정용선)의 호적 주소는
성명:정용선
출생년월일:서기1883년12월17일생(명치16년12월17일생)
본젹지:경북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 391번지
거주지:대정3년 충청북도 청주군 양성면 도원리3통1호
대정4년 경북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7통10호
경북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1062번지
전국을 무대로 독립운동(독립자금 군자금)을 담당 하였다고 함

사망기록:제정호적에 소화3년5월20일 오후3시20분 경성형무소 감방(서기1928년5월20일오후3시20분사망)형무소에소 통지하여 호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꼭 저의 증조부에 대한 기록을 찿을 수 있게 관심을 가져 주시고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이모든것을 정부가 마땅히 해야 옳은것 같은데 가족에게만 자료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생각이 듭니다.그리고 일본인이 작성한 제정호적에 수형기록이나 옥사기록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호적을 검토하여 그에 해당하는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 할것 같습니다. 저는이번에"민족문제연구소"에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꼭 좀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친일문제가 청산되고 역사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현재 그동안 찿은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증손자 국가유공자 정병기

[연합뉴스 2006-08-13 17:14]

"내 증조부는 당당한 독립군이었소"

매년 광복절 때면 독립운동의 발자취와 가슴 아픈 식민 통치의 기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지만 정작 그런 영광과 상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정을 못 받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영광을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해 줘야 할 정부가 팔짱 끼고 있는 사이, 정부 대신 과거의 흔적을 찾아 나선 후손들이 있다.
두 사람을 만났다.
■ 증조부 행적 찾아나선 정병기씨 = 14일 정병기 씨(49)는 100년 전 증조부의 행적을 찾기 위해 충남 청원군으로 갈 채비를 했다.
증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닌 지 벌써 30년째다.
증조부가 활동했다고 알려진 경북 봉화군 모든 면사무소의 기록물 보관소는 이미 수차례 이 잡듯 뒤졌다.
정씨에 따르면 증조부 정용선 선생(1883년생)은 봉화군 일대에서 독립군 군 자금을 모으는 독립활동을 벌이다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정씨는 전국 각지를 돌며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호적과 당시 봉화군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벌인 독립군 명단을 입수했고, 증조부가 생존 당시 소년이었다는 90대 노인의 증언을 녹취하고 친필 증명도 받았다.
하지만 구체적인 죄목이 담긴 수형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보훈 당국은 국가 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정씨는 1989년부터 수형 기록 등을 찾기 위해 법무부, 경찰청, 국사편찬위원회 등을 비롯한 국내 유관 기관에 민원을 제기했다.
그럴 때마다 "해당 자료를 보관하지 않으니 다른 부처에 알아보라"는 답신이 전부였다.
그러던중 정씨는 봉화군청으로부터 `수형인 명부는 형의 실효 등에 관한 법률(1980년 12월 18일 제정, 1984년 7월 30일 개정)에 근거해 폐기(소각)됐다`는 회답을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해 "일제강점기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이 담긴 자료를 어떻게 국가에서 소각할 수 있는가"라며 울분을 토했다.
국내 기관에 자료가 없다고 판단한 정씨는 일본 법무성과 미국 국무부 문서보존소의 문을 두드린다.
5년 여 동안 노력한 끝에 정씨는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손수 수형인 명부가 들어 있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입수하기도 했다.
결국 지난 7월 말 정씨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증조부의 독립활동을 인정받기 위한 민원을 넣었다.
이번에는 인정받을 수 있을까. 정씨는 "내가 이 일에 매달리는 것은 어떤 이익을 바라서가 아니다"며 "정부가 할 일을 제대로 안 하니까 나라도 나서야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박승철 기자 / 김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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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 독립운동 밝히려 30년 `고군분투'

"군자금 모금하다 경성형무소에서 옥사"
보훈처 "객관적 증명자료 없어 서훈 불가"

(서울=연합뉴스) 조성미 기자 = "일제시대 형무소 수형인 기록을 모두 불살라버렸던 정부가 이제 와서 독립운동으로 수감됐다는 걸 증명할 문서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준다고 합니다"
정병기(49)씨는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서대무형무소)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30년 가까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일가친척과 이웃의 증언을 토대로 "증조부 정용선(1883년생) 선생이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께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정씨에 따르면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그의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이 날아왔다.
정씨는 "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증거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수형 사실뿐 아니라 다른 정황도 증조부의 항일 행적을 입증한다고 말한다.
증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일가친척들이 그의 이름을 족보에서 `파내버린' 사실과 그가 실종된 이후 일제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가족들이 나서서 증조모를 개가시킨 사연 등에 비춰 증조부가 독립운동을 한 게 틀림없다는 것.
증조모는 독립투사의 아내였던 것을 감추기 위해 본명인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개명까지 하고 개가했다는 게 정씨의 전언이다.
그러나 일제가 만든 호적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된 것을 제외하면 그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서류는 남아있지 않다.
정씨는 고향 마을을 뒤져 증조부가 생존했을 당시 소년이었다는 90대 노인의 증언을 녹취하는 등 증조부의 항일 흔적을 찾으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판결문 등 구체적 증빙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독립유공 서훈을 끝내 받지 못했다.
그는 "정부가 요구하는 서류를 찾아 고향인 봉화군에 증조부의 수형기록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형의실효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기록을 소각했다'는 어이없는 답변이었다"며 "서류를 태운 정부가 서류를 요구하는 꼴이다"고 비판했다.
그는 국내에서 안되면 외국에서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에 1993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띄워 수형인 명부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지불하고 사오기도 하고 일본 외무성에도 수차례 서신을 띄우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결정적인 사료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정병기씨는 "독립운동가의 자료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것은 정부의 귀책 사유인데 자손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집안이 가난해 문맹으로 살아야했던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대부분의 독립투사 후손이 무지하다는 것을 정부가 악용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다.

증조부 독립운동 밝히려 30년 `고군분투'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1982년 강력범을 검거하다 상해군경이 됐다는 정씨는 "서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을 멈출 수가 없다.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으니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낼 것을 검토 중이다"고 밝혔다.
정씨 주장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객관적인 자료가 검증이 돼야 서훈을 추서할 수 있다. 정부에서도 정씨 증조부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으나 좀처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helloplum@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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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 독립운동 밝히려 30년 `고군분투'> 서울시 중랑구민이 발로 뛰고 있다.

증조부 독립운동 밝히려 30년 `고군분투'
정병기씨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내용이 기록된 일제시대 호적./사회/ 2006.8.13 (서울=연합뉴스)

"군자금 모금하다 경성형무소에서 옥사"
보훈처 "객관적 증명자료 없어 서훈 불가"

(서울=연합뉴스) 조성미 기자 = "일제시대 형무소 수형인 기록을 모두 불살라버렸던 정부가 이제 와서 독립운동으로 수감됐다는 걸 증명할 문서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준다고 합니다"
정병기(49)씨는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서대무형무소)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30년 가까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일가친척과 이웃의 증언을 토대로 "증조부 정용선(1883년생) 선생이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께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정씨에 따르면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그의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이 날아왔다.

정씨는 "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증거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수형 사실뿐 아니라 다른 정황도 증조부의 항일 행적을 입증한다고 말한다.

증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일가친척들이 그의 이름을 족보에서 `파내버린' 사실과 그가 실종된 이후 일제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가족들이 나서서 증조모를 개가시킨 사연 등에 비춰 증조부가 독립운동을 한 게 틀림없다는 것.

증조모는 독립투사의 아내였던 것을 감추기 위해 본명인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개명까지 하고 개가했다는 게 정씨의 전언이다.

그러나 일제가 만든 호적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된 것을 제외하면 그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서류는 남아있지 않다.

정씨는 고향 마을을 뒤져 증조부가 생존했을 당시 소년이었다는 90대 노인의 증언을 녹취하는 등 증조부의 항일 흔적을 찾으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판결문 등 구체적 증빙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독립유공 서훈을 끝내 받지 못했다.

그는 "정부가 요구하는 서류를 찾아 고향인 봉화군에 증조부의 수형기록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형의실효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기록을 소각했다'는 어이없는 답변이었다"며 "서류를 태운 정부가 서류를 요구하는 꼴이다"고 비판했다.

그는 국내에서 안되면 외국에서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에 1993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띄워 수형인 명부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지불하고 사오기도 하고 일본 외무성에도 수차례 서신을 띄우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결정적인 사료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정병기씨는 "독립운동가의 자료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것은 정부의 귀책 사유인데 자손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집안이 가난해 문맹으로 살아야했던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대부분의 독립투사 후손이 무지하다는 것을 정부가 악용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다.

경찰로 근무하던 1982년 강력범을 검거하다 상이군경이 됐다는 정씨는 "서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을 멈출 수가 없다.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으니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낼 것을 검토 중이다"고 밝혔다.

정씨 주장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객관적인 자료가 검증이 돼야 서훈을 추서할 수 있다. 정부에서도 정씨 증조부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으나 좀처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helloplum@yna.co.kr
(끝)
8·15 광복절을 맞으며

광복절 특집
“아직도 미 발굴 독립유공자 자손들이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돼”

광복 61주년을 맞았지만 문제는 많이 남아있다.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친일문제가 얼마나 청산됐으며 과거사는 제대로 정리됐는가. 대충 덮어놓고 잘해보자는 식의 과거사 정리는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무슨 다른 의미가 있겠는가?
광복절은 우리나라의 4대 국경일 중 하나로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으로부터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것을 기념한다. 매년 8월 15일만은 대대적인 행사로 요란하다. 각 관련 단체들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난리법석이다. 하지만 이날 민족 암흑기에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지만 국가에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미발굴 독립운동유공자 가족들은 가슴을 치고 한탄하며 눈물 흘린다.

독립운동가 자손들의 상당수가 배움의 길에서 멀어진지 오래고 가난 때문에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야하는 형편이다. 일제하에서는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란 이유로 감시와 멸시 그리고 온갖 천대를 받으며 살아야 했는데 지금도 힘겹게 사는 자손이 많다. 이렇다 보니 조상이나 선조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여유가 없다. 몇몇 자손들이 조상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거증자료를 찾아 동분서주 하지만 관련 자료는 누군가에 의해 없어지거나 6·25 전쟁 중에 사라진 경우가 많다. 자손들이 자력으로 찾을 수 있는 자료는 그저 전해오는 말이거나 제정 호적에 형무소 수형기록이 있는 것이 전부인데 해당부처인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임을 인정받아 명예회복을 하고자하는 후손들에게 상세한 거증자료를 요구하고 있다.

매년 8·15 광복절이면 세상은 시끌벅적하다. 독립유공자를 발굴하고 있다는 기사도 신문을 통해 알려진다. 그러나 실속 없는 겉치레에 불과하다. 오늘도 많은 미발굴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한숨을 내쉬며 한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 일부는 조상을 원망한다. 조상이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것이 결국 자신들을 가난과 어려움에 시달리게 했기 때문이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에 대한 예우를 국가가 마땅히 나서 해야 함에도 오늘날 현실은 그렇지 않다. 광복절 행사에서 애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위해 묵념하는 게 그들을 위한 전부가 아니다. 이런 행사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에 영혼을 편히 쉬게 할 수 있는지 반문하고 싶다. 그리고 시신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영혼들이 눈도 못 감고 구천을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8·15 광복절이 진정한 민족의 광복절이 되기 위해서는 친일역사 청산과 독립유공자의 발굴이 시급하다. 더불어 해외의 관련 자료 수집을 위한 노력도 절실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독립운동가 명예회복과 자손들에 대한 관심이 급선무다. 이제는 정부가 앞장서서 정부관계부처간의 유기적인 자료발굴을 진행해야 한다. 61년이 흐른 지금까지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미발굴 독립운동가의 명예가 회복되길 바란다. 아울러 광복절의 참뜻을 되새길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정병기(한국방송대학 행정 4)

서울신문 2006년8월14일 (연합뉴스 제공)

“정부서 관련자료 불 태우고 입증하라니요”
증조부 독립운동 밝히려 30년 고군분투 정병기씨

“정부가 증조할아버지의 서류를 모두 소각했는데, 이제와서 서류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준다고 합니다.”
정병기(49)씨는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서대무형무소)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30년 가까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일가친척과 이웃의 증언을 토대로 “증조부 정용선(1883년생)선생이 1900년대 초부터 1916년 즈음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정씨에 따르면 증조부는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췄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이 날아왔다.

정씨는 “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증거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정부가 요구하는 서류를 찾아 고향인 봉화군에 증조부의 수형기록을 요청했지만,‘형의실효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기록을 소각했다.’는 어이없는 답변만 돌아왔다.”면서 “서류를 태운 정부가 서류를 요구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정씨는 “독립운동가의 자료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것은 정부의 귀책 사유인데 자손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집안이 가난해 문맹으로 살아야했던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대부분의 독립투사 후손이 무지하다는 것을 정부가 악용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다.

정씨 주장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객관적인 자료가 검증이 돼야 서훈을 추서할 수 있다. 정부에서도 정씨 증조부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으나 좀처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제공
작성일:2006-12-31 07:12:53 121.130.6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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