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호(작가)
‘아하’ 다르고 ‘어허’ 다르다는 말이 있다. 비록 아무 생각없이 쉽게 튀어나온 말이라 해도 상대에 따라서는 그 말을 듣고 받아들이는 느낌과 감정, 그리고 정도가 그만큼 달라질 수도 있으니 말을 할 때는 신중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가려서 하라는 뜻임이 분명하다.

몇 해 전, 고향 친구의 모친이 노환으로 별세하셨다는 우울한 소식을 듣고 서둘러 문상을 간 적이 있었다. 지방에 위치한 허름한 병원의 영안실이었다.

그 친구는 나의 고향집과 가까운 이웃에 살았으며 나이도 동갑이어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까지 무려 12년 동안이나 같은 학교를 마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절친하게 지낸 죽마고우였다.

상주인 친구는 바쁜 중에도 몹시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조용한 곳으로 안내하여 자리를 함께 하더니 몹시 못마땅하고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문상객들이 조문을 와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왜 하나같이 그 모양들인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고작 그런 말을 전해 주고 갈 생각이었다면 차라리 문상을 오지 않는 게 내겐 훨씬 더 좋았을텐데…….”

밑도 끝도 없는 친구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내가 의아해진 얼굴로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자 친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어머니 연세가 올해 아흔 하나가 되셨잖아. 그런데 문상을 오는 사람들마다 으레 어머니의 연세를 묻지 않겠어?
“……?”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그 친구가 서운해 하는 뜻을 얼른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자, 친구의 설명은 다시 이어졌다.

“글쎄, 어머니 연세가 얼마라고 대답해 주면, 그때마다 하나같이 답변이 그만하면 돌아가실 때도 됐다는 거야. 나 원 기가 막혀서…….”

나는 그제야 겨우 친구의 말뜻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친구의 설명을 듣고 보니 정말 친구의 기분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았다.

연세가 그만하니 ‘이제 그만하면 돌아가실 때도 됐구먼’ 이라든지, ‘정말 호상이로군’ 이라든지, ‘사실만큼 사셨구먼’ 이라고 말하는 문상객들에게 과연 상주로서는 뭐라고 응답을 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 문상객들의 말은 이제 연세가 그만하면 살만큼 사셨으니 조금도 서운해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닌가! 상주로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네 그렇지요’ 라고 대답해야 옳은 것인지, 아니면 ‘더 오래 사실 수도 있는 분이었는데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느냐’ 며 그 자리에서 서운한 감정을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내 보여야 옳은 것인지 몹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날의 경험을 통해 나는 새삼 값진 교훈을 얻게 되었다. 앞으로 아무리 높은 연세로 돌아가신 분이라 해도 조문을 할 때는 ‘돌아가실 연세가 되셨군.’이라는 말 대신 ‘오래오래 더 생존하셨더라면 이토록 서운하지는 않으셨을 텐데……’라는 말을 해 주어야 하겠다는 값진 교훈을…….

그런데 요즈음 내가 혼자 그동안 생각해 왔던 그 값진 교훈이라는 것도 결코 옳은 생각이거나 정확한 판단이 아니었음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며칠 전, 잘 알고 지내는 사람과 오랜만의 술자리에서 문상객들로부터 섭섭해 하더라는 그때 그 친구의 이야기가 다시 화제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 역시 내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난 다음에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반응은 뜻밖에도 그게 아니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다 인정할 정도로 어머니가 생존해 계실 때에 모자지간의 정이 각별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 역시 몇 해 전에 어머니가 운명을 하셨는데 그때의 연세가 94세였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잃은 그때의 슬픔은 차마 말로 다 표현할 길이 없었는데 워낙에 연세가 높으셔서 그 당시에도 조문객들 대부분이 ‘사실만큼 오래 사셨군’ ‘정말 호상이로군!……‘ 등의 말로 조문을 대신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런 조문을 받을 때마다 상주인 자신도 얼마나 서운하고 야속했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들이 그런 서운한 말로 조문을 해오지 않았다면 그날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어떻게 이겨냈을지 모를 일이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슬픔에 젖어 있는 상주에게 조문객들까지 그날 상주와 똑같은 슬픈 심정으로 조문을 했다면 상주인 그로서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한층 더 커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날의 슬픔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전혀 뜻밖의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상주의 슬픔을 잠시라도 덜어주기 위해 조문객들이 의도적으로 그런 말로 조문을 해준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아하’ 다르고 ‘어허’ 다르듯, 상대방에게 주는 말도 신중히 잘 골라서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자세 역시 신중하게 잘 새겨서 들어야 하겠다는 것을…….

그렇다. 이제야 뒤늦게 조금이나마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이 세상에는 그야말로 성격도 경험도, 그리고 느낌도 다른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밤하늘에 둥실 떠오른 보름달을 보는 느낌도 환경과 분위기에 따라 다를 것이다.

똑같은 보름달을 보고도 몹시 즐거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슬픔에 젖어 혼자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이 세상에는 같이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죽을 때까지 배워도 못다 배우고 끝내는 것이 배움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하! 난 나이만 많이 먹었을 뿐,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수양을 쌓고 더 배우려면 아직도 배움의 길은 까맣게 멀기만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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