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색들만 모았기 때문이고 무지개는 희망, 꿈으로 여겨 경외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화려한 무지개색보다는 단색을 좋아한다.-여기서 단색이라 함은 검정이나 흰색을 말한다-무지개색 중 빛의 삼원색인 빨강, 초록, 파랑이 합치면 일상의 빛이 되고 색의 삼원색인 빨강, 노랑, 파랑이 모이면 모든 것을 감추는 검정색이 되듯이 아버지 삶의 색도 그런 것 같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곳곳하고 특별한 존재로 여겼고, 그것을 근엄함으로 당연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나 흰색이나 검정, 혹은 가족이 정한 색으로 판단하고 융통성이 없거나 고집스런 사람으로 색칠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란 그저 어려운 존재로 무섭게 여기고, 그렇게 살아왔기에 ‘아버지는 아버지 일뿐’이라는 결론으로 남기며, 그 마지막 존재는 아랫목을 차지하는 영감으로 불러 왔다. 그렇게 아버지는 스스로 색칠을 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지니고 있는 색들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기에 아버지를 그저 하나의 색으로 판단하여 당연시 여긴 자식들의 결과물이다. 나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나의 눈도 그랬다. 아니 우리 가족의 눈들도 그랬다.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빛과 색을 품고 항상 나타내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나도 세 아이의 아버지가 아닌가.

우리 아이들의 눈에도 내가 아버지를 바라보던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몇 번이나 되새겨 보았다. 마침 그 되새김은 말문을 트게 하였고, 그 말문은 프리즘으로 반사되기 시작하였다.

다섯 해전 비슷한 생각을 가진 몇몇이 시작한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은 아버지의 여러 색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색연필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우선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렸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덕목은 무엇인가 질문지 위에 동그라미도 쳤다. 쑥스러운 점수에 머리도 긁적였다. 서로의 뜻을 모아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 후 5년간 우리는 네 가지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 겨울의 정월대보름가족한마당, 봄의 들꽃기행, 여름의 가족캠프, 가을의 문화나들이가 우리 아버지들이 그린 그림이다. 나 역시 유치원에 다니던 셋째아이의 손을 잡고 나만의 색을 만들어 보고자 색연필을 마련한 것이다. 이미 성장해버린 첫째와 둘째 아이에게 색칠을 못한 것을 셋째에게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보시의 마음도 앞섰다.

다섯 해가 지난 지금 과연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얼마나 색칠을 하였는가. 아직도 제자리다. 하지만 지금도 다섯 가지 색연필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세 아이 모두는 아니지만 단 한 아이에게라도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아침밥을 함께 먹자는 노란색, 하루에 5분 이상 이야기하자는 초록색, 한달에 한번은 밖으로 나가자는 파란색, 일주일에 한번은 약수터를 가자는 빨간색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술과 담배를 반으로 줄이자는 주홍을 가끔은 꺼내어 내 몸에 칠하는 연습을 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는 아이와 같다고 말하며, 눈을 흘기며 핀잔도 준다. 40을 넘고도 50이 가까운 나이인데도 그 말이 싫지가 않다. 그때마다 숨겨두었던 검정색 색연필을 꺼내 아내의 이마에 ‘난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야. 좋은 아버지가 되면 자연 좋은 남편이 되는 거잖아’라고 적어주며 살며시 웃으면 아내도 같이 웃는다.

지금 내 주머니 속에 넣어 둔 다섯 가지 색연필은 하도 만지작거려 꼬질꼬질 할 뿐 제대로 색칠을 못하고 있다. 가끔 색연필을 바꾸어 넣을 뿐. 그리곤 가끔은 아내의 손에 강제로 쥐어 줄 뿐. 오늘도 거짓말을 한다. ‘아이들아, 오늘은 색칠을 하마’ 하고 검정색 색연필을 꺼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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