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수(편집위원)
40대 초반 K씨는 중기업의 부장이다.

4년 전에 몰아친 기업 구조조정에서 그나마 생존한 것에 감사하며, 회사에 충성을 다하는 그저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1991년에 결혼하고 4년 전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 어렵사리 장만한 32평 아파트에 살았으나 날로 조여 오는 주택부금에 휘둘리다 못해 인창지구로 2년 전에 이사와 구리사람이 된 K씨.

지난여름에는 초등학교 5학년 큰 아이가 보채도 바닷가 한번 가보지 못했다.

이유인즉슨 학구조정으로 심란해 하는 아내의 뜻에 따른 것이다. 있는 자의 논리로 해석된 듯한 느낌을 받는 아이들의 권리와 학부모의 권리마저 무참히 짓밟은 교육청의 모습에서 받은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병상련을 하고 있는 학부모들과 교육청으로 학교로 뛰어다니더니 얻어낸 결과를 너무나 좋아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성취의 고귀함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즈음 K씨는 마음이 착잡하다. 월급을 담보로 차용하여 납품회사의 주식을 매입할 수밖에 없는 회사의 방침. 불과 3개월 만에 주식은 나락을 향해 떨어지고 기름값 인상에 은근슬쩍 천정부지로 솟아오르는 생필품값. 가계에 도움을 주기 위해 5년간 정들었던 애마 1천800cc 승용차마저 처분하여 요즈음은 버스로 출퇴근을 한다.

엊그제는 겨울을 재촉하는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버스를 탔다. 오히려 편안하다는 느낌을 갖는 K씨. 비어 있는 좌석에 몸을 기대면 더욱 행복해지는 K씨. 교통 혼잡에 1시간 이상 핸들을 잡고 시계를 습관적으로 쳐다보던, 라디오를 통해 나오는 아침방송의 노랫소리보다는 가끔 기사가 틀어주는 대중가요가 친근하기 만하다.

이리저리 피하며 조간신문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지하철에 몸을 실으면 K씨는 습관적으로 노선표를 본다. 혹시 출장 갈 때 환승역을 알아두면 무척 도움이 되고 호선별로 외우면, 부하직원들에게 가볍게 찾아가는 방법도 일러줄 수 있어 일석이조다.

2개의 실·과가 하나로 뭉쳐진 사무실, 처음에는 서로가 업무 적응이 힘들어 3개월 이상을 고민에 빠졌고 부하직원과 잦은 술자리로 아내와 아이들에게 핀잔을 받았던 그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점심시간, 그 유행하던 IMF형 싸구려식당도 사라지고, 점심 한 끼 먹으려면 10분 이상을 고민한다. 부하직원들은 물론 자신까지도 회사 근처 식당을 헌팅 하는 것이 습관적이다.

오후 4시께 거래처를 가기 위해 지하철에 오른 K씨. 5분이 멀다하고 나타나는 행상.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로 인해 직접 상품을 들고 나왔다는 50대의 신사. 중고등학교 당시 버스에서 재미있게 보고 흉내를 냈던 고무장갑장수, 단돈 천 원에 파는 겨울용장갑장수, 1만 원짜리 올드팝송시리즈를 파는 사람, 실타래를 1천 원에 파는 중년 여성, 1회용 반창고를 들고 나온 장애자, 하모니카로 찬송가를 연주하는 맹인 등 오늘은 유난히 많아 마치 시골장터에 나온 기분이다.

몇 달 전보다 늘어나는 행상들 왠지 씁쓰름하다.

이는 우리가 사는 현실이 아닌가. 호구지책, 한 끼라도 거르지 않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매주 두 장씩 사는 복권 오늘도 대여섯 명이 번호를 고르고 K씨 또한 그들 속에 묻힌다.

들고 나온 우산이 부담스럽다. 신호등은 켜졌는데 차선과 횡단보도가 없는 도로, 어제까지 멀쩡하던 도로가 웬일일까.

곡예 하듯 찾아간 거래처.

10살은 아래로 보이는 대리에게 굽실대며, 제품설명을 하고 화장실에 갔으나 소변은 찔끔거리고 머리는 무겁다. 이때 걸려온 휴대전화, 시골의 아버님이 종합토지세를 아직 못 냈으니 보내 달란다. 늦은 시간 잔무를 처리하고 돌아오는 길 습관처럼 눈을 감고 어둠 속으로 빨려간다.

오늘은 유난히 배가 더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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