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 왕방연의 사연이 담긴 충심(衷心)의 배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에 설치한 남양주먹골배 상징 구조물.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아 있다/저 물도 내 안 같아여 울어 밤길 예놋다”

조선초 어린 조카 단종을 내 쫓고 왕위를 차지한 수양대군 세조. 피로 세운 임금의 추상같은 명을 받아 폐위 된 단종의 마지막길인 영월 청령포까지 운송하고 돌아 온 왕방연(王邦衍) 이 눈물을 흘리며 쓴 ‘고운님 여의업고’라는 제하의 시조이다.

어찌 할 수 없는 현실과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담긴 이 노래의 배경은 우리나라 최고의 현군인 세종이 승하(昇遐)하고 문종이 즉위했으나 병약했던 그는 재위 2년 만에 죽었고, 1452년 12살의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조선 6대 임금인 단종이다.

문종은 황보인, 김종서 등 근신(近臣)에게 어린 왕을 부탁했고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도 좌우에서 힘을 모아 도와주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지만 1455년 황실의 최대 비극인 숙부인 수양대군은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상왕으로 앉히는 사건이 벌어진다.

마침내 수양대군, 한명회, 권람 등의 강요에 의해 자리를 내놓고, 이듬해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했던 사육신을 비롯한 가신들이 처형을 당하고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 청룡포로 왕방연과 유배의 길을 떠난다.

1957년 금성대군의 복위운동 등으로 17살의 단종은 서인으로 내려 안고 그해 10월 왕방연은 단종에게 사약이 내려졌는데 이때 그는 사약을 가져간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그가 “사약을 차마 단종에게 내밀지 못하고 괴로워 할 때 단종을 보필하던 관원이 활시위에 의해 목이 졸려 명을 달리했다.”고 숙종실록에 전한다.

단종을 영월로 유배한 후 그 심정을 노래한 시조가 바로 창구영언에 남아있는 “고운님 여의옵고”다. 그 뒤 김지남(金止男)이 금강에 이르러 여자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는 “千里遠遠道 (천리원원도)/美人別離秋 (미인별리추)/此心未所着 (차심미소착)/下馬臨川流 (하마임천류)/川流亦如我 (천류역여아)/鳴咽去不休 (명인거불휴)”라 한문으로 역했다.

단종이 머무른 청령포는 홍수가 나면 물이 넘치는 육지 속의 섬으로 지금도 노산대, 망향탑, 관음송 등 당시 단종의 슬픔을 간직한 채 있으며, 그 입구에 왕방연의 시조비가 있다. 

세조의 엄명으로 어린 왕의 유배길을 동행하고, 죽음을 보았던 왕방연. 야사에 의하면 그는 도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봉화산아래 자리를 잡고, 자신을 원망하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필묵과 벗하며 배나무를 키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단종의 기일이면 자신이 가꾼 배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 영월을 향해 절을 했다 전한다. 

이후 배나무는 사방으로 번식하여 당시 묵골(지금의 중랑구 묵동)의 “묵골배”가 “먹골배”로 부르게 됐으며 봉화산,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일대로 전파되어 오늘에 이른다.

묵동은 1912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구지면(지금의 구리시)과 망우리면이 합쳐진 구리면에 속하고 1963년 박정희대통령의 행정구역재편으로 옛 망우리면은 서울로 귀속되면서 도심화로 묵동의 먹골배는 구리시와 남양주시의 명물로 남게 된다.

우리나라 배의 재배역사는 삼한시대와 신라의 문헌의 기록과 고려시대에는 배 재배를 장려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역사는 매우 길다. 1611년 허균이 지은 “도문대작(屠門大嚼)”에 5품종, 19세기 춘향가 완판본에 ‘청실배(靑實梨)’라는 이름이 나오며, 1920년대 조사에 의하면 33종의 재래종과 학명이 밝혀지지 않은 26개의 종이 있었음이 나타난다.

당시 "우수한 풍종으로는 황실배, 청실배, 함흥배, 청당로배, 봉의면배, 운두면배, 합실배 등으로 이 중 '청실배'는 경기도 구리면 묵동리에서 재배 되었으며 왕실에 진상했다."고 한다. 왕실에 오르면 청실배, 백성이 먹으면 먹골배라 부른것이다.

왕방연과 단종의 애틋한 사연, 그리고 긴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고장의 먹골배가 21세기에 들어 와서는 '하늘이 내린 배꽃의 금과실'이란 뜻으로 '천이화금과(天梨花金果)'라는 금배로 재탄생되었다니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어린왕의 죽음을 목전에서 보고 한을 탄하며 재배했던 충신(忠臣)의 배가 21세기 남양주시의 충과(忠果)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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