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수필문학의 산실 "박문(博文)" 창간

사자후-⑦ 우리나라 최초 수필 월간지를 창간한-아동문학가 영주 최신복

-'오빠생각'의 순애와 '꼬부랑할머니' 영애는 친여동생, 이원수가 매부
-방정환의 그림자...3대가 소파묘아래 누워
-동요 '호드기', 동화 '석류나무', '조선 제일 큰 강' 등 남겨

아동문학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수필월간지를 만든 영주 최복신

영원한 어린이의 친구 소파 방정환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영주 최신복. 그의 무덤은 소파의 묘 바로 아래 자리를 잡고 있다. 방정환 묘소를 찾을 때 마다 만난 낮은 사각의 묘비. 수원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망자의 이름아래 옮겨 놓은 '호드기'라는 동시를 대하는 듯 마는 듯 무심히 지나다 구리문예대학 야외수업에 동참을 하면서 우연히 발견한 작은 글씨로 새긴 영주(泳柱). 아차 싶어 그의 일생을 살폈다.

그가 방정환의 그림자 같은 사람이었고, 동요, 동시, 동화를 쓴 아동문학가로 수필문학 월간지를 처음으로 발간하여 수필이 우리 문학의 한 장르로 안착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주 최신복(崔信福)과의 사자후(死子逅)를 시작한다. 여기서 '사자후(死子逅)'란 '죽은 이와 우연히 만나다 또는 죽은 이와 만나 허물없이 지내다'라는 의미다. 최복신에 대한 기록이 그다지 많지 않아 이곳저곳에 그의 발자취를 좇은 글들을 찾아 정리한다.(글쓴이 주)

-망우리는 산자와 죽은 자의 인연이 함께 해

망우리고개는 구리시와 서울시를 구분하는 경계이자 수도권의 관문이다. 이 고개는 태조이성계의 능자리와 관련이 깊다. 이성계가 개국공신 남재(南在), 조말생(趙末生)과 함께 능터를 구하러 다니다가 지금의 건원릉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남재가 자신의 묏자리로 이미 얻어놓은 자리였다. 이성계는 그곳이 명당임을 알고 있었던 이성계는 남재에게 불망기라는 증표를 써주므로 차지한다. 궁으로 돌아가는 길, 이곳에 이르러 "이제야! 근심을 잊었노라!" 해서 '망우(忘憂)'라 불러 오늘에 이른다.

그래서 사람이 넘나드는 고개도 고개려니와 죽은 자가 사후의 세계로 가는 길목이기에 크고 작은 무덤이 25,000여기에 달한다. 이들 무덤 중 우리나라 근현대사 주역 20여분이 만년유택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망우리사색공원으로 부른다.

이 공원 인근에는 한용운, 방정환, 김상용, 박인환과 이곳에서 머물다 얼마 전 용인으로 옮긴 김영랑 등 시인. 최서해, 계용묵, 김말봉, 김이석 등 소설가는 물론 화가 이중섭, 작곡가 채동선 등등 예술인들이 모인 사색의 공간이다. 방정환의 집 바로 아래 3칸의 집을 지은 최신복 그를 아동문학가로 예술인 반열에 올려본다. 그의 묘지번호는 '109956'이다.

“누구가 부는지 꺽지를 말아요
마디가 구슬픈 호드기오니
호드기 소리를 들을 적마다
내 엄마 생각에 더 섧습니다.”
-최신복의 ‘호드기’ 전문-’

-최신복 누구인가?

최복신의 묘비 앞면. 그의 대표작 '호드기'가 새겨져있다.
최신복은 1905년 3월 13일 수원(水原)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최경우로 기독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친은 물론 가족전체가 방정환의 정신을 따랐다한다. 본관은 충주, 호는 영주(泳柱)이다. 배재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였다. 귀국 후 수원에서 화성 소년회를 조직하여 어린이 문화 운동과 천도교청년동맹, 신간회 등에 참여하였다. 잡지 "학생, 어린이" 등에 세계 명작 동화를 번역 연재하다가 소파가 죽자 자신이 운영하던 박문서관에서 "소파전집" 편찬하는데 앞장을 섰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수필문학지인 "박문"을 발간하여 수필이 문학의 장르로 안착하는데 큰공헌을 했다.윤석중 등과 함께 색동회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1월 12일 불혹을 두 달 앞두고 지병인 인후암으로 죽어 이곳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영주 충주 최신복, 연안 차원순 지묘"와 동요 호드기가 앞면에, 뒷면에는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신 선생은 화성소년회를 조직하여 소년운동에 힘쓰시고, 소파 방정환 선생을 도와 ‘어린이’ ‘학생’ ‘소년’ 등의 잡지 편집에 종사하는 한편, 어린이를 위한 많은 글을 쓰시어 아동문학에 기여하시었다.’ 라고 써있다.

신복과 순애, 영애 다정한 오누이

1926년 4월 어린이 잡지에 입선한 서덕출, 윤석중, 박순애, 이원수. 박순애는 박신복의 9살 손아래 누이다.
최신복에게는 9살 아래 순애와 11살 아래 영애 여동생이 있는데, 이들 삼남매는 1920~30년대 우리 동요와 동시를 짓고 발표하는데 앞장을 섰다. 이들 3남매는 기독교 집안으로 개방된 교육관과 방정환이 발간한 "어린이"이 잡지를 읽으면서 작가의 꿈을 일구었다.

어린 신복은 소파 방정환의 열렬한 숭배자로 수원에서 화성 소년회를 이끌며 해마다 방정환을 초대하여 동화구연회를 여는 등 소년운동에 앞장을 섰으며, “동화회에서 방정환 얘기를 듣고 순사도 울었다는 그 유명한 일화도 화성소년회에서 행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다”라고 “어린이(1931. 8)”의 ‘순검과 소파’라는 글로 소회했다. 이렇듯 수원의 최신복 가족은 방정환의 영향 아래 있었다.

최순애는 1914년에 태어났다. 12살 되던 해인 1925년 11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읊조리고 노래하는 ‘오빠 생각’이 방정환의 “어린이” 에 실린다. 이듬해 4월 16세의 소년으로 불후의 명작 ‘고향의 봄’ 쓴 이원수도 입선하므로 수원과 마산을 오가는 편지 속에 숙명적인 만남이 지속되다 결국 10년 뒤인 1936년 6월 둘은 부부가 된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때
우리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귓들 귓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최순애의 ‘오빠생각’ 전문. 1925년 11월. “어린이”-

동생 최영애도 10살의 어린 나이에 “어린이”에 동요 ‘꼬부랑 할머니’가 입선되었으니 참으로 영특하고 참으로 정겨운 오누이들이다.

“꼬부랑 깡깡이 할머니는
집행이 집고서 어데 가나
꼬부랑 고개를 넘어가서
솔방울 줏으러 가신단다.

꼬부랑 깡깡이 할머니는
저녁에 어데서 혼자 오나
꼬부랑 고개를 넘어가서
솔방울 이고서 오신단다.
-최영애의 ‘꼬부랑 할머니’ 전문. 1925년 4월. “어린이”-

-방정환과 최신복이 아닌 최영주와 인연설.

소파 방전환과 개벽사 건물(위)와 그와 함께 활동했던 윤석중, 최신복, 이정호.

최신복은 배재학교를 거쳐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수원에서 화성소년회를 이끌면서 소파와 인연을 맺었다. 소파 사후 ‘어린이’에 실린 최신복의 추모 글은 소파가 화성소년회의 초청으로 내려와 강연할 때 입회 순사가 소파의 강연에 감동해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소파를 ‘선생’으로 모시게 된 것이 그 둘의 첫 인연의 끈을 잡는다.

최영주가 ‘동아일보’ 수원지국 기자로 일하던 중 방정환의 부름을 받고 1929년 개벽사에 들어가 세계명작을 번역하는 작업과 편집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1931년 방정환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어린이” 잡지 편집에 윤석중, 이정호 등과 편집장을 맡아 관여한다. 방정환이 특별히 최영주를 부른 것은 그가 편집의 귀재였기 때문이라고 아동문학가 마해송 선생은 자신의 글을 통해 하고 술회하고 있다.

최영주는 방정환의 무덤을 만들고 묘비를 세운 일로도 유명하다. 방정환이 세상을 뜨고 5년이 지난 1936년까지 없이 유골은 홍제원 화장장 납골당에 있었다. 이를 가슴 아프게 여긴 최영주는 윤석중, 정순철, 마해송, 이정호 등과 뜻을 모아 "월간 중앙"에 '소파 묘비 건립 모금 광고'를 내고 여러 사람들의 뜻을 모아 망우리 아차산에 묘도 만들고 묘비도 세웠다. 서예가 오세창이 앞면에 ‘동심여선(童心如仙)' '어린이의 벗' 소파 방정환의 묘(小波方定煥之墓)’ 뒷면에 '동무들이'라 묘비명을 적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1937년 명을 달리하자 수원의 선산 대신에 소파 묘 아래쪽에 아버지 산소도 마련했다. 방정환을 평소 존경하던 아버지였기에 그리하였고, 또 자신도 소파 묘를 자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뒤 갓 나서 죽은 자신의 아들도 이곳에 묻었고, 1945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인후암으로 세상을 떠난 자신도 방정환 바로 앞에 묻혔으니 3대에 걸친 소파에 대한 사랑과 인연의 끈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소파의 10주기를 기하여 1941년 5월1일에는 자신이 운영하는 박문서관에서 마해송과 함께 편집한 “소파전집”을 500부 한정판으로 발행하기도 했다.

‘어린이’ 10주년 회고에서 최신복은 소파를 그리며 이렇게 썼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무척 가슴을 괴롭게까지 하며 생각키우는 이가 있습니다. ‘어린이’를 탄생시킨 산파였고 길러준 어머니였고 또 ‘어린이’ 대장이던 소파 방정환 선생의 생각입니다. 한 몸의 괴로움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오직 뜨거운 열성과 끈기를 가지고 반석처럼 움직이지 않고 ‘어린이’의 성장에 힘을 써주시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수필 월간지 '박문(博文)' 출간

최영주가 발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수필전문지 박문.
최영주의 업적 중 가장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바로 "박문(博文)"이라는 월간지이다. 박문은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월간 잡지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근대수필의 기조를 살펴보면 기행적인 수필로 출발, 수상적 수필과 병행, 1930년대에 이르러 산문문학의 한 장르로서 기행수필과 생활이나 내적 세계의 성찰을 주로 하는 수상수필의 두 경향이 1920년대에 병행하다가 1930년대에 문학적인 수필이 발표되고, 수필전문지인 "박문"이 나오면서 수필이 정립되는 성숙기에 접어들어 오늘에 이른다.

1930년대에 이르러 수필이 본격적인 문학 장르로 확립되면서 이양하 등 전문 수필가들이 탄생하자, 1938년 10월 1일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수필 월간지로 경성 박문서관  발행했으며, 편집 겸 발행인 최영주(崔泳柱)로 국판(A5) 32면~50면 내외로 발간되었다. 모양은 빈약했으나 1941년 1월 1일 통권 23호로 종간되기 까지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들의 글마당이 되었다.

최영주는 발간사에 “박문(博文)은 조고만 잡지이나, 이 잡지는 박문서관 기관지인 동시에 각계 인사의 수필지로서 탄생된 것이다. 이 잡지의 사명이 점점 커지는 때에는 이 잡지 자신도 점점 자라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조고만 책이 점점 자라나서 반도(半島) 출판계에 큰 자리를 차지할 때가 속히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이 지면을 광채 있게 꾸며갈 것을 여러분께 약속합니다.”라고 썼듯이 상업지면서도 수필지였다.

창간호에 목차는 다음과 같다.

ㆍ 작품애 / 이태준
ㆍ 독서 / 김남천
ㆍ 청추수제 / 이희승
ㆍ 어문정리와 출판업 / 이극노
ㆍ 정치와 조선문학 / 김문집
ㆍ 살인서비화 / 김진섭
ㆍ 의문의 인과칙 / 심형필
ㆍ 약간 어제에 대하여 / 이승기
ㆍ 조선어사전의 연대기 / 방종현
ㆍ 하멜표류기에 대하여 / 이병도
ㆍ 거리의 수첩
ㆍ 영화가
ㆍ 극장통
ㆍ 출판토픽
ㆍ 청색포스트
ㆍ 박문발간사
ㆍ 편집실/일기초
ㆍ 출판부통신

-한국수필의 산실 최영주의 "박문"에 참여한 문예가들

"박문" 10집.
창간호는 물론 이후 집필진은 문인은 물론 화가ㆍ음악가ㆍ종교가ㆍ학자ㆍ의사 등 인사들의 다양한 글을 실었으며, 자기 출판 광고가 특징적이다.

문장가와 작품을 살펴보면 김남천의 '무전여행', 김환태의 '개미', 송영의 '아동', 김관의 '겨울의 하르빈', 김태호의 '설월', 이인영의 '고서이야기'가 제2․3집 합본에 실렸다.

김창제의 '교육', 김시창의 '북경왕래', 최영수의 '기차', 김남천의 '살인작가', 김덕봉의 '산채와 독초', 채만식의 '지충', 정인택의 '공수방관기' 김상기의 '서가만필', 이이영이 '한화'. 박종화의 '도향의 어머니', 김문집의 '하멜표류기를 읽고' 가 제10집에, 조용만의 '대전과 영국문화', 이이녕의 '조선고서이야기', 박태원의 '신변잡기', 정인택의 '유미에론', 임동혁의 '우견우감', 김소월의 '진달래꽃', 이기영의 '전선기행'. 박종화의 '전선전경', 백철의 '시대적사상의 고백'이 제13집에, 이극노의 '미덕', 김송의 '금반지', 배호의 '유리병', 채만식의 '풍소2제', 박영희 '전선기행', 김동인의 '잔촉변' 등이 제15집에, 최정희의 '춘소'는 제17호에 게재하었고, 김동석의 '녹음송'이 제20집, 조윤제의 '조선문학의 고전' 이제20ㆍ21집, 이병도의 '삼국사기해설'이 제22ㆍ23집에 논문으로 실렸다.

이 밖에도 홍명희ㆍ김기진ㆍ유치진ㆍ이광수ㆍ임화ㆍ최재서ㆍ홍난파ㆍ마해송ㆍ유진오ㆍ조풍연 등 문예계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대부분 망라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최신복의 묘비 뒷면.
-글을 마치며

최영주의 아동문학에 대한 작품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아 그의 문학적 가치를 논하기는 힘들지만 지속적으로 그의 일생과 작품세계를 찾는 작업을 게을리 않을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최영주 역시 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명단에 언론출판분야에 덩그러니 올라가 있다는 것이다. 그가 친일행각을 하였든 그렇지 않았든지 '박문'이라는 문예지는 우리나라 수필문학이 씨앗을 뿌리는데 큰 몫을 치지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차산 망우산에는 근대를 대표하는 문예인들이 함께 누워 후배문인들의 성장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묘를 찾아 사자후를 한다는 일은 실로 즐거운 일이다. 앞으로도 그곳을 찾아 사색을 하고 그들의 족적을 찾아 독자들과 함께 할 것을 감히 약속하며 최신복 아니 최영주의 대표 수필 두 편을 소개하며 글을 닫는다.

최신복 선생과 사자후를 마치고 묘를 돌아보는 글쓴이.

<조선 제일 큰 강>

압록강은 조선에서 제일 크고 긴 강입니다. 길이가 790 킬로 메타 - 조선리수로 친다면 18리나 되는 큰 강입니다. 우리조선 저 북쪽 끝에 자리잡고 조선과 중국과의 국경이 되어있는 강입니다. 물결이 빠르고 암초(바위가 강 위에 솟아 있는 것)가 많아서 배 다니기에 편치 못한 편입니다.

근원을 조선에서 제일 높은 산인 백두산의 남쪽 골짜기에서 시작하여 가지고 조선쪽과 중국쪽의 여러 샛강물을 모아 나려오다가 황해바다로 흘러들어 간답니다.

우리 압록강 꼭대기는 조선에서 제일 큰 숲이 있는 곳인데 그곳에서 큰 나무를 베어 가지고는 뗏목을 만들어 강물에다 띄워내려 보낸다고 합니다. 한참 나무를 많이 띄워 내릴 때는 넓은 강으로 뗏목들이 끝이 없이 끝이 없이 줄 이어서 자꾸 내려와서 강어귀에 가까운 신의주에 와서 닿는답니다. 그래서 이 나무로 종이도 만들고 조선 안은 물론 다른 곳까지 재목으로 쓴답니다. 그러나 이 숲은 원체 넓고 크고 나무가 많아서 아무리 베어내고 베어내더라도 다 없어지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신의주 가까이 와서는 물결이 그다지 빠른 줄 모른 것 같으나 조선에서 제일 물결 센 강이고 넓이 넓은 강인 것도 틀림없습니다. 검으죽한 물이 소리 없이 술울술울 흘러가고 흘러갑니다. 강우에는 조선사람 중국사람 일본사람들의 배들이 쉬지않고 왔다갔다 합니다. 바로 강건너는 중국이니까 그곳 사람의 배도 많은 것입니다.

이강은 북쪽에 있는 이 만큼 얼음이 일찍 업니다.

약력 12월 초승만 되면 벌서 얼음이 엄니다. 어느 해에는 11월 보름날에 어름이 언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찍 얼고 녹기는 늦게 녹는 답니다. 3월 보름께나 되어야 겨우 녹는답니다. 즉 1년 동안의 3분의 1 가량은 얼음이 얼어있는 것입니다.

겨울만 되면 이 강으로 얼음 지치러 오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듭니다. 저 일본에서도 일부러 찾아가는 이도 있답니다. 그래서 이 강에서는 한 겨울이면 몇 번씩이나 스케이트 대회가 열립니다. 그리고 얼음이 얼면 강 위로 썰매가 많이 다닙니다. 짐도 싣고 사람도 싣고서 많이 다닌답니다.

신의주에서는 강을 건너질러 큰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조선에서 제일 크고 제일 긴 다리랍니다. 그 위로는 기차도 자동차도 인력거도 그리고 사람도 다닌답니다. 다리 길이가 3천 척이나 됩니다. 다리 가운데는 개폐장치가 되어있습니다. (개폐장치라는 것은 다리가 돌아서 끊어졌다가 맞닿았다가 하는 것입니다.) 이 다리는 얼음이 얼지 않은 동안만 하루 네 번식 열렸다 닫쳤다 합니다. 큰 강에 다리가 가로 놓여 있으니까 큰배들은 다니지를 못하게 되어서 다리를 열어 놓고 아무리 큰 배라도 지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양에 하나밖에 안 된다고 손꼽는 유명한 것입니다.

우리 압록강은 조선 제일을 모두 모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큰 강입니다.

인제 봄이 왔으니 그 강물도 넉 달 동안이나 굳게 얼음으로 잠겼던 것이 녹아질 터이지요. 그리고 흰 돛단배들이 바람을 잔뜩 받아 가지고 떠다닐 터이지요. 그리고 강가에 늘어진 수양버들에 물이 오르면 거기서도 호드기 소리가 들리겠지요. 그리고 꾀꼬리 우는 소리도 들릴 것입니다.


<석류나무>

우리 집 석류나무는 좋은 석류나무였습니다. 칠년 전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저 전라도 무안 땅엘 가시었다가 구해 오신 썩 좋은 석류나무였습니다.

해마다 꽃은 잘 피고 석류도 잘 열렸습니다. 가장귀 도 이쁘게 생겨서 누구나 우리 집엘 와서 보는 이는 모두 좋은 석류나무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화초를 좋아사시는 할아버지께서는 이 나무를 더 이뻐 하시고 귀히 가꾸시었습니다. 해마다 거름을 주시고 벌레를 잡아 주시고 가지를 쳐 주시고 하셨습니다. 석류나무는 해마다 부쩍부쩍 자랏습니다.

작년 봄에는 나무가 아주 커져서 화분에다가는 더 기를 수가 없게 되엇습니다. 그래 할아버지께서는 봉당 앞 꽃밭에다 옮겨 심으셨습니다. 넓은 꽃밭에다 옮겨 심은 석류나무는 더 싱싱하게 잘 자랐습니다.

겨울이 되었습니다.
석류나무를 한데다 그래로 두면 추위를 잘 타니까 그냥 얼어 죽을 것이라고 할아버지께서는 꽃밭 옆을 깊숙하게 파시고 석류나무를 땅 속에다가 묻어 주시었습니다. 봄이 오면 흙을 다시 헤치고 가지를 일으켜 세워 주실 생각이시었습니다.
그런데 석류나무가 묻혀 있던 꽃밭은 바로 겨울 동안 우리들이 세수를 하는 봉당 앞이었습니다. 날마다 우리들은 석류나무가 묻혀 있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세숫물을 거기다 내버렸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석류나무 묻힌 데로 물이 스며들어 가서 땅이 얼면 큰일이라고 우리들한테 이르셨지만 우리들은 수채가 멀리 있기 때문에 잊어 버리고 자꾸 거기다 물을 내버렷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석류나무도 귀애하시지만 우리들도 퍽 귀애하셨습니다. 그래 아침 볕 잘 드는 봉당 앞에서 우리들보고 세수를 하지 말라고는 아니 하시고 석류나무를 다른 데로 파 옮기시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날이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방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기도 어렵게시리 추워졌습니다. 우리들은 봉당에도 못 나가고 방 속에서 세수를 하고 부산을 떨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석류나무를 오늘이라도 파 옮겨 묻어야지 얼려 죽이겠다고 걱정 하셨습니다. 사실 꽃밭 자리는 날마다 물을 내버려서 질펀하던 것이 얼어서 땐땐하였습니다.
그날 낮에 할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이 방에 있는 새에 석류나무를 마내다가 딴 데다 묻으셨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음력 정월 열이튿날 갑자기 세사을 떠나셨습니다. 온 집안은 슬픔에 잠기어 목놓아 울며 장사를 치렀습니다.
할아버지가 안 계신 집안은 쓸쓸하였습니다. 그 반가운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릴 듯 들릴 듯하면서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침이면 새벽 일어나셔서 우리들 잠자는 방에 불도 안 때 주십니다. 이글이글하는 화롯불을 담아 가지고 들어오셔서 옷을 쪼여 주시면서 잠꾸러기 우리들을 깨워 주시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날마다 할아버지 생각만 하고 언짢아하였습니다. 석류나무 생각은 아무도 아니 하였습니다.

삼월이 되었습니다.
봄이 온 것입니다. 땅이 풀리고 나무마다 새싹이 트려고 애를 씁니다. 할머니께서 할아버지 대신 화초밭을 꾸미시고 꽃씨를 뿌리시고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석류나무 생각을 하였습니다. 온 집안 식구는 모두들, “참!” 하고는, “어디다 파 옮기셨나?” 하였습니다.
“얘, 넌 모르겟니?”
할머니께서 어머니한테 물으시는 것입니다.
“영숙인 못 봤니?”
할아버지를 제일 따르던 영숙이 보고 아버지께서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아실텐데······.”
이건 밥 짓는 이의 말이었습니다. 암만 생각해도 그 춥던 날 낮에 꽃밭에서 파 내시는 건 보 이가 있지만 어디다 옮겨 묻으셨는지 묻는 자리를 본 이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가 아니겠니?”
하시며 할머니는 뒤꼍 장독대 옆을 파 보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닭장 옆을 파 보시었습니다. 어머니도 사랑 앞 마당으로, 우물 옆 화초밭으로 사방 파 보시는 것이였습니다. 우리들도 어른들과 같이 여긴가 저긴가 하면서 땅을 팠습니다.
장독대 옆도 아닙니다. 닭의장 앞도 아니었습니다. 뒷간 앞 담포퉁이도 파 보았습니다. 우물 옆 화초밭에도 없습니다. 사랑 봉당 앞도 아닙니다.
어딜까? 어딜까? 하면서 묻으심직한 곳은 모조리 파 보았으니 석류나무는 나오지를 않습니다.
맨 나중에는 할 수 없어서 올봄에 서울로 공부 간 꼴찌 아주머니는 알까 하고 할머니께서 일부러 서울까지 갔다 오셨습니다.
그러나 꼴찌 아주머니도 알지를 못했습니다. 두 번 세 번 집 언저리로 다니며 찾아보았으나 석류나무는 땅 속에 묻힌 채 영영 나오지를 아니하였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석류나무는 할아버지를 따라서 간 게다. 고만들 찾자.”
하시었습니다. 우리들도 어쩐지 그런 것 같아서 언짢아하면서,
“석류나무야, 고맙다!”
그랬습니다.

참조문헌: 민족대백과사전, 소파재단 홈페이지, 노래의 단비로 새싹을 가꾸며('윤석중 인물전'. 신현득), 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신동아. 2008년 5월호. 김영식), 최순애의 동요에 대하여(심명숙), 개벽과 구잔 차상찬(정진석), 한국수필문학의 궤적(박용서), 흘러간 개벽사의 별(차웅렬)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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