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파 조지훈 시인의 묘소를 찾기란 어려워...

9살에 동요를 짓고, 11살에 어린이 문집 "꽃담" 엮어 
'고풍의상, 승무'... 데뷔작이자 대표작
시인, 교수, 국문학자, 역사학자 1인 4역

조지훈 시인의 집팔모습.

올해는 현대시가 우리에게 첫선을 보인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08년 문학지 "소년(少年)" 11월호를 통해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것을 효시로 보기 때문이다.

시인과의 사자후(死子逅)는 시를 쓰는 글쓴이의 입장에서 볼 때 더욱 남다를 감정을 느끼게 된다.

망우리 사색공원에서 만난 만해 한용운, 월파 김상용, 박인환 시인과 우연한 회포를 풀고 남양주로 떠나 한국인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서정시인 청록파(靑鹿派) 조지훈을 만나러 간다.

여기서 '사자후(死子逅)'란 '죽은 이와 우연히 만나다 또는 죽은 이와 만나 허물없이 지내다'라는 의미다. (글쓴이 주)

승무(僧舞)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승무' 전문

-1시간 넘게 헤매고 사자후(死子逅)

경칩이 지나고 아직은 쌀쌀하지만 봄기운을 느낄 수 있는 따사로운 3월 7일 동료와 함께 조지훈 선생을 만나러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경이었다.

10분이면 다가 갈 수 있는 거리를 1시간 넘게 헤매다 시인과 사자후를 하다. 
옛날 우시장이 섰던 마석장의 아련한 기억을 더듬고, 수동으로 향하는 일방통행 길을 따라 가니 "시인 조지훈 선생묘" 밤색표지판이 보인다. 내 사는 곳이 구리시이고 이곳을 풀방구 드나들듯이 드나들었지만 선생의 묘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은 인지하지 못했다. 얼마 전 시인 친구를 통해 들었으니 내 무심함을 먼저 탓한다.

하지만 들뜬 마음으로 상가 골목을 지나 계단을 오르고, 동산을 30여분 헤맸다. 타인의 묘를 몇 기 발견했을 뿐 선생의 만년유택은 쉽게 찾질 못했다. 심석중고등학교 뒤편에 있다는 지인의 말에 그저 막연히 부지런한 농부에게,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고교생에게 물었지만 선생의 묘소를 아는 이가 없었다.

"애들아. 조지훈 선생의 묘소가 어딨니?" "저희 학교에는 그런 선생님이 안 계셔요." 고교생과 우문우답을 하다가 일전에 이곳을 다녀간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안내대로 마석교회 뒤편 운동장으로 간다. 눈앞에 보인 잘 다듬어진 묘소. 잰걸음으로 갔으나 영일 정씨의 자리다. 다시 동산으로 올라가 동료와 좌우로 나누어 찾았다. 그렇게 또 10여분이 흘렀고 환히 내 눈에 들어 온 두 봉분. 검정색 화강암의 묘갈에 "지훈한양조공동탁지묘(芝薰漢陽趙公東卓之墓)"라 적혔다. 시계를 보니 5시를 조금 넘겼다. 선생의 묘소는 엄한 유교의 집안에서 늘 인자하게 대해주었던, 어머니 문화 유씨 묘를 뒤에 두고 있다.

선생의 묘 앞 전경은 환히 트인 농지 뒤로 마석역이 보이고 백봉산이 덩그러니 지키고 서있었다. 비로소 사자후(死子逅)를 한다.

-유교 전통 가문에서 어린 시절 보내   

조지훈(趙芝薰)선생은 1920년 12월 3일(음. 21년 1월 11일)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注谷]에서 조헌영(趙憲泳)과 어머니 유노미(柳魯尾) 사이에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고, 본명은 동탁(東卓)이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어린시절 한학을 배운 "월록서당"
그의 일생에 있어 조부 조인석(趙寅錫:1879~1950)의 영향이 가장 컸다. 할아버지는 구한말 사헌부대부를 지낸 선비로 평소 가족에게 3불차(三不借) 즉 "남에게 사람, 글, 돈을 빌리지 말라."는 유지를 내놓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개탄을 하면서 자결할 정도로 아주 곳곳한 성품이었다. 주실마을에 소재한 월록서당(月麓書堂)은 그의 선대와 야성 정, 함양 오씨가 세웠고 한문고전, 조선어, 조선역사를 주로 가르쳤다.

어린 지훈도 이곳에서 수학(修學)하다가 영양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했으나 곧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한학을 배우게 된다. 틈틈이 와세다대학 통신강의를 통하여 신학문을 익히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정통유교 가문에서 한학과 신학문을 골고루 습득하며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9살에 동요를 짓고, 어린이날 행사로 곤혹도 치러    

 

 

 

 

 

 

 

 

형 동진씨와 함께(중학시절).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쓴 "나의 역정"이라는 책에 "글이라고 쓰기 시작한 아홉 살에 동요를 처음 지었고, 동화를 창작해 보기도 했다."라 회고했다.

지훈은 당시 아이들이 대하기 어려웠던 동화 "피터팬, 파랑새, 행복한 왕자"와 같은 동화를 읽으면서 서구 문학을 만났다.

11살이던 1931년에 마을아이들과 "꽃담"이라는 문집을 엮었고, 1935년부터 본격적인 습작에 들어간다. 그는 소년회를 만들었고,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어린이날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지훈은 산속에서 당국 몰래 어린이 날 행사를 치렀고, 발각되어 구류를 당하는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고 술회한다.

활발히 소녀회 활동을 하면서 사회과학서적을 탐독하였고, 서양의 문학을 접하면서 프로문학에 대한 혐오와 회의를 깨달았다고 전한다.

-문학청년, 1939년 "문장(文章)"을 통해 입문

청록파 시인을 데뷔시킨  "문장" 창간호.

청년 지훈은 열일곱이 되던 1936년 상경하여 고향 선배인 오일도(吳一道. 시인. 1901. 2. 24 경북 영양~1946. 2. 28 서울)의 '시원사'에 머무르며 보들레르, 오스카 와일드에 빠져 탐닉하였다. 사실주의 문학이 시들해진 시기라 당시의 문예사조를 알아보려고 도스토예프시키, 플로베르를 두루 섭렵한다. 보들레르의 상징주의가 정통이라고 믿게 되고, 오스카와일드의 탐미주의에 빠져 그의 희곡 "살로메(Salome)"도 번역하였다.

뿐만 아니라 릴케, 헤세, 이백, 두보, 소동파 등 동서양 시인의 글은 비롯하여 그의 사상의 터전이던 불교경전은 물론 성서, 유교, 노장사상 등을 탐독했다. 이러한 독서 정신은 그의 시세계를 확립하는데 결정적 요인이 된다. 그야말로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쓰는' 3다(三多)를 몸소 실천한 대표적 문학가이다. 

그 당시의 모든 문학청년이 그랬듯이 1차 대전 전후의 소위 아방가르드 문학에 열중하였고, 본격적인 습작활동에 들어간다. 인사동에 고서점 "일월서방(日月書房)"을 운영하며 한용운, 홍사용 등 당대의 문사들과 교류를 넓혀간다. 1937년 지조를 지키다가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한 김동삼(金東三. 독립운동가. 1878.6.23 안동~1937.3.3 서울)의 시신을 만해가 거두어 심우장(尋牛莊)에서 장례를 치를 때 문상을 가기도 했다. 열일곱, 열여덟의 자신의 뜻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무렵 자력으로 혜화전문(현. 동국대)에 입학하고, 마침내 정지용(鄭芝溶. 시인. 1902년 5월 15일 충북 옥천~1950년 9월 25일)의 추천으로 열아홉 살 되던 1939년 3월에 '고풍의상(古風衣裳)'으로 문단에 첫발을 내 딛는다. 그해 10월에는 불후의 명작 '승무(僧舞)'를 발표하고 이듬해 2월에 '봉황수(鳳凰愁)'가 추천된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그의 시풍은 그를 추천한 정지용이 감탄했으며, 당대의 문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기 시작한다.

그의 데뷔작인 '고풍의상, 승무. 봉황수'는 초기 작품의 차원을 벗어난 출세작이 되고 대표작이 되었다. 지훈의 천재적 문학적 소질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극성을 부리던 암울한 시대 모국어의 역사적 운명을 담당하는 역할을 입문시절부터 해방이 되기까지 아니 그 이후 창작활동까지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봉황수(鳳凰愁)

벌래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든 거미줄 친 옥좌(玉座) 우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십품(從十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 봉황수" 전문

1939년 7월1일 동인지 "백지(白紙)"에 참여한다. 이 책은 최익연(崔翼然)이 편집발행인으로 1939년 8월 10일에 제2호를 10월 28일에 제3호로 내고는 문을 닫았다. 시를 위주로 하고 소설과 희곡을 곁들였다.

시인은 조지훈을 비롯하여 비롯하여 오화룡(吳化龍), 조인행(趙仁行), 장상봉(張祥鳳), 김석준(金晳埈), 박호진(朴浩鎭), 장성진(張星軫), 김해진(金海鎭)이 소설에 김용태(金容泰), 김동규(金東奎), 길손임(吉孫任)이 희곡은 이재영(李載榮) 함께했다. 이 동인지는 "백지"의 이름이 그러하듯 뚜렷한 주의나 색채가 없는 순수문예동인지였다.

고풍의상(古風衣裳)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 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지빛 호장을 받친 호장 저고리
호장 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초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 당혜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

호접인 양 살푸시 춤을 추라 아미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보리니
가는 버들인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지어다.
-"고풍의상" 전문.

1940년 그는 김위남과 결혼하고 1941년 3월에 혜화전문을 졸업하자 오대산 월정사 산문으로 들어가 불교강원 외전을 강의하고 12월에 상경한다. 1942년 3월 "조선어어학회 큰사전" 편찬원이 되면서 박목월과 문학적 교류를 튼다.

1943년 영양으로 낙향했다가 45년 귀경하여 명륜전문 강사(10월), 한글학회국어교본 편찬원(10월), 진단학회국사교본 편찬원(11월) 등으로 활동하다가 1946년 경기여고 교사(2월), 서울여의전 교수(9월)를 통하여 후학을 시작했다. 이해 그의 문학적 횡보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데, 전국문필가협회 중앙위원, 청년문학가혀회 고전문학부장의 역할이 그것이다. 이시기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서정시의 절정 "청록집(靑鹿集)" 발간

 

20대를 시인, 교수, 국어학자, 역사학자 1인 4역을 담당했던 그는 마침내 문학의 뜻이 같은 박목월, 박두진과 "청록집"을 발간한다. 청록집은 1930년말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해 등단한 3명의 시인을 가리키는 말로 1946년 3인 시집 "청록집"을 을유문화사에서 펴내면서 '청록파'라고 부르게 된다.

청록파는 8·15해방이 되자 좌익계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에 가입하여 순수문학을 옹호했으며, 자연을 소재로 순수서정을 드러내는 "청록집"을 펴냈다. 이 세 시인은 한국 시단에서 8·15해방 이후 6·25전쟁까지 한 시기를 대표하는 문인들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목월은 '임, 청노루. 나그네' 등 15편, 조지훈은 '승무, 완화삼(玩花衫) 등 12편, 박두진은 '묘지송(墓地頌), 도봉' 등 12편 등 총 39편을 수록하였다. 그들의 작품 대부분은 문장에 실린 시들로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시라는 점이 공통적이다. 이 시집을 펴낸 이후 세 시인은 '청록파'라 불렸다. 8·15해방 후 최초의 창작시집이라는 한국시사적 가치를 지닌다. 세 시인의 시세계는 표현의 기교나 율격 면에서 서로 다르나 자연을 소재로 인간적 염원과 순수한 가치를 추구한 펼쳤기에 이들을 '자연파'라고도 한다.

조지훈은 전통적 생활양식에 깃든 한국적인 정신과 미의식을 섬세한 감성으로 표현했으며, 고전적 우아함은 그그만의 미적 상징으로 본다. 박두진은 자연을 목가적인 세계가 아니라 원시적 건강성과 격렬한 의지의 대상으로 특징으로 차츰 그리스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과 사회의 조화를 추구했고, 박목월은 독자적으로 수용한 민요조의 리듬에 애틋하고 소박한 향토적 정서를 즐겨 노래했다.

조지훈은 이 책에 실린 작품은 '봉황수, 고풍의상, 무고(舞鼓), 낙화(洛花), 피리를 불면, 고사(古寺)1, 고사2, 완화삼(玩花衫), 율객(律客), 산방(山房), 파초우(芭蕉雨), 승무(僧舞)' 12편. 박목월은 '임, 윤사월, 삼월, 청노루, 갑사댕기 흔들며, 나그네, 달무리, 박꽃, 길처럼, 가을 어스름, 연륜, 귀밑사마귀, 춘일(春日), 산이 나를 에어 싸고, 산그늘' 15편. 박두진은 ' 향현(香峴), 묘지송, 도봉, 별, 흰장미와 백합꽃을 흔들며, 연륜, 숲, 푸른 하늘 아래, 설악부, 푸른 숲 아래서, 어서 너는 오너라, 장미의 노래 12편이다.

 

완화삼(玩花衫)
- 목월에게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결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완화삼" 전문.

-48세에 이슬처럼 사라진 영원한 '나빌레라'

김의환 화가의 소묘와 조지훈 시인의 친필서명.

해방 후 지훈은 우리나라 시단의 중심위치에 서게 된다. 때로는 좌파와 대립하고 독재정권에 맞섰기에 지사(志士) 또는 '마지막 선비'라 별칭을 얻개 된다. 평소 술 마시는 것을 즐겨하여 호사가들이 뽑은 두주불사 10걸에 들기도 했다. 그가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할 때 파자(破字)놀이와 고금소총을 자주 인용했다고 한다.

한 학생과 주고받은 일화가 전한다. "달밤에 개가 징검다리를 건너는 글자는?" “그럴 ‘연(然)’자입니다.” “나무 위에서 ‘또 또 또’ 나팔을 부는 글자는?” “뽕나무 ‘상(桑)’자입니다.” “그럼, 사람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글자는?”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자네도 참, 그렇게 쉬운 글자도 모르다니. 그건 말이야. 한글 '스' 자라네." 참으로 호방하고 인자한 스승이 아닐 수 없다.

지훈을 두고 목월은 "크고도 섬세한 손"이라 했다. 역사 인식을 뚜렷하게 하려는 거시안(擧示眼)과 섬세한 서정의 실마리를 다듬은 서정 시인으로서 역할을 다한 심미안(審美眼)을 겸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한국문화사의 서설"을 비롯해 "한국민족 문화사", "한국사상연구", "한국학연구" 등 역사학자로 많은 집필 활동을 하였다. 1963년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하고, 이듬해 제1권을 출판한다. "한국문화사대계"를 쓰다가 1968년 5월 17일 새벽 지병인 기관지확장으로 우리 곁을 떠나 영원한 '나빌레라'가 되었다. 그때 나이 48세였다.

2002년 6월 문화관광부에서는 이달의 문화의 인물로 선정하여 그 뜻을 기리고 남산, 고려대교정에 그의 시비를 세웠으며, 2007년에 조지훈 문학관을 고향 영양군에서 문을 열어 조지훈의 시세계를 널리 알리고 있다.

"지나가는 자여. 발길을 멈추게나. 지훈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섬세한 이슬방울처럼 크고 높은 솟대처럼, 우리민족의 꿈길에 불멸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으므로..."

고향 주실마을에 세운 조지훈 문학관.
-희대의 가객(佳客), 즐거운 봉황(鳳凰) 조지훈

파초우(芭蕉雨)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 잎에 후드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않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파초우" 전문

-조지훈 묘소주변을 현대시 작은 공원라도 만들어야

시의 원리. 1959년 집필.

고집스럽게 자신의 시세계를 지켜온 시인. 확고한 나라정신으로 후학에게 귀감이 된 사학자. 그의 만년유택이 남양주 화도읍 마석우리에 있음에도, 너무나 가까이 있기에 무심해진 우리가 아닌가. 스무 살 안팎 지은 시들이, 청록파라고 남들이 인정한 서정시인의 묘.

길가에 세운 표지판 하나. 그 길을 따라 올라도 쉽게 찾을 없는 현실이 가슴이 아프다. 문화의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는 남양주시. 나라의 동량을 기르는 초중고가 불과 5분거리에 있으나 그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현실이 왠지 서글프다. 

작은 동산에 살포시 숨어 있는 그의 흔적을 안내하기 위한 노력이 너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지금이라도 그의 묘소를 중심으로 현대시 100주년을 맞이하는 좋은 시기에 그 주변을 조지훈을 비롯한 작은 현대시 공원으로 만들면 어떨까하는 마음이 앞선다.

그나마 개인단체와 예술단체가 한국의 서정시를 대변하는 조지훈의 뜻을 기리기 위해 작은 준비를 한다니 조금은 안심이다.

48세의 길지 않은 삶. 시인으로 수필가로 국어학자로 역사학자로 그가 이 땅에 살았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우리 겨레가 큰 축복이고, 그가 누워있는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의 축복을 그 어디에 비할까.

지훈 조동탁과 사자후를 끝내자 마지막 남은 겨울바람이 봄바람에 섞여 구름 위에 걸리고 평소 마음에 담았던 선생의 '산중문답'을 읊조린다.

암울한 시대에 절창의 시로 뭇 백성을 위로한 희대의 가객, 서정시의 봉황으로 영원히 남기를 기원하며...사자후(死子逅)를 마친다.

심사중...박종화, 백철, 조지훈,조연현,서정주

산중문답(山中問答)

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에 호미 씻고 돌아오는 

맛을 자네 아능가

마당 가 멍석자리 쌉살개도 같이 앉아
저녁을 먹네
아무데나 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다가
심심하면 퉁소나 한가락 부는
그런 멋을 자네가 아능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내랑 밭을 매면
늙은 아내도 이뻐 뵈네
비온 뒤 앞개울 고기
아이들 데리고 낚는 맛을
자네 태고(太古)적 살림이라꼬 웃을라능가

큰일 한다고 고장 버리고 떠나간 사람
잘 되어 오는 놈 하나 없네
소원이 뭐가 있능고
해마다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라고
비는 것뿐이제

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나라일이나 잘하라꼬 하게
내사 다른 소원 아무것도 없네
자네 이 마음을 아능가

노인(老人)은 눈을 감고 환하게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뤄 주신다.

"예 이 맛을 알 만합니더"
청산(靑山) 백운(白雲)아
할 말이 없다.
 -'산중문답' 전문

-시인 조지훈의 연보
■1920. 음 12월 3일 경북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에서 출생.
■1936. 상경 혜화전문 입학. 인사동에서 일월서방(日月書房) 운영.
■1938. 한용운, 홍사용과 교류를 시작 함.
■1939. 정지용 추천으로 "문장"에 '고풍의상(3월호)', '승무(12월호)' 발표. 동인지 "백지"에 참여.
■1940. 김위남과 결혼.
■1941. 혜화전문학교 졸업(3월).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외전 강의(4월)
■1942. 조선어학큰사전 편찬위원(3월)
■1945. 명륜전문 강사(10월), 한글학회국어교분 편찬위원(10월). 진단학회국사교본 편찬위원(10월)
■1946. 경기여고 교사(2월), 서울여의전 교수(9월), 전국문필가협회 중앙위원, 청년문학회 조직 고전문학부장. 박두진, 박목월과 청록집 발간
■1947. 동국대 강사/1948. 고려대 교수
■1950.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7월), 종군기자로 평양에 다녀옴(10월).
■1951. 종군문인단 부단장(5월)
■1952. 시집 "풀잎단장" 출판. ■1953. 시론집 "시의 원리" 간행.
■1956. 자유문학상 수상. 시집 "조지훈 시선" 발행.
■1958. 수필집 "창가에 기대어" 출판.
■1959. 번역서 "채근담", 시집 "역사 앞에서", 수필집 "시와 인생" 연속 출간. 민족수호국민총연맹 중앙위원, 공명선거전국위원회 중앙위원.
■1960. 한국교수협의회 중앙위원.
■1961. 국제시인대회 한국대표 참가(벨기에)
■1962. 수필집 "지조론" 발표. 고려대 한국고전국역위원장.
■1963.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
■1964. 시집 "여운", 수필집 "돌의 미학"을 펴냄. "한국문화사대계" 제1권 발간(고려대).
■1967. 한국시인협회 회장
■1968. 5월 17일 새벽 5시 40분 기관지확장으로 소천.

수상집 "지조론" .1962년.

-조지훈의 주요 저서(시)

■1946. 청록집(공저). 을유문화사.
■1952. 풀잎단장. 창조사.
■1956.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9. 역사앞에서. 신구문화사.
■1964. 여운. 일조각.
■1968. 청록집기타(공저). 현암사.

조지훈 사후 출판, 기념사업

■1968. 청록집이후(공저). 현암사.
■1972. 남산에 조지훈 시비 건립.
■1975. 승무. 삼중당.

■1982. 한국시문학대계 19. 조지훈. 지식산엽사.
■1983. 조지훈시집. 정음문화사.
■1984. 승무. 정음문화사.
■1985. 깊은 밤 홀로 깨어나. 영인문화사.
■1987. 승무. 자유문학사.
■1989. 동문서답. 범우문고.
■2002. 6. 이달의 문화의 인물 선정
■2006. 9. 29. 고려대에 문학비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알까," 세움.
■2007. 5. 18. 조지훈 문학관 건립. 12월 한국문학 추억의 작고문인102전 추대. 

-연대별 작품 활동ⓛ-시

■1930년대. 춘일, 승무, 고품의상, 가야금 등
■1940년대. 봉황수, 향문, 고사1, 고사2, 산방, 완화삼, 암혈의 노래, 비혈기, 파초우, 마을, 창, 달밤, 바램의 노래, 낙화, 동물원의 오후, 산상의 노래, 절정, 화체개헌, 십자기의 노래 등.
■1950년대. 절망의 일기. 청마우거 유감, 다부원에서, 서울에 돌아와서, 도리원에서, 패강무정, 지옥가, 새 아침에, 아침, 풀잎단장, 석문, 코스모스, 월광곡, 밤길, 구대 형관을 쓰라, 역사 앞에서, 우리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봉일천 주막에서, 종로에서, 잠언, 설조, 여운, 혼자서 가는 길, 추일단장, 아침2,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알까, 이력서, 단장2, 인쇄공장, 팔일오송, 그날 분화구 여기에, 눈, 민주주의는 살아있다, 계명, 산중문답, 병에게 등.

-연대별 작품 활동②-수필

■1940년대. 한국의 하늘, 무궁화 등
■1950년대. 멋살, 삼토주, 비승비속지탄, 생전부귀 사후문장, 아침지도, 통행금지시간, 주도유단, 우익좌파, 연예미학서설, 대도무문, 방우산정산고, 화동시절의 추억, 방우산정기, 기당 현상윤 선생을 생각함, 표호삼법, 주객이 아니라 성명, 적막한 이야기, 창에 기대여, 램프를 켜놓고, 슬픈 인간성, 불란서 인형의 추억, 주택의 멋, 의상의 의미, 요리의 감각, 청춘의 특권, 화랑 추도문 등.
■1960년대. 한국 신시 60년 기념사업회 취지문, 근대명언초, 역일선담, 이육사비문, 돌의 미학, 여성미의 매력점, 동문서답, 기우문, 결혼식주례사 등.

-시인 조지훈의 연대별 대표시 모음

■1930년대

춘일(春日)

동백꽃
붉은 잎새 사이로

푸른 바다의
하이얀 이빨이 웃는다.

창 앞에 부서지는
물결 소리

노랑나비가
하나

유리 화병을
맴돈다.

꽃잎처럼
물려간다.

가야금 (伽倻琴)

1
휘영청 달 밝은 제 창을 열고 홀로 앉다
품에 가득 국화 향기 외로움이 병이어라.

푸른 담배 연기 하늘에 바람 차고
붉은 술그림자 두뺨이 더워 온다.

천지가 괴괴한데 찾아올 이 하나 없다
우주(宇宙)가 망망(茫茫)해도 옛 생각은 새로워라.

달 아래 쓰러지니 깊은 밤은 바다런듯
창망(蒼茫)한 물결소리 초옥(草屋)이 떠나간다

2
조각배 노 젓듯이 가얏고를 앞에 놓고
열두줄 고른 다음 벽에 기대 말이 없다.

눈 스르르 감고 나니 흥이 먼저 앞서노라
춤추는 열손가락 제대로 맡길랐다.

구름끝 드높은 길 외기러기 울고 가네
은하(銀河) 맑은 물에 뭇별이 잠기다니.

내 무슨 한(恨)이 있어 흥망(興亡)도 꿈속으로
잊은 듯 되살아서 임 이름 부르는고.

3
풍류(風流) 가얏고에 이는 꿈이 가이없다
열두 줄 다 끊어도 울리고 말 이 心思라.

줄줄이 고로 눌러 맺힌 시름 풀이랏다
머리를 끄덕이고 손을 잠깐 쓸쩍 들어

뚱뚱 뚱 두두 뚱뚱 흥흥 응 두두뚱 뚱
조격(調格)을 다 잊으니 손끝에 피맺힌다.

구름은 왜 안 가고 달빛은 무삼일 저리 흰고
높아 가는 물소리에 청산(靑山)이 무너진다.

■1940년대

암혈(巖穴)의 노래

야위면 야윌수록
살찌는 혼(魂)

별과 달이 부서진
생물을 마신다

젊음이 내게 준
서릿발 칼을 맞고

창이(創痍)를 어루만지며
내 홀로 쫒겨왔으나

세상에 남은 보람이
오히려 크게

풀을 뜯으며
나는 우노라

꿈이여 오는가
광야(廣野)를 달리거라

깊은 산골에
잎이 진다

지옥가

여기는 그저 짙은 오렌지빛 하나로만 물든 곳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사람 사는 땅 위의 그 황혼(黃昏)과도 같은 빛깔이라고 믿으면 좋습니다. 무슨 머언 생각에 잠기게 하는 그런 숨막히는 하늘에 새로 오는 사람만이 기다려지는 곳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여기에도 태양은 있습니다. 태양은 검은 태양, 빛을 위해서가 아니라 차라리 어둠을 위해서 있습니다. 죽어서 낙엽처럼 떨어지는 생명도 이 하늘에 이르러서는 눈부신 빛을 뿌리는 것, 허나 그것은 유성(流星)과 같이 스러지고 마는 빛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이 곳에 오는 생명은 모두 다 파초잎같이 커다란 잎새 위에 잠이 드는 한 마리 새올습니다. 머리를 비틀어 날갯죽지 속에 박고 눈을 치올려 감은 채로 고요히 잠이 든 새올습니다. 모든 세포(細胞)가 다 죽고도 기도(祈禱)를 위해 남아 있는 한 가닥 혈관(血管)만이 가슴 속에 촛불을 켠다고 믿으십시오.

여기에도 검은 꽃은 없습니다. 검은 태양빛 땅 위에 오렌지 하늘빛 해바라기만이 피어 있습니다. 스스로의 기도를 못 가지면 이 하늘에는 한 송이 꽃도 보이지 않는다고 믿으십시오.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첫사랑이 없으면 구원의 길이 막힙니다. 누구든지 올 수는 있어도 마음대로 갈 수는 없는 곳, 여기엔 다만 오렌지빛 하늘을 우러르며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는 기도(祈禱)만이 있어야 합니다.

■1950년대

역사 앞에서

만신(滿身)에 피를 입어 높은 언덕에
내 홀로 무슨 노래를 부른다.
언제나 찬란히 틔어 올 새로운 하늘을 위해
패자(敗者)의 영광(榮光)이여 내게 있으라.
나조차 뜻 모를 나의 노래를
허공(虛空)에 못박힌 듯 서서 부른다.
오기 전 기다리고 온 뒤에도 기다릴
영원한 나의 보람이여
묘막(渺漠)한 우주(宇宙)에 고요히 울려 가는 설움이 되라.

풀잎단장(斷章)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 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이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1960년대

잠언(箴言)

너희 그 착하디 착한 마음을 짓밟는
불의(不義)한 권력에 저항하라.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는 세상에
그것을 그런 양하려는
너희 그 더러운 마음을 고발하라.

보리를 콩이라고 짐짓 눈감으려는
너희 그 거짓 초연한 마음을 침 뱉으라.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둥근 돌은 굴러서 떨어지느니

병든 세월에 포용되지 말고
너희 양심을 끝까지
소인(小人)의 칼날 앞에 겨누라.

먼저 너 자신의 더러운 마음에 저헝하라.
사특한 마음을 고발하라.

그리고 통곡하라.

이력서(履歷書)

본적(本籍)
차운 샘물에 잠겨 있는 은가락지를 건져 내시는 어머니의 태몽(胎夢)에 안겨 이 세상에 왔습니다. 만세(萬歲)를 부르고 쫓겨나신 아버지의 뜨거운 핏줄을 타고 이 겨레에 태어났습니다. 서늘한 예지(叡智)의 고향(故鄕)을 그리워하다가도 불현듯 격(激)하기 쉬운 이 감정(感情)은 내가 타고난 어쩔 수 없는 슬픈 숙명(宿命)이올시다.

현주소(現住所)
서울특별시 성북동(城北洞)에 살고 있읍니다. 옛날에는 성(城) 밖이요 지금은 시내(市內)---이른바 '문안 문밖'이 나의 집이올시다. 부르조아가 될 수 없던 시골 사람도 가난하나마 이제는 한 사람 시민(市民)이올시다. 아무것이나 담을 수 있는 뷘 항아리, 아!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없는 몸짓 이 나의 천성(天性)은 저자 가까운 산골에 반생(半生)을 살아온 보람이올시다.

성명(姓名)
이름은 조지훈(趙芝薰)이올시다. 외로운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늘 항상 웃으며 사는 사람이올시다. 니힐의 심림(深林) 속에 숨어 있는 한오리 성실(誠實)의 풀잎이라 생각하십시오. 거독(孤獨)한 향기(香氣)올시다. 지극한 정성을 오욕(汚辱)의 절(折)과 바꾸지 않으려는 가난한 마음을 가진 탓이올시다.

연령(年齡)
나이는 서른 다섯이올시다. 인생(人生)은 칠십이라니 이쯤되면 반생(半生)은 착실히 살았나 봅니다. 틀림없는 후반기(後半期) 인생(人生)의 한 사람이지요. 허지만 아직은 백주(白晝) 대낮이올시다. 인생(人生)의 황혼(黃昏)을 조용히 바라볼 마음의 여우(餘裕0도 지니고 있읍니다. 소리 한가락 춤 한마당을 제대로 못 넘겨도 인생(人生)의 멋은 제법 아노라 하옵니다.

경력(經歷)
평생(平生) 경력(經歷)이 흐르는 물 차운 산이올시다. 읊은 노래가 한결같이 서러운 가락이올시다. 술 마시고 시(詩)를 지어 시(詩)를 팔아 술을 마셔--- 이 어처구니 없는 순환(循環) 경제(經濟)에 십년(十年)이 하로 같은 삶이올시다. 그리움 하나만으로 살아가옵니다. 오기 전 기다리고 온 뒤에도 기다림---묘막(渺漠)한 우주(宇宙)에 울려 가는 종소리를 들으며 살아 왔읍니다.

직업(職業)
직업(職業)은 없습니다. 사(詩) 못 쓰는 시인(詩人)이올시다. 가르칠 게 없는 훈장(訓長)이올시다. 혼자서 탄식(歎息)하는 혁명가(革命家)올시다. 꿈의 날개를 펴고 구민리(九萬里) 장천(長天)을 날아오르는 꿈, 욱척(六尺)의 수신장구(瘦身長軀)로 나는 한마리 학(鶴)이올시다. 실상은 하늘에 오르기를 바라지도 않는 괴롬을 쪼아먹는 한마리 닭이올시다.

재산(財産)
마음이 가난한 게 유일(唯一)의 재산(財産)이올시다. 어떠한 고나(苦難)에도 부질없이 생명(生命)을 포기(抛棄)하지 않을 신념(信念)이 있습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넘어질 사람이지만 폭려(暴力) 앞에 침을 뱉을 힘을 가진 약자(弱者)올시다. 패자(敗者)의 영광(榮光)을 아는 주검을 공부하는 마음이올시다. 지옥(地獄)의 평화(平和)를 믿는 사람이올시다. 속죄(贖罪)의 뇌물(賂物) 때문에 인적(人跡)이 드문 쓸쓸한 지옥(地獄)을 능히 견디어 낼 마음이올시다.

거짓말은 할 수 없는 사람이올시다. 참말은 안 쓰는 편이 더 진실(眞實)합니다. 당신의 생각대로 하옵소서 --- 고자일생(孔子一生) 취직난(就職難)이라더니 이력서(履歷書)는 너무 많이 쓸 것이 아닌가 하옵니다.


[참조문헌] 문화인물사료관(문화체육부. 2002년 6월 문화의 인물. 김인환 저), 조지훈문학관, 국회전자도서관, 포엠토피아(이상. 전자도서관). 민족백과대사전(한국정신문화원), 조지훈시연구(이원우, 성균관대석사논문. 1982), 조지훈 자연시에 구현된 형이상학(최승호. 서울시립대. 1994), 조지훈의 전쟁시연구(조기섭, 대구대. 1992), 시비를 세우면서 지훈을 생각한다(지훈시비 건립에 대한 대담. 고려대. 2006.10.16) 등 다수.

###조지훈 선생의 묘 찾아가는 길###

마석우리(심석학원)-마석교회(기독교)-오른쪽(마석연립 뒤편. 작은 운동장)-비닐하우스(작은 밭)-쓰러진고목-오른쪽능선-조지훈 선생묘(동산에서 마석역 방향).   

2002년 6월 문화의 인물로 선정 된 시인 조지훈. 

"늬들 마음을 무리가 알까(부제:어느 스승의 뉘우침)".  고려대 4.18의거에 조지훈 교수가 바친 시를 소천한 지 38년 만에 고대 교정에 세운 문학비. 2006년. 고려대 캠퍼스.

남산에 세운 시비. "파초우"

*글쓴이 한철수 편집위원은 시인이며, 구지옛생활연구소장을 맡고 계십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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