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만들기 4대째...뱃속부터 맺은 인연이 어느새 30년

"30년 넘게 북을 만지다 보니 이제 제 소리가 들리는 듯해"

겨울 햇빛이 따사롭게 느껴지는 우수(雨水) 날.  임시로 작업을 한다는 남양주시 오남읍 어내미 마을로 달려가 윤종국 선생을 만났다. 윤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인 악기장 후보다. 인간문화재가 되기 위한 마지막 단계를 밟고 있다. 5년 전 하늘의 부름을 받은 송산 윤덕진 선생의 장남 윤종국. 무엇보다 작년 10월 경기북부 이달의 문화의 인물로 선정 된 것은 그의 선친의 공적을 인정한 것이라며 작은 미소를 띤다.  (글쓴이 주)

4대째 북을 만드는 윤종국 악기장 후보

-요즈음은 7자짜리 대고 작업에 열중

보성녹차공원에 보낼 7자짜리 대고 작업.

그의 집안은 파평윤씨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36대 손으로 증조부 윤억판(尹億判) 때부터 북을 만들기 시작하여, 그의 할아버지 윤랑구(尹郞九), 선친 송산 윤덕진의 뒤를 이어 북을 만들고 있다.

공방에 들어서니 7자짜리 대북을 만들고 있어 각양각색의 원색안료들과 기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발 디딜 틈이 없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우리나라의 국보급 북들이 탄생했다는 말인가 말을 잠시 잊고 멍하니 서있는 순간  윤선생과 함께하는 훤칠한 용모의 동생 일권 씨가 인사를 건넨다.

지금 만드는 대고는 보성녹차공원에 세울 북으로 북퉁의 폭이 2미터가 훨씬 넘는다. 실로 그 엄청난 규모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려운 작업은 이미 마쳤습니다. 이제 가죽으로 북을 메우는 일과 단청만 남았습니다.” 

차를 내 놓으며 하늘을 보며 마시자는 그의 제안에 공방을 나와 새털구름이 수놓은 하늘을 보며, 그의 인생 역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5년 전 소천(所天)하신 아버지 뒤를 이어 4대째

그가 북과 인연을 맺은 것은 뱃속 부터다. 장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청년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30년이 넘었다. 늘 큰 나무였던 선친이 5년 전에 소천(所天)하시자 그 가업을 이어 인간문화재 후보 반열에 오른 것이다.

3대 송산 고 윤덕진 선생.

윤 선생 가족이 만드는 북의 종류는 24가지나 된다. 선친과 함께 시집을 보낸 북을 열거하는데, 미처 따라 적지 못할 정도이다. 대표적인 것이 민속촌의 대고, 청와대의 문민고, 종합청사의 신문고, 그리고 88올림픽 당시 한강을 가로 지르며, 올림픽의 시작을 알린 용고도 윤선생의 가문의 작품이다.

아버지 윤덕진 선생에 대해 묻자.

 “그저 엄하신 분이었죠. 어린 시절 가죽을 구하러 경기북부지역을 다녔다. 그때는 버스와 기차를 이용했는데….”

송산선생의 엄한 성품을 풀어 낸다. 요즘처럼 엄동설한에 젖은 가죽을 어깨에 메고 이동하기란…. 가죽의 독특한 냄새 때문에 열차 통로에 바람을 맞으며... 혹 가죽이 얼까봐 가슴에 보듬고, 이 눈치 저 눈치를 보고 공방에 도착하자 송산선생은 수고했다는 말 대신에 살얼음이 낀 가죽을 집어 던졌다.

 “이것으로 무슨 북을 만드냐.”

호통을 치셨다고 한다. 그렇게 엄한 스승 아래서 배운 윤 선생은 지금도 뜻을 이어 받아 차근차근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 

“어깨너머로 배우기 시작한 북만들기 작업이 어느새 30년이...  북의 마력에 빠져 손을 놓지 못하고 있다. 북쟁이가 된 이야기를 하려면 아버님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와 함께 전국의 사찰을 돌아 다녔는데, 불국사, 해인사, 통도사, 낙산사, 도선사, 신흥사, 봉암사, 백담사, 법흥사 등 전국 유명사찰의 법고(法鼓)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북은 인간의 가슴을 울리는 최고의 악기임에 틀림없다.”

긴 역로를 짤막하게 잇는다.그의 형제는 8남매다. 원래 북에 관심이 두지않은 장형과 누님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4형제와 자형 김연수씨가 북메우기 가업을 이어받고 있다.  아우인 신, 일권 두 동생은 포천에서 따로 공방을 운영하고, 막내인 권과 구리에서 전수소를 운영하고 있다.

-외도 아닌 외도의 길①...호동고와 낙랑고

시행착오 끝에 나온 호동고와 낙랑고.

그는 10여 년 전 엉뚱한 기획을 하였다.

크고 비싼 북은 일반인들이 소장하기에 버겁기 때문에 작은 북을 만들어 우리 전통북의 우수성을 알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북에 담아 우리의 정서와 작품에 승화를 시켰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소품을 만들어 ‘호동고와 낙랑고’라 이름 지었다.

“처음에는 시계, 자명고 등 여러 모형을 만들고 부수고하다가 지금의 작품이 완성되었다.”

-외도 아닌 외도의 길②...구리공예가협회 회장

작년에 발족한 구리공예가협회 회장직을 맡으며, 외도 아닌 외도를 걷고 있다. 그가 협회를 만들게 된 동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리시는 각 분야의 공예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가까운 남양주나 포천, 하남, 광주 멀리는 원주까지에 공방과 작업장을 만들어 떠나 구리시를 대표하는 장인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안타까웠기에 이 협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구리공예가협회를 알리기 위해 관내행사장에는 늘 그가 있다.

“여기까지 오기가 순탄치가 않았다. 일일이 만나 함께하기를 설득했고, 이제는 20여명의 회원이 똘똘 뭉쳐 서로 필요한 것들을 나누고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요즈음에는 회원들의 편안하고 안정된 작품 활동을 위해 법인 설립에 주력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앞으로 구리시만의 브랜드를 개척하여 구리시가 문화예술의 도시로 거듭나는데 작은 도움이 될 것이라며 회원들과 작업은 물론 상품개발, 판매망을 공유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숙원사업인 공예촌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잠시 꺼냈다.

-북을 만드는 작업은 ‘갖바치, 목수, 화가’

북은 세 가지 기술은 물론 또 하나의 경지를 넘어서야 탄생하는 종합 예술이다. 세 가지 기술이란 가죽을 다루는 갖바치, 나무를 다루는 목수, 단청을 입히는 화가를 말한다. 그리고 공정의 마지막 경지인 울림통을 통해 소리를 듣는 것으로 북메우기는 마무리 된다.

북은 갖바치,목수,화가의 손으로 만들어진다.

그 때 소리의 음(陰:둔탁한 소리)과 양(陽:경쾌한 소리)을 조율하는데, 북소리를 제대로 아는 귀명창이 되는 데에는 30-40년의 수련을 거쳐야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 30년 넘게 북을 만지다 보니 이제 겨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에게는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하나 있다. 우리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일구는 작업으로 ‘통일고(統一鼓)’를 만드는 것이다.

“남북의 지도자들은 물론 북의 몸체인 소리통에 통일의 염원을 담은 글을 각인하여 한소리로 울리게 하는 것”

그의 눈은 빛났고, 입가에 경련이 이렀다. 그렇다. 이념도 불행한 과거도 한꺼번에 날릴 수 있는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북소리로 우리민족이 하나 되는 꿈도 꾸어본다.

윤 선생 일가의 북 만들기 역정을 들으면서  “인생은 짧고 예술의 세계는 길다.”라는 것을 새삼 읊조려본다.

####북을 만드는 과정####

나무고르기

나무다듬기

북통만들기

가죽다듬기, 이 전후 과정을 를 '북을 메우기'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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