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벌거숭이 임금이 없어야...

▲ 한철수(편집위원)
서울 소재 한 중학교 졸업생 중 몇 몇 아이들이 벌거벗은 채 교정은 물론 거리를 활보한 일이 있었다. 며칠 후 지방의 모 대학에서는 군 훈련소에서나 있을 법한 알몸 오리엔테이션을 재미삼아 했다고 말한다. 이는 자유가 아니라 방임이다.

어린 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벌거숭이 임금님'이 생각난다. 마음 착한 사람에게는 보이는 옷감으로 옷을 만든 재단사. 임금은 훌륭한 옷이라 칭찬하고 그 옷을 자랑하기 위해 거리행진을 할 때 아무도 임금이 벌거숭이라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천진한 어린아이가 던진 한 마디 "어! 벌거숭이네".

여기서 알몸과 벌거숭이는 작은 차이가 있다. 알몸은 왠지 추잡하고 비도덕적으로 느끼지만 벌거숭이는 귀엽고, 아이스럽게 들린다. 물론 옷을 벗었다는 의미는 같지만 어감은 달라보인다.  벌거벗은 임금이 거리를 행진할 때 모두 입을 닫았듯이 학교 관계자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벌거숭이 나라에 와 있는 느낌이다. 

규제받고 답답한 학교생활에서 잠시 자유를 느끼고자하는 그들을 이해를 못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일률로 거행되는 졸업식. 성적위주로 내세운 주인공, 들러리 남은 불특정 다수의 아이들로 확연히 나눈 현실에 대한 반항은 아닐까 자위한다. 

벌거숭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보는 이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을 힐난하고 질책하지만 '재미삼아', '전통인데 뭐', '우리만 그런가' 등 아이들의 주장을 그냥 야단만 칠 사안은 아니다.

현대식학교가 생기기 전 서당에서 아이들이 책을 한권 뗄 때마다 부모는 스승과 학동들을 위해 떡을 만들어 함께 나누며 즐거워했고, 서당 학동들이 함께 떼었다면 마을잔치를 열고, 다음에 공부할 책과 문방사우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아이들의 졸업을 과거 서당에 비정한다는 것은 괴리는 있지만 학교와 부모들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미덕을 현실에 접목시키는 것도 좋을 듯하다.

길게는 6년 짧게는 3년간 자신을 가르친 스승에게 큰절을 하고, 스승은 고생한 아이들에게 반절로 답한다든지, 타임캡슐을 만들어 교정 한쪽에 보관한다든지, 작은 예술제를 연다든지... 생각을 달리하거나 눈을 돌리면 아이들에게 충분히 건전한 재미를 줄 수 있는 꺼리는 많다.

졸업을 하고 떠나보내는 아이들이 벌거숭이가 되어 거리를 떠들썩거리게 해도 '졸업생들에게는 학교생활규범으로 규제할 어떤 방법이 없다' 라 한 교육자의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졸업에서 입학까지의 20여일 분명 그 아이들을 책임졌던 학교에서 맡아야함이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이는 정도로 가는 대다수 스승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공교육의 붕괴는 바로 이러한데서 기인한다. 이런 담담한 교사가 계속 존재한다면 아이들은 또 벌거숭이가 되어 거리로 나올 것이다.

그 아이들이 이제 며칠 후면 진학하여 상급학교로 갈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롭고 적응하기에 어색한 아이들에게 긴장을 풀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입학의 잔잔한 기억이 교정을 나설 때 아쉬움으로 뒤돌아보게 하는 그런 학교와 스승이 많았으면 하는 생각이 앞서는 우수지절(雨水之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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