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호(작가)
이미 30여 년이 훨씬 지난 어느 무더운 여름날의 일이다. 우연한 기회에 가나안 농군 학교를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당시 가나안 농군학교는 경기도 광주의 어느 산 속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선 학교 정문을 들어서자 길 바로 왼쪽 밭에서는 젊은 아낙이 혼자 땡볕이 내려쪼이는 밭에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밭을 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인상적인 것은 견학을 온 우리 일행들이 그 곁을 소란스럽게 떠들며 지나가고 있는데도 그 아낙은 고개 한번 들어 쳐다보지도 않고 오직 부지런히 밭을 매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우리는 맨 먼저 강당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가게 되었다. 말이 좋아 강당이지 흙벽돌로 교실만한 넓이로 지은 허름하기 짝이 없는 단층 건물이었다. 강당 벽에는 이 학교의 교장인 김용기 목사가 그동안 받은 막사이사이상을 비롯해서 2백여 개나 되는 각종 감사장과 공로장이 담긴 액자가 빼곡하게 걸려 있고, 또한 8절지 정도 크기의 양면괘지에 각양각색의 굳은 결심과 의지가 적힌 혈서들이 온통 더덕더덕 즐비하게 부착되어 빈틈이라고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곧 이어 김용기 목사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는 먼저 가나안 농군학교의 설립 동기와 연혁, 그리고 현재의 활동 상황과 업적과 가족에 대한 근황도 오랜 시간에 걸쳐 자세히 설명해 주었는데 강의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았다.

가나안 농군학교는 우선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도무지 농사라고는 지을 수 없는 황무지만을 골라서 그곳에 정착을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황무지가 된 땅이 기름진 옥토로 변할 때까지 개간하면서 농사를 짓다가 그 황무지가 기름진 옥토로 개간되면 다시 황무지를 찾아가서 다시 개간하는 일을 반복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전국에 산재해 있는 황무지를 비료가 아닌 퇴비를 많이 사용하여 기름진 땅으로 이룩해 놓은 일이 그 학교 설립의 첫 번째 목적이라고 하였다.

수십만 평이나 되는 드넓은 농장, 그 농장은 오직 김용기 목사의 가족과 이제 막 교도소에서 출소한 갈 곳 없는 젊은이들이 모여 함께 숙식을 해결하면서 운영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치고 함께 땀흘려 일하면서 말 그대로 자급자족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설명을 듣고 보니 벽에 부착되어 있는 혈서들은 교도소에서 출소한 젊은이들이 이제부터는 사회의 새 사람이 되겠다는 굳은 각오와 결심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이 쓴 혈서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이 농군학교에 가서 들은 이야기 중에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 학교 내에 생활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실천하고 있는 그들만의 생활 양식이었다.

그 학교에서 함께 생활을 하려면 누구나 모든 행동을 함에 있어서 항상 ‘3’이란 숫자를 반드시 지키지 않으면 결국 퇴교조치를 당하고야 마는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즉, 세 걸음 이상 걸을 때는 반드시 뛰도록 한다. 화장실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사용할 때, 30센티 이상 쓰지 마라. 세수를 할 때 세숫비누를 세 번 이상 문지르지 마라. 아기를 낳았을 때에도 3일만 쉬고 그 다음날부터는 일을 해라. 3시간 이상 일을 하고 밥 한 그릇을 먹어라…… 등, 항상 ‘3’이란 숫자를 명심하고 일상생활을 해야 하므로 웬만한 사람들은 단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도망을 가거나 가차없이 퇴소를 당한다고 하였다.

또한 우리들이 학교 정문에 들어설 때 혼자 밭에 앉아 열심히 김을 매고 있던 젊은 아낙은 김용기 목사 맏며느리인데 이화여대를 졸업한 여성이라고 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당시 큰아들은 육사출신의 현직 장교로 복무중인데 시집을 온 며느리마다 너무나 엄격한 농군학교 의 규범 때문에 불과 몇 달을 견디지 못하고 번번이 도망을 가곤 하는 바람에 아까 그 아낙이 이미 세 번째 며느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현재 며느리도 얼마나 견뎌낼는지는 두고 봐야 하겠다고 하였다.

김용기 목사는 이어서 큰아들의 자랑도 덧붙여 늘어 놓았다. 장교인 큰아들은 매달 월급을 받으면 월급 모두를 아버지에게 맡긴다고 하였다. 그리고 용돈이 필요할 때마다 아버지에게 승낙을 받고 쓴다고 하였다. 그래서 월급은 단 한 푼도 아버지 모르게 쓰는 일이 절대로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아들이 이발을 하겠다며 아버지에게 백 원을 달라고 하였단다.

그 당시 백 원이라면 시골에서 가장 싼 이발요금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때 아들은 백 원보다도 더 싼 50원짜리 이발을 했다며 거슬러 받은 이발료 50원을 아버지 앞에 도로 내놓았다고 하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인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란 말이 있다더니 문득 숙연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은 날이 갈수록 어딜 가나 이구동성으로 경기가 안 좋다는 말들로 시끌벅적하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데, 그리고 옛날보다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는데 실제 상황은 그렇지를 못하다. 부푼 꿈을 품고 대학을 졸업한 졸업생들은 졸업을 하자마자 직장을 구하지 못해 길거리로 내몰리고 직장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도 언제 쫓겨날 지 모르는 불안과 바짝 긴장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어찌 된 일인지 한편에서는 늘 사치와 낭비를 일삼으며 흥청망청인 것이 오늘날의 현실인 것 같다.

과거 근면, 검소, 저축을 외치던 그 어렵던 시절이 왠지 자꾸만 그리워짐은 무슨 까닭일까. 이제부터라도 나라의 경제가 이토록 곤두박질을 하고 있다고 한탄만 하지 말고, 비록 가나안 농군학교만큼은 못해도 그 학교의 근면성과 부지런함을 어느 정도는 따라가야 하겠다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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