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등재 앞둔 동구릉, 홍유릉을 돌아보다

들뜬 마음을 정리하는 설 연휴 막바지. 새로운 마음을 다지고 일상을 준비하고 있을 깊은 겨울 밤. 3대 공중파 방송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국보1호 숭례문 누각이 처참히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저 가위에 걸린 듯 '저를 어째...' 외마디 밖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 날 초동진압이 어떻고, 매뉴얼이 저떻고, 우리는 최선을 다했느니, 너희에게 문제가 있느니... 그야말로 무너져 내린 국민의 자존심을 아예 밟고 지나가는 소리들만 하고들 있으니 답답함은 이를 때가 없었다.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생각하다

나흘이 지난 시간. 잠시 문화재란 무엇인가 작은 생각에 빠져 본다. 문화재란 '인류 문화활동의 소산으로서 예술·과학·종교·도덕·법률·경제·민속·생활양식 등에서 문화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사전은 풀이를 하고 있다. 문화재는 각 민족이 유구한 세월 속에 지닌 민족성과 그 민족들이 공유하여 지금까지 면면이 이어온 정신적 재산을 말한다. 그 가치로 보면 국보, 보물, 사적, 무형적재산으로서 국가적인 자존심은 물론 마을 어귀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석장승이 던지는 마을의 자존심으로 버티는 것은 그들이 자리에 있고, 우리를 지켜주므로 안위가 되기 때문이다. 한사람의 멍청한 짓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쓰린 마음을 부여안는다.

이젠 구리남양주도 숭례문의 비보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 어제 오전 홍유릉 주변에 소방헬기가 날았고, 구리시지(九里市誌)와 남양주시지(南陽州市誌)를 펼치며, 가치에 따라 나란히 줄서 있는 우리의 문화재를 손으로 짚으며 살펴본다.

내친김에 오늘 동구릉과 홍유릉을 다녀왔다. 과연 그들은 안녕하신지 국가사적(史蹟)으로 화마의 대비는 어떤지 살펴보았다.

-구리남양주는 조선왕조 최대 왕릉군

우리는 옛부터 조상의 슬기와 업적을 중요시 여기며 역사와 전통을 연구발전시켜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가운데 왕조의 치적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와 더불어 1980년대부터 불어온 왕릉과 그 일가의 만년유택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 되면서 그 실체는 드러나기 시작했다. 구리남양주는 그야말로 조선조 왕릉은 물론 조선조를 개국한 이성계의 건원릉을 시작한 왕릉군과 고종·순종의 황제릉 마지막 황태자 영왕의 묘까지 이르는 왕릉의 모든 형태를 두루 느낄 수 있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왕과 정비·계비의 무덤이 능(陵)이며, 후궁·세자(비)의 무덤을 원(園), 후궁·왕자·공주·대원군의 무덤을 묘(墓)라 한다. 하지만 당대의 업적의 판단에 따라 왕의 무덤을 능이 아닌 묘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든다면 광해군은 왕이었지만 광해군 묘로 부른 경우가 대표적이다. 우리지역에는 14곳의 능(광해군묘 포함)에 26명의 왕과 왕비의 능과 인조의 생모 인빈 김씨의 순강원, 정조의 후궁으로 순조를 생산한 수빈 박씨의 휘경원,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 부부의 영원, 흥성대원군의 흥원 4개의 원과 명빈묘, 효빈묘, 성묘, 임해군묘, 안빈묘, 영빈묘, 임해군, 복성군 등 왕실가족의 묘가 14개나 있는 문화적 보고이다.

-동구릉을 돌아보다

동구릉은 구리시 동구동 산2번지 일대에 약 60만 평을 헤아리는 넓은 숲속에 위치한다. 조선왕조의 능제는 풍수지리에 따라 주산을 뒤로 업고 중간허리에 봉분을 좌우에 청룡·백호를 남쪽 먼 곳에 안산을 바라보는 것이 표준형이다. 조선왕조 능 조영의 기초가 된 건원릉은 고려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묘인 정릉과 현릉을 기초로 만들었다. 규모는 태종6년(1406)에 정한 (능침보수법)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이는 후한 광무제의 원릉산(原陵山)의 사방 323보를 반으로 줄인 161보로 하였고 건원릉에는 총 6천명이 동원되어 능을 만들었다. 고려 때 즐겨 세운 신도비는 5대 문종이 자신의 능에는 거부해 이후 세우지 않아 건원릉에만 있다. 또한, 현실도 세조의 광릉 전까지는 돌로 쌓았으나 이후 회다지(회격/灰隔)로 바뀌었다.
한국전쟁에 불에 타고 1995년에 복원한 혜릉의 정자각.
건원릉의 봉분에는 갈대를 입혔는데 이는 이성계의 유지에 따라 고향인 함경도 영흥에서 공수한 흙에서 갈대씨가 자랐다는 설과 능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왕조의 능의 기초인 건원릉을 중심으로 일반적인 상설은 봉분의 뒤쪽에 담장을 양옆에 곡담을 봉분에는 12각의 호석(護石·屛風石)을 둘렀으며, 바닥에는 판석을 깔아 봉분을 보호한다. 봉분 좌우에는 호랑이석과 양석을 2쌍씩 배치하였고, 이는 능을 수호하는 벽사의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앞쪽에는 혼유석·망주석·장명등이 문인석·무인석이 두 쌍, 말석을 한 쌍씩 배치하였다.

부속시설은 비각·정자각·어도·수복방이 있으며, 능입구에는 신성한 곳임을 표시하는 홍살문이 있다. 동구릉에는 9릉 17위의 왕과 왕비의 능이 있다. 건원릉(태조 이성계), 현릉(문종과 비 현덕왕후), 목릉(선조와 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 휘릉(인조의 계비 장령왕후), 숭릉(현종과 비 명성왕후), 혜릉(경종의 비 단의왕후), 원릉(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경릉(헌종과 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 수릉(추존왕 익종과 비 신정왕후)가 묻혀있다. 건원릉을 비롯한 아홉 개의 능은 1970년 5월26일 사적 193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화마에서 동구릉을 지키는 초기진압용 소방오토바이. 홍유릉에도 한 대가 있다. 
-황제의 능, 홍유릉을 돌아보다

홍유릉은 남양주시 금곡동 산 141-1번지 일대에 약 40여 만 평의 동산 안에 있다. 홍유릉은 여는 왕릉들과 그 모습이나 형식이 많이 다르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연호를 ‘광무’,왕을 “황제”라 일컬었던 만큼 중국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능인 효릉 본떠 만들었다. 다시 한 번 짚어보다면 홍유릉은 왕의 능인 왕릉이 아니라 황제의 능이다.

 홍유릉은 홍릉과 유릉을 말하는데, 홍릉은 조선조 26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유릉은 27대 순종황후와 계비 순정황후의 능이며 뿐만 아니라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인 이은의 부부와 2005년 작고한 황태자 이구의 묘도 함께 누워있는 조선조 마지막 황실의 비운의 가족사를 담고 있는 곳으로 사적 제207호로 지정 보호관리하고 있다.

-황제릉은 어떻게 꾸몄나

황제릉 홍릉의 배치도.

홍유릉 정문을 지나 정원을 지나면 홍살문이 보인다. 홍살문 건너편에는 웅장한 건물이 나타나는데, 바로 침전(寢殿)이다. 일반 왕릉에서 의 정자각(丁字閣)과는 그 규모나 건물의 모양이 다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일자형 건물이기 때문이다.

침전을 기준으로 봉분에는 3면의 담장을 세웠고, 봉분아래 부분은 일반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병풍석과 돌난간을 12방위로 돌렸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과 향로석을, 혼유석 앞에는 망주석과 장명등을 세웠다.일반 왕릉에 보이던 양과 호랑이 돌상이 보이지 않고, 향로석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무석과 마석(馬石)은 침전 앞에 두었고, 산신제석과 소대를 뒤편에 두었다.

침전 오른쪽에는 비각과 수복청을 설치하였고, 비각과 봉분 사이에는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제수를 정리하거나 화재에 대비하여 설치하였다. 침전 왼쪽 조금 떨어진 곳에는 재궁(齋宮=御齋室)이 있다. 이렇게 상설한 것은 망자(고종)가 평소에 생활하던 경복궁처럼 꾸몄기 때문이다.

고종이 죽어서도 후세를 지켜주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침전 내부에는 침상을 두었다. 그러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비단 침전만은 아니다. 침전에서 홍살문까지 이어주는 돌길인 ‘참도(參道)또는 어도(魚道)’를 따라 좌우에 나란히 돌상도 그렇다. 일반 왕릉에서는 봉분 앞에 세운 반면에 홍릉은 침전 앞을 두 줄로 호위하듯 서 있어 더욱 인상적이다.

침전 앞에서는 ‘문무석-기린-코끼리-해태-사자-낙타-말’ 순서로 세웠다. 코끼리는 우리가 일상에서 보던 모습이라 쉽게 알아보겠고, 낙타 또한 등에 달린 혹으로 짐작하겠으나, 기린은 목이 길지도 않고, 사자 또한 갈기를 세운 용맹스런 모습을 상상하면 오산이다. 해태 또한 우리가 자주 대하던 모습과는 순서가 구분되지 모습으로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기린, 해태, 사자는 상상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建元陵)아래에 돌상은 ‘양, 호랑이, 말’ 등 친숙한 동물을 배치하였으나 홍유릉에는 상상의 동물과 현존하는 동물을 함께 두었기에 표현의 우수성을 떠나 민속적, 미술적 가치는 더하다.

-동구릉, 홍유릉의 방재시설을 살피다.

장황하게 동구릉과 홍유릉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두 곳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잠시라도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숭례문의 비보를 계기로 조선왕조의 또 다른 상징인 왕릉의 방재시설은 살펴보고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초기진압용 쇠칼구리.

동구릉을 비롯한 조선왕릉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등제를 기다리고 있다. 구리남양주와 수도권일원에 산재한 조선왕릉들은 이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남을 날이 머지않았다.

홍유릉에 설치한 어정 화재를 대비해 설치한 우물로 조상들의 지혜가 덧보인다.

동구릉은 정자각, 비각, 재실을 포함하여 목조건물이 20동이 있으며, 26명의 직원이 상주하고 하고 구성원은 공무원 4명, 공익 5명, 관리 7명, 기타 10명이다. 목조건물을 화마에서 지켜주는 것은 소방오토바이 1대와 70개의 소화기(분말)와 쇠갈퀴, 삽 등이 전부다.

소화기는 건물 당 3~4대를 배치했으며, 앞으로 2대씩 늘릴 예정이다. 소방오토바이는 초기진화용으로 3분정도 사용하면 바닥이 드러난다. 사각지대인 숭릉, 목릉과 주요시설에 그나마 CCTV를 설치해 조금은 안심이다. 구리소방서에서 동구릉까지 진입하려면 최소 5분에서 10분정도 소요된다.

목조건물의 설계도는 관리소, 구리시청, 구리소방서가 공유하며 소방헬기는 용인에서 출동준비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남양주시에 산림감사용 헬기가 있어 만약을 대비하고 있다고 한다. 동구릉에 화재로 인해 소실된 건물은 많은 전쟁을 치렀음에도 6.25 동란 때 불에탄 혜릉의 정자각이 전부이다. 그것도 40여 년이 지난 1995년에 복원되었다. 정자각 하나를 복원하는데 5억 정도가 소요된다고 하니 그 가치를 새삼 느끼게 된다.

홍유릉은 부속건물을 포한하여 15개 동의 목조건물이 있다. 홍유릉은 30명의 요원이 지키고 있는데 공무원3, 일용직 16, 공익 11 명이다. 소화기는 36개를 배치했고, 예비로 소화기가 22대나 있다. 그곳에도 역시 소방오토바이가 1대 고작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방서가 바로 옆에 있어 2분이면 도착한다.

동구릉과 달리 출입문에 소방차가 출입이 불가 해 벽의 한 켠을 소방문으로 만들어 만약의 사태에 준비하고 있다. 홍유릉 주변 사각지대에는 그 흔한 CCTV가 한 대도 없다. 홍유릉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약수터까지 이어지는 산책로 가까이에 있는 영원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다. 남양주시에서는 약수터산책로 주변이라도 감시장치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구리남양주의 명소 동구릉과 홍유릉은 일 년에 두 차례 소방훈련을 실시하며, 유관기관과 치밀한 유대관계를 갖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유릉의 목조건축물 재실.
-사적지 현실에 울화가 치밀다

관계자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문득 공중파방송에 나와 자랑스럽게 "목조건물은 방화를 하지 않는 한 안전하다고." 이야기한 문화재청 한 공무원의 이야기가 떠올라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홍유릉은 황제릉으로 석물자체가 남다르다.
수도권의 능원에서 소화전을 설치한 예는 서오릉 익릉 앞에 설치 한 100m짜리 소방호수가 고작이란다.

우리나라 사적지에서는 그 흔하디흔한 경보시스템, 자동감지장치, 스프링클러는 언감생심이다. 꿈도 꾸지 말아야한다. 2020년까지 장기프로젝트가 실현되기까지는. 동구릉과 홍유릉이 왠지 가련하고 초라해 보인다. 수도권의 조선왕릉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준비하고 있으나 문화부와 문화재청에서 전국에 있는 왕릉을 포함한 사적지의 총 보험료가 400억 정도며, 그것도 목조건물에 한한다. 수백년 조선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온 고령수들은 아예 포함도 하지 않았다.

구리남양주시는 조선시대 최대의 왕릉군임을 자랑만 할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안전을 보장해주어야 그 가치는 더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목조건물을 극찬한 한 외국인의 말로 글을 닫는다.

"중국 전통 건축물은 '나는 이렇게 부자고 힘이 세다. 너는 뭐냐' 하는 오만한 느낌이다. 일본 전통 건축물은 너무 깔끔해서 정이 없다. 한국은 다르다. 건물 전체의 부드러운 흐름이 '어서 내게 오세요' 손짓하는 것 같다."

동구릉 홍유릉은 오늘도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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