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문예대학은 불혹의 나이에 시인의 길을 가게 한 고마운 인연

 
유년시절 아버지의 역사이야기가 문학의 모태
고교시절 문학동아리 '백합'을 만들기도 해
문학은 삶의 바다, 인생의 최상의 동반자


지난 1월 3일 발표한 경남일보 신춘문예에 시부문 당선된 오자영 시인을 만나본다. 오시인은 토평초등학교 교사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의 길잡이를 하고 있다. 오 시인의 문학적 잠재력을 일깨워 준 것은 구리문인협회에서 주관한 구리문예대학에서 수학하고 시인의 길을 걷게 한 고마운 인연이라고 소회한다. 오자영 시인의 삶과 문학을 함께 나누어 본다.<글쓴이 주>

먼저 신추문예 당선을 축하한다. 지금 거주하는 곳은?
-남양주시 호평동에 살고 있다. 고개 들면 마음껏 천마산과 백봉산을 올려다볼 수 있어 좋고, 주말마다 능선을 탐할 수 있어 더욱 살기 좋은 곳이다.

유년시절 오시인의 모습과 특별히 기억나는 성장배경은?
-사람들은 저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의 파편들을 안고 살아간다. 가령 만석군 집안이 몰락해가는 과정을 파노라마처럼 펼칠 수 있는 기억 같은 그런….

1963년 대구시 동구 봉무동 팔공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예닐곱 살까지는 남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렸던 것으로 안다. 집안에 감나무가 수 십 그루 있을 정도였고, 허드렛일 하는 사람들이 여럿 수발을 들던 기억한다. 초등학교 들어갈 즈음 폭삭 망한 집안은 가족들을 도시의 변두리로 내몰았는데, 그 후 아버지는 병을 얻어 일어나질 못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늘 방안에 누워있어야 했던 아버지는 나에게 이야기 들려주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것 같다. 주로 역사이야기였는데, 고조선, 삼국시대, 건국신화에 나오는 세부적인 이야기였다.

학교 다녀와서, 혹은 고즈넉한 밤에 온가족이 한 방에 누워 들었던 환웅, 동명성왕, 삼국지, 톨스토이의 단편 등의 이야기는 환상이며 꿈이었다. 자칫 우울해지기 쉬웠던 어린 소녀의 눈에는 이야기 잘하는 아버지가 최고로 보였고 나름대로 이야기를 덧붙이거나 상상해서 꾸며 쓰기도 했다. 간혹 친구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달하면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손뼉을 쳤고, 공책이니 샤프, 손수건 등의 물건을 건네주기도 했다. 당연히 나의 장래희망은 작가, 아니면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의 유년 시절은 답답함과 광활함이 공존하면서 약간 우울함이 뒤섞인 코발트빛을 띠었다고나 할까.

꿈 많던 청소년시절의 오 시인의 모습과 당시 읊조렸던 시나 문학적 영향을 준 작품은?
-별로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했던 것 같다. 중학교 때는 국어담당 오명자 선생님을 도와 학교 교지를 만들기도 했고, ‘백야’라는 문학동아리에 참석하기도 했다. 지금 대구에서 활동하고 계신 박곤걸 시인님이 영남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백야’문학회 지도를 하셨는데, 고등학생과 대학생들 틈바구니에 끼여 흥미롭게 참석했다. 그러나 너무 어려 따돌림 당하기 일쑤였던 나는 시간이 맞지 않는다는 핑계로 1년도 안되어 그만두고 말았다.

선생님 몰래 '라스트콘서트, 닥터지바고, 로미오와 줄리엣’등의 영화를 보러갔다가 들켜 발바닥이 불나게 맞은 적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오후 내내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전읽기에 심취하기도 했다. 하루는 학교도서관 구석에서 구운몽, 사씨남정기, 양반전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아차 싶어 주위를 돌아보니 저승사자처럼 서있는 책장 사이에 나만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것이었다.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사서가 문을 잠근 채 퇴근을 해버린 거다. 다행히 도서관과 숙직실 사이에 거리가 멀지 않았기 때문에 소리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 때는 ‘백합’이라는 교내 문학동아리를 만들어 시화전에 참석하기도 했다. 학교축제 때 YWCA건물에서 전시회를 하게 되었는데 ‘三生記’ 라는 나의 시화를 두고 남학생과 대판 싸운 적이 있다. ‘三生記’가 어떤 시였는지 원본은 없지만 지극히 실험적인 시였던 것 같다. 작품 앞을 여러 번 서성이던 한 남학생 왈 “이게 무슨 시야? 아예 공상소설로 쓰시지.” 하는 거다. 옆에 있던 다른 남학생들도 “지가 무슨 이상인 줄 착각하나본데.” 하며 거들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구겨졌던 나는 언성을 높여 내 시를 대변했고, 삿대질과 발구름으로 맞섰는데…. 그 때 마침 둘러보러 오신 교감선생님께 실컷 혼나고 자장면 얻어먹은 기억이 난다. 청소년기의 이런 자잘한 문학 활동들이 내가 시를 쓰게 된 밑바탕이 되지 않았나 여겨질 때가 더러 있다.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나오는 John Danne의 기도문을 좋아하다가 책상머리에 써 붙이게 되었는데, 그것이 청소년기의 내 좌우명이었고 지금도 가끔씩 떠올려본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John Danne

어느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하나의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
만일 흙 한 덩이가 파도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 대륙은 그만큼 작아지며,
만일 모래톱이 그렇게 되어도 마찬가지며,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땅이
그렇게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는 사람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 이를 알기위하여
사람을 보내지는 말지니
종은 바로 그대 자신을 위하여 울리나니….

살면서 문학이 오시인에게 준 영향은?
-문학은 내 삶의 바다에서 만나게 된 최상의 동반자. 등대의 불빛 같은 존재라고 할까. 가장 힘든 시기에 시를 다시 만나 지친 일상을 토해 놓을 수 있고, 허름한 나를 송두리째 들어내고 진솔한 나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곳. 그것이 문학이요 시의 세계라는 것. 문학이 내게 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문학으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반문도 해본다.

중년의 나이에 문학에 입문한다는 것은 무척 뜻있는 일이다.  뒤늦게 문학에 입문하게 된 동기는?
-1988년 9월부터 2002년까지 경북 문경과 구미에서 초등학교 교편을 잡고 있었다. 미래의 우리 아이들 교육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열정적으로 달려들던 시절, 2002년 가을 돌연 교직생활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갑갑했고 아이들을 바르게 이끌어야하는 교사라는 직업 자체가 심리적, 정신적 부담으로 느껴지면서 사직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주변에서는 다들 미쳤다고, 왜 그러냐고. 그 좋은 직업을 헌신짝 버리듯 한다고….

그 당시 여동생이 송파구 쪽에 살고 있었는데, 둘이 무엇인가 벌여보자며 서울로 올라오라고 재촉했다. 무작정 시작한 서울생활은 구리 토평에서 이루어졌는데, 동생과 함께 웨딩스튜디오를 운영해보겠다고 일을 벌였지만 계약금만 날리고 말았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하는 진리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일을 그르친 여동생은 말레이시아로 떠나버렸고 극도의 외로움 속에 버려진 나. 눈만 뜨면 시내버스를 타고 강변역까지 갔다고 되돌아오곤 하는 무의미 속에 갇혀버렸다.

그러던 2003년 봄, 우연히 차창 밖으로 보이는 ‘구리문예대학 개강’ 플랜카드를 보고 나도 모르게 1기생으로 신청하게 되었다. 고독에 몸부림치던 나에게 문학의 감각을 굼틀거리게 만들어 준 구리문예대학, 불혹의 나이에 시인의 길을 걷게 해준 고마운 인연이었다.

문학의 길을 걷는데 영향을 준 은사(선배) 문인은?
-직접적인 영향을 주신 분도 계시고 늘 곁에 있으면서 간접적인 영향을 주는 분도 계시다. 지금 대구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 박곤걸 선생님이나 국제펜클럽 이사장님이신 문효치 선생님은 내 시의 길을 열어주신 고마우신 스승님이시다. 학교 다닐 때 좋아했던 유치환, 서정주, 김수영, 김남조 시인님은 시의 눈을 뜨게 해준 분들이라 생각된다. 국내외 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토지"를 여러 번 반복해 읽을 정도로 박경리 선생님을 좋아했고 "태백산맥, 한강"의 소설가 조정래 선생님도 존경하고 있다.

평소 오시인에게 영향을 준 시인이나 애송시가 있다면 그리고 가장 닮고 싶은 시인은?
-가끔 나도 모르게 서정주 "귀촉도", 문효치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황동규 "즐거운 편지", 정호승 "수선화에게"등의 시를 자주 읊조리게 된다. 그게 애송시를 부르는 습관 같은 거 아닐까생각한다. 최근에는 장석남, 함민복, 이정록, 박성우 등 중진시인들의 작품을 눈여겨 읽고 있다. 가장 닮고 싶은 시인은 있다면 작년에 시낭송회에서 처음으로 김남조 시인님을 뵈었다. 책이나 TV로만 접하다가 직접 만난다는 설렘으로 잠을 설치기도 했다. 불편한 몸으로 참석하셨지만 시인으로 사는 방법을 강연하실 때는 나도 모르게 울컥 감동이 밀려왔다.

한 삼 십년 후면 나도 저 시인처럼 저렇게 시인다운 면모를 갖추고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하는 생각을 가졌다.

이번 경남일보신춘문예 심사평을 보면, 여자의 욕망과 그 소멸에 대한 작품으로 눈에 띄었다고 한다. 오 시인이 화자로서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특별한 메시지가 있다면?
-시는 일단 시인의 손을 떠나는 그 순간 독자의 몫이 된다고 본다. 시적 화자를 어떤 식으로 만나고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은 읽는 사람에게 남겨주고 싶은 마음이다. 2006년 등단작이었던 "연변여자" 또한 그러했으며 앞으로의 시작업도 그렇지 않을까. 다만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여자들 -얼마 전 폐렴으로 쓰러져 병상을 지키고 있는 어머님이나 이국으로 시집와 밝게, 혹은 어둡게 살아가는 사람들, 화려하거나 혹은 초라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여자들, 나 자신도 포함된- 의 삶을 다독거려주고 끌어안아주고 싶을 뿐이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문학동아리는?
-시정(詩亭)문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매주 1회 모임을 가지고 신작시 발표, 합평, 낭송회 등을 갖는데 훌륭한 선배 시인들과 동인들이 있어서 행복하다. 또 작년 가을부터는 계간지 '미네르바'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발표한 오자영 시인의 신작시 '진주'와 '두물머리' 두 편을 소개한다.

 진주 

집으로 들어간다

오래 묵어 투명해진 밀어를

여의주처럼 입에 물고

파도의 체증으로 인해

진저리치는 거리를 지나

칼바람에 찔린 자국은

곡소리를 내기도 하면서

 

바다를 떠돌던 은빛 눈동자

포근하고 유일한 안식처를 찾아

제 몸을 헐고 아린 밤하늘

사랑의 점액질 속

장밋빛 알약 같은 희망을 잉태한다

마음 따뜻한 자궁의 집에는

어린 눈망울들이 곰지락거리며

동그란 파문을 던지고 있다

눈물 머금은 그 빛깔이

사람의 窓에 깊이 박히기를 기다리며

 

해변을 거니는 여자 몸이 반짝인다

그녀의 집에 진주가 자라고 있음이다

 

두물머리

어둠이 수면을 비집고 들어가

길을 찾는다

고요하고 따스한 별 흩뿌려진 봄길

잠 속에서 배회하던 조각달은

바람의 꼬리처럼 희미하다

 

강바닥에 거꾸로 선

형형색색 네온사인 속을 들여다보면

흔들리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서

물과 바람을 흔들고 있다 밤이 든다

동강난 가슴 추스르듯

청둥오리 무자맥질이 시리다

 

조금만 더 들어가 보자

계수나무 우거진 곳

네가 기다릴 지도 모르는 그 쯤

내 그림자 누이고 밤을 새우다 보면

물안개 헤집고 불현듯

네 눈동자, 밀려올 지도

 

길 잃은 조각달이 서성이는 곳

언제 채워질지 모르는 두 허기가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가슴 엉키며 만나 새벽을 낳고

비단 같은 만삭을 풀어놓고 있다

오자영 시인의 약력

󰋪 본명 : 오영숙
󰋪 대구 출신, 대구교육대학교 졸업
󰋪 2006년 가을호 "PEN문학" '연변여자'공모 당선
󰋪 메일주소 : ysoh0809@hanmail.net
󰋪 현재 경기도 구리시 토평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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