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기다리는 '님' 그리고 '침묵'

시를 통해 저항과 탈식민주의 주창
3.1 만세운동 주역 33인 중 변절하지 않은….
묘지번호 204411번은 이승에 남긴 번뇌이다

만해 한용운

최서해를 만나고 중랑구를 경계를 거쳐 한달음에 광진구 경계에 선다. 구리시로 되돌아오는 산책로를 따라 서광조, 장덕수, 조봉암을 거쳐 만난 만해 한용운(韓龍雲)의 문학비가 후배 문인들을 반긴다.

만해(卍海). 그를 어찌 함부로 논하겠는가. 하지만 죽은 이와 우연한 만남인 사자후(死子逅)이니 그의 '침묵' 속에 담긴 실천하는 불교와 그를 침묵으로 빠지게 한 님을 찾는 여행을 한다.

묘지번호 204411는 그가 이승에 남긴 번뇌 번호이다. 승려로, 문인으로, 독립운동가로 66년간 그의 족적을 따라가 보자.

여기서 '사자후(死子逅)'란 '죽은 이와 우연히 만나다 또는 죽은 이와 만나 허물없이 지내다'라는 의미이다. (글쓴이 주)

1894년 동학혁명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떠

만해선생은 고종16년인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온양 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 자(호적이름)는 정옥(貞玉), 아명(속명)은 유천(裕天)이다. 출가 후 계명은 봉완(奉玩),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 또는 卍海)이다.

망우산 사색의 공원의 만해 한용운 문학비

유년 시절에 대해서 만해 본인의 술회도 없었고,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만해의 유년 시절은 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 등 내우외환으로 어수선 하였다. 아버지 응준은 그를 6세에 서당에 보내 10년간 한학을 배우게 하였다. '서상기(西廂記)'와 '통감(通鑑)'을 독파하고 '서경(書經)'에도 능통할 정도로 실력을 쌓은 그였기에 조용한 두메산골에서는 칭찬이 자자했다. 그 무렵 개화파 주도의 갑신정변(1884)이 삼일천하의 비극으로 끝났다는 이야기가 충청도 땅에까지 퍼졌다. 그 때 아버지 한응준은 어린 유천을 불러놓고 세상 형편과 국내외 돌아가는 정세를 소상히 설명하여 주었다. 그는 후에 선친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나는 선친에게서 조석으로 좋은 말씀을 들었다. 선친은 서책을 읽다가 가끔 어린 나를 불러놓고
만해의 글씨. 독립기념관 소장
역사상 빛나는 의인결사의 언행을 가르쳐주시며 세상 형편, 국내외 정세를 알아듣도록 타일러 주셨다. 이런 말씀을 한 번 두 번 듣는 사이에 내 가슴에는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나도 그 의인 결사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하는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에서-

14세 되던 해(1892)에 동향의 전정숙과 혼인을 한다. 16세 되던 해(1894)에 서당의 훈장 생활을 하면서 세속에서 평범한 삶을 이어간다. 당시 시대 상황의 급변은 삶의 전환기가 되었다. 16살의 만해도 동학란과 청일전쟁의 격동기 속에서 이 땅에 살면서, 민중과 함께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96년11월. 호론(湖論)의 영수 남당 한원진의 학통을 따르던 김복한, 이설, 임한주 등이 홍주(홍성)에서 을미의거를 감행했으나 이듬해 정월에 의거가 실패하였다. 그때 그는 고통 속에서 역사의 현실을 통감했고, 나아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 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야 하는 인생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의 회고대로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18세에 집을 떠난다.

구한말의 원효, 불교 대중화에 앞장서
조선불교청년회 제1회 정기총회를 마치고.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으로 들어가 불목하니로 보내다 마침내 출가하여 승려가 된다. 출가 직후 오세암에서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를 두루 섭렵하며 선(禪)을 쌓았다. 20세에는 백담사에 머물면서 계명을 '봉완(奉琓)'으로 받는다. 설악산에서 머물던 만해는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25세(1903)에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 만주 등을 순회하였다.

귀국 후 석왕사에 칩거하여 참선에 빠진다. 26세엔 일본행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홍성으로 낙향한다. 이
1910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913년에 발간한 '조선불교유신론'
때, 아들 보국(보국내외 북한에서 사망. 손녀 셋은 지금 북한에 거주)이 탄생하였다. 고향에서 몇 개월 머문 만해는 다시 출가를 결심한다. 보은의 속리사, 월정사 등에서 전전긍긍하다가 27세(1905) 1월 26일 백담사에 재입산 연곡(蓮谷)스님을 은사로 맞아 득도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법명을 '용운(龍雲)'이라 했다. 이후 만해는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대장경을 독파하였고,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28세(1906)에 이보담, 홍일초 등과 '불교연구회'를 만들고, 30세(1908)되던 해에는 원흥사에 불교식 최초학교인 영진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해는 안중근의사의 장거가 있었다. 만해는 그해 5월부터 6개월간 일본 동경에 있었다. 주로 동경과 경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습을 익히고 돌아 왔다. 이때 3.1독립운동의 동지인 최린 등과 교류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창하며,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했다. 하지만 1910년은 경술늑치로 인해 한일합병이 되자 국치를 이길 수 없어 다시 짐을 싼다. 중국의 동북삼성으로 가 만주일원 독립군의 훈련장을 찾아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 주었다. 35세(1913)에는 마침내 "조선불교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간하였다. 1914년부터는 많은 활동을 전개한다. 불교대전 간행(1914. 범어사), 불교강구회 총재 취임(1914), 조선불교회(후에 일제에 의해 불교동맹회로 개칭) 회장취임, 영호남지역의 사찰을 돌면서 강연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1917년 12월 3일. 늦은 밤. 오세암에서 좌선을 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돈오를 깨닫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男兒到處是故鄕(남아도처시고향)  남아의 발 닿는 곳, 그곳이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기인장재객수중) 그 몇이나 객수 속에 오래 머무나,

一聲喝破三千界(일성갈파삼천계)  한 소리 크게 질러 삼천세계 깨닫거니
雪裏桃花片片紅(설리도화편편홍) 눈 속에 복사꽃 송이마다 붉구나."
-悟道頌(오도송)전문- 

만해의 친필 '오도송'

"유심" 창간하며, 최초의 신시(新詩) '심(心)' 발표

불혹(不惑)에 접어든 1918년 9월. 서울 계동 43번지에서 불교종합잡지인 "유심(唯心)"을 월간으로 발행하였다. 발행인 겸 편집장을 맡았던 만해는 창간호에 '조선청년과 수양'이라는 논설, '전로(前路)를 택하여 나아가라', '고통과 쾌락', '고학생'을 비롯하여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 '심(心)'을 발표하였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신시(자유시)의 선구를 주요한의 '불노리(불놀이)'로 보지만 만해의 '심'은 그 보다 1년 앞서 발표했기에 그렇게 보는 것이다. 이후 만해는 문학 창작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1918년 만해가 창간한 "유심"

"心은 心이니라.
心만 심이 아니라 非心도 心이니 心外에는 何物(하물)도 無하니라.
生도 心이오 薔薇花(장미화)도 心이니라.
好漢(호한)도 心이오 賤丈夫(천장부)도 心이니라.
蜃樓(신루)도 心이오 空華(공화)도 心이니라.
物質界(물질계)도 心이오 無形界(무형계)도 心이니라.
空間(공간)도 心이오 時間(시간)도 心이니라.
心이 生하면 萬有(만유)가 起(기)하고
心이 息(식)하면 一空(일공)도 無하니라.
心은 無의 實在(실재) 오, 有의 眞空(진공)이니라.
心은 人에게 淚(누)도 與(여)하고 笑(소)도 與하나니라.
心의 墟(허)에는 天堂(천당)의 棟樑(동량)도 有하고
地獄(지옥)의 基礎(기초)도 有하니라.
心의 野에는 成功(성공)의 頌德碑(송덕비)도 立하고
退敗(퇴패)의 紀念品(기념품)도 陳列(진열)하나니라.
心은 自然戰爭(자연전쟁)의 總司令官(총사령관)이며 講和使(강화사)니라.
金剛山(금강산) 上峯(상봉)에는 魚鰕(어하)의 化石이 有하고
大西洋(대서양)의 海底(해저)에는 噴火口(분화구)가 有하니라.
-"유심(唯心)" 창간호에 발표한 '심(心)' 전문-

유심은 불교의 포교와 만족정신을 목적으로 만들었으며 훗날 그가 관계한 "불교(佛敎)" 잡지와 쌍맥을 이루던 문화사업 중 하나이다. 이 잡지는 발간 석 달 만에 제3호를 내고 문을 닫는다.

'독립선언문' 초고로 최남선과 격론, 죽을 때까지 독립운동

만해가 41세 되던 해에는 일제의 학정에 획을 긋는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기미독립만세운동(3.1운동)이다. 만해는 백용성과 함께 불교의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갖고 최남선과 의견 충돌을 가졌다. 만해는 '내용이 좀 더 강해야하고,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공약 3장을 삽입하는데 그쳤다. 당시 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하였고, 공약3장은 한용운이 작성을 했다. 3월1일 경성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을 연설하고,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재판을 받고 마포형무소에서 3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취하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 옥중 투쟁 3원칙을 내세우고 스스로 지켰다.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 독립에 대한 개요'를 기초하여 제출했다. 옥바라지를 하던 제자 김상호가 몰래 가지고 나와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자에 실어 세간에 알려진다.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주검과 같고, 평화가 없는 사람은 가장 괴로운 자다.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변하고,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세상의 이상적인 최고의 행복의 바탕은 자유와 평화에 있는 것이다."
-"조선독립에 대한 개요" 중 '자유와 평화의 개념정의' 부분. 독립신문 1919.11.4 자-

옥중에서도 '독립은 민족의 자존심'이라고 주장하였다. "

1921년 감형을 받고 감옥에서 나온 뒤 만해는 일경의 감시 아래에서도 강연 등을 이용하여 조국독립을 강변하였다. 49세에는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을 겸임하기도했다. 신간회는 나중에 광주학생의거는 물론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근간이 되었다. 만해의 강연내용 중 아직까지 회자되는 어록을 간추려본다.

"진정한 자유는 누구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다. 또 주는 것도 아니다. 서양인들은 하나같이 '신이여 자유를 주소서! '라고 자유를 구걸하지만 자유를 가진 신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필요도 없다. 사람이 부자유할 때는 부자유할 것이고, 신이 자유로울 때는 사람도 자유로울 것이다. 신이 만약에 있다면 '신이여 자유를 주소서! '가 아니라, '신이여 자유를 받으소서! '라고 얘기해야 할 것이다"-불교청년회 강연 중.

1년 6월의 감옥생활을 하고 출옥 소감을 적은 글. '지옥을 다녀 온것이 아니라 극락을 구하고 왔다'는 내용.

"개성 송악산(松岳山)에 흐르는 물은 선죽교의 피를 못 씻고, 남강(南江)에 흐르는 물이 촉석루의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義岩)에 서려 있는 논개(論介)의 이름은 못 씻는다"-'철창철학'의 연제 강연 중.

"여러분! 얼큰한 된장찌개 맛보는 기분으로 내 말을 들어보소. 우리들의 가장 큰 원수는 대체 누구일까요. 소련입니까, 미국입니까? 아닙니다. 소련도 미국도 우리의 원수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대체 누구입니까? 일본이라고 남들이 그럽디다. 모두들 일본이 가장 큰 원수라고…(이때, 일본경찰이 연설 중지를 외쳤다.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연설을 계속 하였다.) 우리의 원수는 일본이 아닙니다. 일본이 어째서 우리의 원수이겠습니까? 우리의 원수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게으름,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원수가 아니고 무엇이냐." -어느 강연장에서

"인류는 향상적 동물이다. 향상이 자기의 실력에 의해서 한 단계 두 단계 뻗어나가야지 그렇지 목할 때에는 파괴와 멸망만이 있다"-물산장려운동을 하면서

53세에는 "불교(佛敎)"지를 인수하여 많은 논설을 썼으며, 이해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항일청년비밀경사단체인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어, 60세에 소위 '만당사건(卍黨事件)'으로 후배와 동지들이 검거되었고, 자신도 많은 고초를 당했다. 1939년 회갑을 맞은 만해는 몇몇 동지들과 경남 사천의 다솔사에서 조촐한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만해의 회갑연은 서울 청량사에서 먼저 베풀고, 사흘 뒤 다솔사에서 수연희를 했다고 한다.

'심우장(尋牛莊)'은 마음을 다스리는 곳

1933년 유숙원씨와 55세에 재혼한 만해는 심우장에 머무른다. 심우장은 현 성북구 성북동 222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나 예전에는 성밖 마을 북장골이라 부르던 한적한 마을이었다. 만해가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승려 벽산(碧山)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자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고 '심우장(尋牛莊)'이라고 하였다.

만해가 말년을 보낸 심우장

'심우'는 선(禪) 수행의 단계를 소와 목부(牧夫)에 비유하여 열 폭의 그림으로 그린 심우도(尋牛圖 또는, 十牛圖ㆍ牧牛圖)의 첫 번째 그림으로 소를 찾는 동자가 산 속을 헤매는 모습을 초심의 단계에 비유한 내용이다. 한용운의 아호 중에는 '목부'가 있는데, 이는 소를 키운다는 뜻을 가졌다. 아무튼 조선독립의 날까지 절조를 지키며 말년에 살았던 심우장은 성북동의 상징으로 시인, 묵객, 지식인들이 모여 이 시대의 정신과 문학을 토론하고 고민하던 곳이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심우장에 대한 만해의 수행은 그가 쓴 연작시 '심우장'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尋牛莊 1

잃은 소 없건마는
찿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타 하면
찿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찿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尋牛莊 2

선(禪)은 선(禪)이라고 하면 선(禪)이 아니다.
그러나 선(禪)이라고 하는 것을 떠나서 별로히 선(禪)이 없는 것이다.
선(禪)이면서 선(禪)이 아니요.
선(禪)이 아니면서 선(禪)인 것이 이른바 선(禪)이다.

…달빛이냐?
갈꽃이냐?
흰모래 위에 갈매기냐?

尋牛莊 3

소찿기 몇 해런가
풀기이 어지럽구야.

북이산 기슭 안고
해와 달로 감돈다네.

이 마음 가시잖으면
정녕코 만나오리.

찾는 마음 숨는 마음
서로 숨바꼭질 할제
골 아래 흐르는 물
돌길을 뚫고 넘네.
 
말없이 웃어내거든
소잡은 줄 아옵소라."
-'심우장' 연작시 전문

이곳에서 만해는 1934년 첫 장편소설인 "흑풍(黑風)"을 집필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56세인

만해의 묘비
이해에 딸 영숙을 이곳에서 낳았다. 심우장은 북향한 산비탈에 집을 지었다. 이는 한용운이 남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보기 싫다 하여 북향으로 등을 돌렸다 한다.

심우장은 만해가 말년에 안주 한 곳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시, 수필, 소설은 물론 평론, 번역에까지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장르가 없었다. 이곳에 그가 집필한 작품은 심우장에서 당시 금서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부도 속에 넣어 단재탑을 만들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곤욕을 치렀으며, '박명', '후회', '죽음' 등 신문 연재소설을 남겼다.

1944년 6월 29일(음. 5월 9일) 입적을 하였다. 그의 동지들은 미아리 사설화장장에서 다비(화장)을 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을 안치하였다.

만해와 친분을 나누던 친구들은 이시영, 김동상, 신채호, 정인보, 박광, 홍명희, 송월면, 최범술 등 당대 내오라하는 문사들이었고, 신채호의 비문의 묘비명은 만해가 쓴 것이다.

아직도 부르는 '님' 그리고 '침묵'

1920년대 민족문학론이나 계급문학론은 '민족' 혹은 '계급'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실체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개별성과 차이성은 배제한 채 집단성과 단일성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은폐하려 한다. 내부의 다양한 집단, 특히 억압을 받고 있는 소외집단은 문학적 가치로 형상화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행위 양식에서 스스로의 위상을 고유의 목소리로 소리 내는 데는 인색하고 한계를 드러낸다. 만해의 시는 바로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는 사례로 자리매김을 한다. 만해의 작품은 단순히 계몽적인 시선으로 하위주체를 대표하거나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묻고, 기다리는 자세로 자타간의 이룰 수 없는 재회의 일체를 도모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선 의미의 확정과 고정이 아니라 그 의미의 지연, 즉 기다림을 통해 이분법의 해체를 도모하고 있다. 예를 든다면, '만남=이별, 삶=죽음, 지배=복종' 을 통해 침묵을 하거나 침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노래를 이야기하는 분무기 역할을 하고 있다. 

만해의 절작 '님의 침묵'이 발표된 시기는 1926년 그의 나이 48세이다. 이해 5월 20일 회동서관에서 발간한 만해의 대표 시와 시조 88수가 실린 책의 제목 또한 "님의 침묵"이다.
이 책에는 시조가 36수 실렸는데, 님을 향한 그리움(9수), 인생무상을 서정적으로 노래(9수), 대승적불교사상(3수), 남아로서 야망과 포부(3수), 도가적 달관과 무이의 선경(4수), 대중의 나약한 정신과 현실의 고뇌(4수) 등이다.

나머지 52수는 '사랑의 측량', '자유정조', '당신을 보았습니다', '찬송', '명상', '알 수 없어요', '군말', '나룻배와 행인', '님의 침묵' 등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중 '명상'은 '님'에 대해 만해가 아니 군중들이 꿈을 꾸던 유토피아가 잘 나타난 시이다.

님의 침묵을 읊조리며, 만해를 배우다
"아득한 명상(冥想)의 적은배는 갓이업시 출넝거리는 달빗의 물ㅅ결에 표류(漂流)되야 멀고먼 별나라를 넘고 또넘어서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 이르럿슴니다
이나라에는 어린아기의 미소(微笑)와 봄아츰과 바다소리가 合하야 사람이 되얏슴니다
이나라 사람은 옥쇄의 귀한줄도 모르고 황금(黃金)을 밟고다니고 미인(美人)의 청춘(靑春)을 사랑할 줄도 모름니다
이나라 사람은 우슴을 조아하고 푸른하늘을 조아함니다

명상(冥想)의 배를 이나라의 궁전(宮殿)에 매엿더니 이나라 사람들은 나의 손을 잡고 가티살자고함니다
그러나 나는 님이오시면 그의 가슴에 천국(天國)을 꾸미랴고 도러왓슴니다
달빗의 물ㅅ결은 흰구슬을 머리에이고 춤추는 어린풀의 장단을 마추어 우줄거림니다"
-'명상(冥想)'. "님의 침묵". 1926. 원문-

이 시를 보면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토마스 모어가 생각난다. 그의 저술 "유토피아"에서 강조하는 유토피아 사람들이 황금을 노예의 발에 채웠던 것처럼 사유재산이 없는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누구나 생필품과 편의품을 충분히 가진다면 더 이상의 욕심이 없는 곳, 즉 사유재산이 없는 공유제의 사회일 것이다. 금과 은이 그 효용가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희소성 때문에 이를 귀중히 여기는 것은 완전히 자연에 반하는 쓸데 없는 탐욕에서 연유한다고 토마스 모어는 생각했는데, 만해도 마찬가지로 황금을 쓸데 없는 물건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쾌락이다. “이 나라 사람은 웃음을 좋아하고 푸른 하늘을 좋아합니다.”에서 보면 이 나라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며 자연을 사랑함을 알 수 있다. 행복의 추구는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염원으로 이 땅에서 숨을 쉬고 있는 모든 사람, 공동체의 공통된 목표이다.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모어에게는 쾌락이다. 그는 쾌락이 ‘인간 행복의 전부 또는 대부분을 이루는 주요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모어의 쾌락은 그의 종교관과 도덕관에 나온다. 그에 의하면 쾌락은 종교의 세 가지 원리인 영원, 불멸, 인간의 행복을 위한 신의 섭리, 내세에서의 덕의 보상과 죄의 형벌을 인정할 때 옹호될 수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나의 손을 잡고 같이 살자고 하지만 나는 님이 오시면 그의 가슴에 천국을 꾸미려고 돌아왔습니다.”라고 이 시는 전하고 있다. 즉 나만 행복한 나라에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님(나를 제외한 중생들)의 가슴에도 천국을 꾸며야 한다는 대승 불교적 이타주의가 잘 드러나는 시이다. 만해의 '명상'은 그가 부르고, 찾는 '님'의 존재가 조금은 도드라져 나온 듯하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 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읍니다.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黙)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1926. 원문- 

만해를 연구하고, 비평하는 사람들은 만해의 시의 특징을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을 예술적으로 결합된 데서 드러난다고 한다. 자유, 평등, 민족, 민중 사상을 바탕으로 한 불교적 세계관과 독립사상은 만해의 문학적 뼈대이자 살이라 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문학은 불교, 독립, 문학이 삼위일체를 이루며 전개되는 것이 특징이란 뜻이다.
그의 시집 '님의 침묵'은 이별에서 시작해 만남으로 끝나는 극적 구성을 띤 한편의 연작시라 할 수 있다. 그의 시 88편 전편이 '이별-갈등-희망-만남'이라는 수학적 구조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소멸-갈등-생성'이라는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시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속에 나오는 사랑은 이별을 대전제로 만남에 이르는 과정이 사랑을 완성하는 하나의 법칙인 것이다. 즉, 그의 '님'은 수학적 기호와 철학적 변증법을 바탕으로 화자와 독자 간의 공감을 형성하려는 독특한 시의 세계라 할 수 있다.
그의 시적 정신과 나라의 독립이라는 큰 명제아래 스스럼없이 써내려간 '님'의 존재는 무엇일까. '님의 침묵'을 읊조리며 잠시 명상에 잠기며, 또 다른 님을 찾아 나선다.

만해와 사자후(死子逅)를 하다.


"나의 노래가락의 고저장단은 대중이 없습니다.그래서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노래가 세속 곡조와 맞지 않는 것을 조금도 애달파하지 않습니다.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와 다르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까닭입니다.

곡조는 노래의 결함을 억지로 조절하려는 것입니다.

곡조는 부자연한 노래를 사람의 망상으로 토막쳐 놓은 것입니다.

참된 노래에 곡조를 붙이는 것은 노래의 자연에 치욕입니다.

남의 얼굴에 단장을 하는 것이 도리어 흠이 되는 것과 같이,

나의 노래에 곡조를 붙이면, 도리어 결함이 됩니다.

나의 노래는 사랑의 신(神)을 울립니다.

나의 노래는 처녀의 청춘을 쥐어 짜서, 보기도 어려운 맑은 물을 만듭니다.

나의 노래는 님의 귀에 들어가서 천국의 음악이 되고님의 꿈에 들어가서 눈물이 됩니다.

나의 노래가 산과 들을 지나서멀리 계신 님에게 들리는 줄을 나는 압니다.

나의 노랫가락이 바르르 떨다가 소리를 이루지 못할 때에

나의 노래가 님의 눈물겨운 고요한 환상으로 들어가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압니다.

나는 나의 노래가 님에게 들리는 것을 생각할 때에광영에 넘치는 나의 작은 가슴은발발발 떨면서 침묵의 음보를 그립니다."
-'나의 노래' 전문

이 시에서도 '님'과의 이별이 나온다. 님과 이별의 시대는 침묵의 시대, 상실의 시대를 말한다. 언젠가 맞이할 만남의 시간은 바로 참된 낙원의 회복시대, 광복의 시대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만해는 '천국의 음악'을 위해 '발발발 떨면서 침묵의 음보'를 그리고 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알 수 없어요' 전문-

이 시에서 질문을 하는 주체는 지극히 여성적이다. 질문은 있되 답이 없는 아니 아예 질문자체가 답이 되어버린 역설적인 시이다. 그러면서 정감적이면서도 호소력을 유발하고 있다. 조선중기 문사 정철이 '사미인곡'을 통해 왕권으로부터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여성적인 글을 썼듯이, 만해도 잃어버린 것에 대한 회복을 소망을 발자취, 얼굴, 입김, 노래, 시, 등불로 만해 특유의 여성적인 방법으로 형상화 하나 것이다.
만해의 시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은 은유와 역설이다. 또한 산문적이다. 이는 개방을 지향한 자유시의 완성도를 '알 수 없어요' 만해의 시적 특징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여기서는 '님'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누구'라는 표현 속에 '님'은 꼭꼭 숨겨 두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 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앝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비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나룻배와 행인' 전문



'나'는 나룻배, '님'은 행인. 만해는 또 기다린다. 님을 태우고 비바람을 쐬며,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그러나 님은 건너가면 돌아다보지 않고 가는, 그 님을 기다리다 지치고 낡아가는 나는 '나룻배'. 나룻배는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뭇 중생이 아닐까. 님은 흙발로 돌아와서 나를 짓밟아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대상인가 보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찌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예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 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군말' 전문

부재하는 것은 떠나가는 것. 떠나는 것은 '그 사람', 남아 있는 것은 '나'. 이 둘을 놓고 소월은 '나'는 언제나 '님'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학적인 인물로 표현 하는 것에 비해 만해는 '나'는 강렬하면서도 신념에 차 보인다. '누구'라는 존재의 비밀은 무엇일까. 생성에서 소멸, 그 소멸에서 다시 생성되는 윤회. 그것이 님이 아닐까.
'님'은 나를 기른다. 자유의 구속이 던지는 시련, 그 시련은 연단을 낳고 연단은 희망을 낳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님'은 자유(?), 아님 구속(?),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만해와 사자후를 마치며

과연 만해 모든 시에서 나오는 님은 무엇일까 아직 깨지지 않은 계란이다. 만해를 만나며, 그가 찾는 님이란 무엇일까. 다시 화두를 가슴에 담고 내려온다. 내 가슴에는 피가 끓는 열정은 아닐지언정 과연 내 가슴에는 만해가 열망하고, 서정적으로 풀어 갔던 님에 대한 과제는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본다.
본고에서는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관점에서 본 한용운 시 연구(이충재. 고려대대학원 석사논문집. 2007.7)"와 "님의 침묵-전편해설(송욱. 과학사. 1973)" "한용운 문학연구(김재홍. 일지사. 1882), "님의 침묵연구(윤재근. 민족문화사. 1985) 등을 참조로 재구성 하였다.

만해 한용운의 연보

역사와 현실, 상황 속에서 치열하게 부딪치며 물러나 정관하고, 투시하는 구도자적 삶속에서 만해의 미적거리와 형이상학적 주제는 한국문학의 원숙을 기한 만해의 시혼(詩魂)은 우리가 되살려 할 소중한 지적재산이다. 만해의 시정신은 어려운 시대일수록 풍란화 매운 향내로 더욱 그 빛과 향기는 더 할 것이다.

■1879(1세) 8월 29일(음력 7월 12일) 부친 한응준과 모친 온양방씨 사이의 2남으로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출생. 본관은 청주, 어린시절의 이름은 유천, 호적이름은 정옥.
■1884(6세) 향리 서당에서 한학 수학.
■1887(9세) 통감, 대학, 서상기, 서경 등을 공부.
■1892(14세) 전정숙과 결혼.
■1896(18세) 향리의 서당 선생, 새로운 도전을 위해 가출. 입산.
■1897(19세) 월정사 강원에서 수학.
■1898(20세) 설악산 백담사로 이전, 사미계 수계(법명, 奉玩).
[1901~1910]
■1903(25세) 세계일주를 위한 시베리아행 도전. 귀국 석왕사 칩거, 참선.
■1904(26세) 일본행 계획, 실패. 홍성으로 귀향, 홍성 재 가출. 아들인 보국 출생.
■1905(27세) 1월 26일 백담사 재입산, 비구계 수계(은사 김연곡으로, 계사는 전영제). 4월, 이학암(백담사)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을 배움.
■1907(29세) 건봉사에서 최초의 안거 수행. 만화선사로부터 전법(당호, 龍雲).
■1908(30세) 4월 유점사에서 서월하에게 화엄경 배움. 5~10월 일본으로 시찰 겸 유학(임제종대학). 10월 귀국, 건봉사에서 이학암에게 화엄경과 반야경 배움. 12월 10일 경성명진측량강습소 개설, 소장.
■1909(31세) 7월 30일 표훈사 강원 강사.
■1910(32세) 3월, 9월 중추원과 통감부에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달라는 건백서 제출. 9월 20일, 화장사 화산강숙 강사. 12월 8일,'조선불교유신론'탈고.
[1911~1920]
■1911(33세) 10월 만주지방 순행.
■1912(34세) 5월 임제종중앙포교당 개설. 6월 임제종중앙포교당을 일제 외압으로 선종중앙포교당으로 명칭 변경. 8월 불교대중화를 위해 조선불교회와 불교동맹 결성, 좌절. 통도사에 머무르며 대장경 열람.
■1913(35세) 3~4월 "조선불교월보"에 '승려의 단결', "조선불교유신론") 기고. 이 때에 처음으로 필명, 자호인 萬海를 사용. 5월 19일 통도사 강원 강사에 취임.
■1914(36세) 4월 조선불교강구회 총재. 4월 30일 "불교대전" 간행(범어사)
■1917(39세) 4월 4일 신문관에서 "정선강의 채근담"발간. 12월 3일 오세암에서 좌선 중 깨달음. 오도송 지음.
■1918(40세) 9월 월간 교양잡지 "유심" 발간, 발행인(3호로 중단)
■1919(41세) 1월 최린 등 천도교 측과 3·1운동 논의. 2월 불교, 유교측의 민족대표 포섭. 공약삼장 추가. 3월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 주도. 일제에 체포. 7월 10일 '조선독립 이유서' 작성.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

수인번호 113번 3.1만세운동 주범으로 몰려 감옥에서의 사진.

[1921~1930]
■1921(43세) 12월 22일 석방, 선학원에 머무름
■1922(44세) 3월 24일 역경과 불교대중화를 위한 단체인 법보회 발기. 3월 29~30일 선학원의 선우공제회 발기인. 11월 민립대학기성회에 참여.
■1923(45세) 3월 31일 민립대학기성회의 중앙부 집행위원에 피선, 4월 2일 상무집행위원에 피선.
■1924(46세) 1월 6일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
■1925(47세) 6월 7일 오세암에서 "십현담주해" 탈고. 8월 29일「님의침묵」탈고.
번역한 대장경

■1926(48세) 5월 15일 법보회에서「십현담주해」발간. 5월 20일 회동서관에서「님의 침묵」발간. 6월 7일 선학원에서 6·10만세운동 예비검속으로 구속.
■1927(49세) 1월 19일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 2월 15일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
6월 10일 신간회 경성지회장으로 피선.
■1928(50세) 8월 "봉사급건봉사본말사약지"편찬 발간.
■1929(51세) 12월 광주학생운동의 민중대회 사건으로 구속.
■1930(52세) 5월 항일비밀결사 만당의 영수로 추대(비공식). 서울 종로의 사직동에 칩거.
[1931~1944]
■1931(53세) 6월 월간 "불교"의 사장으로 취임. 7월 전주 안심사의 한글경판 발견.
■1932(54세) 12월 안심사(전주)에 보관되었던 한글경판을 인출. "불교"지 선정 불교계 대표인물 1위.
■1933(55세) 7월 "불교" 휴간으로 불교사 사장에서 퇴직. 유숙원과 결혼(재혼). 서울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고 머무름.
■1934(56세) 9월 딸 영숙 출생.
■1935(57세) 4월 9일 조선일보에 소설 '흑풍' 연재 시작(1936년 2월 4일까지).
■1936(58세)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후회' 연재(50회로 중단). 신채호 묘비 건립(비용은 조선일보의 원고료로 충당, 글씨는 오세창이 씀). 7월 16일, 다산 정약용서거 백년기념회 개최(정인보, 안재홍과 함께).
■1937(59세) 3월 만주의 항일운동가 김동삼이 서거하자, 유해 인수하여 장례를 치름. "불교" 신1~2집에 소설 '철혈미인' 연재.
■1939(61세) 청량사에서 회갑연 개최(음력 7월 12일). 다솔사에서 회갑 기념식수. 조선일보에 삼국지 번역 연재 시작(1940년 8월부터 조선일보 폐간까지).
■1942(64세) 신채호 유고집 발간 추진. 좌절(최범술, 박광, 신백우와 함께).
■1944(66세)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 미아리 화장터에서 화장하고 그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
[1944년 입적 이후]
■1948 만해한용운전집 간행 추진위원회 조직, 자료수집(6·25로 중단)
■1962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을 정부에서 추서
탑골(파고다)공원의 '용운당대선사비' 일부.

■1967 10월 파고다 공원에 용운당대선사비 건립
■1971 만해한용운전집간행위원회 재결성, 자료수집
■1973 7월 5일「한용운전집」(전 6권)을 신구문화사에서 간행
■1974 창작과비평사에서 만해문학상 제정
■1979 9월 10일「한용운전집」증보판 발행
■1980 만해사상연구회 결성(신구문화사)
■1991 만해학회 결성
■1995 제1회 만해제 거행(홍성), 만해사(생가) 건립
■1996 만해사상실천선양회 결성(백담사)
■1999 제1회 만해축전 개최(백담사), 만해대상 제정 시상
■2003 (재) 백담사 만해마을 설립. 백담사 만해마을 준공(백담사 입구)
망우산에는 17명의 애국지사 문인, 예술인 외에도 역사의 굴레를 이야기 할 많은 사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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