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다리를 건너 법주사 경내에 들어섰다. 법주사는 행정구역상으로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에 속해 있으며 고풍을 간직한 채 속리산에 단정히 정좌하고 있는 대찰(大刹)이다. 금산사와 함께 법상종의 대표 사찰이기도 하다.

A.D.553년(진흥왕 14년) 의신(義信)스님에 의해 창건된 이후, 776년 진표(眞表) 및 영심(永深)스님 대의 중창을 거쳐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8차례의 중수를 거듭했던 법주사는, 조선조 중기에 이르러서는 60여동의 건물과 70여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大刹)로서의 위용을 자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절의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던 결과, 1624년(인조 2년) 경에 이르러 벽암(碧巖)스님에 의해 또다시 법주사는 중창을 거듭하였고, 1851년에는 국가적 규모의 중수작업이 진행 되기도 하였던 등 그뒤 수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법주사에는 팔상전(捌相殿)이라 불리우는 1기의 목탑과 더불어,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중심으로 용화전(龍華殿) 원통보전(圓通寶殿) 명부전(冥府殿), 능인전(能仁殿) 조사각(祖師閣) 진영각(眞影閣) 삼성각(三聖閣) 등 8개의 전각(殿閣)과, 일주문(一柱門) 금강문(金剛門) 사천왕문(四天王門) 종고루(鍾鼓樓), 부도전(浮屠殿) 등 5개의 부속건축, 그리고 선원(禪院) 강원(講院) 염불원(念佛院) 등 3개의 원(院)이, 또한 염화당( 華堂) 용화당(龍華堂) 미룡당(彌龍堂), 응주전(凝住殿) 사리각(舍利閣) 종무소(宗務所)를 포함한 10여 채의 요사채들이 남아 있어, 도합 30여동의 건물이 조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법주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그리고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한다. "세상의 구전(口傳)으로는 신라 의신 조사(義信祖師)기 흰 나귀에 경전을 싣고 와서 이곳에 처음으로 절을 이룩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즉 법주사라 이름한 것은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 조사가 인도에 가서 불법을 구하여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머물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공민왕 11년(1362) 8월에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임금이 경상북도 안동까지 몽진(蒙塵)하였다가 환궁(還宮)할 때 법주사에서 불은(佛恩)에 감격한 기념으로 현재 수정봉 밑 능인전(能仁殿) 뒤에 사리탑을 조성, 봉안하였다고 한다.

조선의 이태조(李太祖)는 즉위하기 전에 현재의 상환암(上歡庵)에서 백일기도를 했다고 전해지며, 또 세조는 1464년(세조10) 2월에 직접 법주사로 가서 참배하고 산내 암자인 복천암(福泉庵)에서 3일 정진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고종 28년(1881)에는 탄응 선사(坦應禪師)가 퇴락한 법주사를 일신 시켰으며 1964년에는 추담 선사(秋潭禪師)가 대원군 때 소실된 미륵전 터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온 국민의 성원 속에 미륵불상을 조성하였다. 이로써 법주사는 미륵신앙의 중추적인 요람이 되었다. 그 후로 금오 대선사(金烏大禪師)가 주석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해 내어 법주사는 한국 선도량(禪道場)의요지가 되었다.

다리를 건너자 금강문이 보인다. 그 금강문(金剛門) 안으로 사천왕문, 팔상전에 이는 길과 건물들이 보인다. 사찰건축에서 일주문(一柱門)의 안쪽에 세우는 문. 사찰에 따라 천왕문(天王門)이 건축되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금강문과 천왕문이 모두 건축되기도 한다. 금강문은 보통 정면 3칸·측면 1칸의 장방형 평면을 이룬 단층 맞배집으로 건축된다.

중앙 어칸(御間)은 앞뒤 모두 아무런 창호를 달지 않고 개방하며 양측칸과 양측면은 모두 벽체를 친다. 공포는 익공(翼工)식을 주로 사용하고, 어칸만 사람이 통행할 수 있게 하며, 양측칸에는 어칸 쪽으로 홍살을 세워 격리시키고 그 속에 금강역사(金剛力士) 입상(立像)들을 세웠다. 이 금강문의 안쪽에는 누문(樓門)이 있다.

속리산 법주사의 금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다포식 건물입니다. 중앙의 어칸은 절을 들어가는 통로이며, 양 쪽 어칸에는 금강신과 더불어 사자를 탄 문수보살상과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금강문을 들어서자 사천왕문(四天王門)이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사찰의 수호신인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사천왕문, 줄여서 천왕문이 있다. 흔히 금강문 다움으로 세워져 있기도 하다. 대부분 사찰에 들어오는 산문(山門) 중 일주문 다음에 있는 두 번째 문입니다.

그러나 법주사는 금강문 다음에 배치되어 있다. 사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신 곳으로서, 여기에 사천왕의 조상이나 그림을 봉안하고 있다. 불법(佛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 사대천왕(四大天王)·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이라고도 한다. 사천왕들은 불거져 나온 부릅뜬 눈, 크게 벌린 빨간 입 등 무서운 얼굴에 손에는 큼직한 칼이나 창을 들고, 발로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마귀를 밟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인도 종교에서 숭상하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부처님과 불법(佛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천왕은 여러 단계나 되는 천상계(天上界) 중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천왕천(四天王天)이라는 하늘나라에 살며, 그 나라의 임금인 제석천왕(帝釋天王)의 지시에 따라 사천왕천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관장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이 세계를 크게 둘로 나누어, 하나는 「깨달음의 세계(悟界)」 또 하나는 「헤매임의 세계(迷界)로 나눈다. 이것을 다시 세분해서 십계(十界)로 체계화하고 있다.

십계(十界)란 다음과 같다. ① 지옥(地獄), ②아귀(餓鬼), ③ 축생(畜生), ④ 아수라(阿修羅), ⑤ 인간(人間), ⑥ 천(天), ⑦ 성문(聲聞), ⑧ 연각(緣覺), ⑨ 보살(菩薩), ⑩ 불(佛). 이 가운데 ① 지옥(地獄) ② 아귀(餓鬼) ③ 축생(畜生) ④ 아수라(阿修羅) ⑤ 인간(人間) ⑥ 천(天). 이들의 6단계는 凡夫가 스스로 지은 업(業)에 따라 생사를 거듭하며 끝없이 윤회하는 「헤맴의 세계」이다. 한편 ⑦ 성문(聲聞) ⑧ 연각(緣覺) ⑨ 보살(菩薩) ⑩ 불(佛)의 세계는 오랜 세월 수행한 공덕으로 깨달음을 얻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난 성자(聖者)인 세계인 까닭에「깨달음의 세계」라고 한다.

미혹(迷惑)의 세계 가운데도 특히 ① 지옥(地獄) ② 아귀(餓鬼) ③ 축생(畜生)은 삼악도(三惡道)라고 하는데 많은 고통이 따른 세계이다. 인간의 세계에서 천(天)에 세계에 태여 날려면은 많은 선업(善業)을 쌓아야 하는데 그 사이에는 많은 단계의 천(天)이 있다. 그러한 천(天)가운데 사천왕이 사는 사천왕천은 가장 낮은 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 한 가운데 수미산이 있고 수미산 꼭대기에 「사천왕천」이 있으며, 「사천왕천」에는 그 주인이신 「제석천(帝釋天)」이 살고 있다.

수미산 중턱에 사천왕들이 각각 나라를 만들고 그들의 권속과 함께 살고 있다. 수미산 멀리 세계의 끝간데에는 철위산(鐵圍山)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철위산은 철분이 많아서 햇빛을 받으면 붉게 보인다고 한다. 철위산 넘어는 우주의 끝이 여서 어둡고 캄캄하며 무서운 암흑이라고 한다. 수미산 둘레에는 짠물의 큰 바다(大醎海)가 있고, 그 바다에는 칠금산(七金山)이라는 산과 팔해(八海)가 있다.

「칠금산」너머로 북쪽에 북구노주(北俱盧洲), 서쪽에 서구부주(西瞿浮洲), 남쪽에 남섬부주(南瞻浮洲), 동쪽에 동승신주(東勝身洲) 등 4개의 대륙이 있는데, 우리 나라와 인도는 남섬부주 안에 속하고 있다. 사천왕들은 수미산에 살면서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고 불도를 닦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다.

또 사천왕과 그 부하들은 온 천지를 돌아다니면서 이 세상의 선악을 모두 살펴서 그 결과를 매월 8일에는 사천왕의 부하들이, 14일에는 사천왕의 태자들이, 15일에는 사천왕 자신들이 제석천(帝釋天)에게 직접 보고하는 중대한 일을 하고 있다.

법주사 사천왕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어칸만 넓고 양 협칸은 모두 좁고 높아 정면 3칸으로 보인다. 이러한 교묘한 칸살이는 일반성을 유지하되 특수한 의도를 달성하려는 치밀한 계획의 결과이다.

가운데 3칸에는 판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게 하였고 두 끝 칸에는 작은 판 창이 달려 있다. 안에는 높이 5.7m의 사천왕상 2구씩이 배치되어 있다. 양쪽으로 2구씩 4구의 천왕상이 험상궂은 표정에 조선시대의 장수들처럼 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머리에는 투구나 보관을 쓰고 있다.

553년(진흥왕 14)에 창건되고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碧巖)대사가 중건한 것으로 1971년 해체, 복원하고 보수하였다.

사천왕은 4분의 천왕이 모셔져 있다.
사천왕중 동쪽을 수호하는 분은 지국천왕(持國天王)이다. 지국천왕은 수미산 동쪽 황금타(黃金埵)에 있는 천궁(天宮)에 살며, 16선신 중의 한 분이기도 하다. 그는 선한 사람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며, 늘 인간을 보살피고 국토를 지켜준다.

오른 손에 칼을 들고 왼손은 허리를 집고 있거나 손바닥에 보석을 올려놓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그의 부하로는 부단나(富單那)와 건달바(乾達婆)가 있는데, 건달바는 육체가 죽은 뒤 다른 육신을 받아서 태여 나기 전의 영혼신(靈魂身)이며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만 맡고 사는 음악의 신이다.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서쪽을 관장하는 천왕이며 수미산 중턱 백은타(白銀埵)살고 있다. 몸은 여러 가지 색깔로 장식되며 입을 크게 벌려서 큰 소리와 웅변으로 온갖 나뿐 현상을 물리치고 있다. 또는 눈을 부릅뜸으로서 그 위엄으로 나뿐 무리들을 몰아낸다고 해서 광목천왕이라고 한다.

광목천왕은 죄인에게 심한 벌을 내려 매우 아픈 고통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죄인으로 하여금 반성하게 하고 도심(道心)을 일으키게 한다고 한다.

그는 머리에 붉은 관을 쓰고 갑옷을 입었는데 오른손에는 끝이 셋으로 갈라진 삼차극(三叉戟)을 들고 왼손에는 보탑(寶塔)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는 용과,사람의 살과 피를 빨아먹는 비사사(毘舍闍)라는 귀신을 거느리고서 수미산이 서쪽 부근을 지키고 있다.

증장천왕(增長天王)도 불교의 수호신이다. 산스크리트의 비류다카데바(Virdhaka-deva)의 번역어로, 비류다가천(毘留茶迦天), 비류류천, 증장천(增長天)이라고도 일컫는다. 수미산(須彌山)의 제4층에 살면서 남방을 지키며 무량백천(無量百千)귀신의 우두머리라고 한다.

그 형상은 일정하지 않으나 보통 무장형(武將形)으로, 적육색(赤肉色)의 몸에 갑주(甲胄)와 여러 가지의 천의(天衣)를 입고 오른손에는 용을 잡고 있으며 왼손에는 여의주를 쥐고 있고 분노한 얼굴이다. 지국천(持國天)·광목천(廣目天)·다문천(多聞天)과 함께 사천왕(四天王)의 하나이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며, 부처님 곁을 멀리 떠나지 않고 부처님의 설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듣는다고 해서 다문천왕이라고 한다. 그의 역할은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는 것이다. 손에는 늘 비파를 들고 있으며 수미산 북쪽 수정타(水精埵)에 살며, 야차(夜叉)와 나찰(羅刹)을 부하로 거느리고 있다. 야차는 주로 산림 속에 사는 아주 무서운 귀신이지만 사람에게는 아주 관대하다고 한다.

사찰에 이러한 사천왕을 모시는 이유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찰을 지키고 수호한 다는 뜻이 있다. 출입하는 신자들로 하여금 도량 내는 모든 악귀가 물어난 청정도량이라는 신성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목적이 있다. 불도 수행과정상의 상징적의미로 본다면 일심의 일주문을 거처 이제 수미산의 중턱인 청정한 경지에 이르고 있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위압적인 인상을 보고 잡념을 씻어 청정한 마음을 가지라는 의도가 있다..처음 대하면 어쩐지 거부감만 느끼는 사천왕 님들은 사실은 착한 사람을 도와주는 고마운 분들이다.

사천왕문을 지나 그 유명한 팔상전으로 들어가렫가 방향을 바꾸어 마애여래의상을 본다 보물 제216호인 마애여래의상은 법주사 경내 좌측에 있는 암석 절벽면에 부조된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으로 높이가 5m이며 신라시대의 삼화령 석조미륵불 의상과 함께 매우 희귀한 의상에 속하는 작품이다.

그 곂으로 부도군이 있고 커다란 바위면에는 글씨도 쓰여져 있다.
전체적인 조망을 한 후에 경내를 둘러본다. 흔히 법주사 하면 거대한 미를보살상을 생각하지만 법주사에는 온갖 문화재가 많다. 하도 많아 모두 살펴보면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데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쌍사자석등은 국보 제5호다. 통일신라 시대인 720년(성덕왕 19)에 조성된 8각 석등으로 높이 3.3m인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석등 중에서도 견고한 조각수법과 넓은 지대석 옥개석 등의 비례가 아름답고 장중한 품격이 넘치는 신라석조 예술의 걸작품이다.

쌍사자는 하나는 입을 벌리고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는데 다물고 있는 사자는 참선을 상징하고, 입을 열고 있는 사자는 염불과 경학을 상징하는 것으로 참선을 하던지 경학을 하던지 꾸준히 정진하면 마침내 성불할 수 있다는 수행적인 면을 표현 하고 있다.

팔상전은 국보 제55호로 법주사 경내에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조선시대 오층목탑으로 533년(진흥왕 14) 의신조사가 창건하였고, 766년(혜공왕 12) 진표율사가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1624년(인조 2년) 벽암대사가 중건하였다.

1968년 해체, 중수공사 때 중심기둥 밑의 심초석에서 사리구와 명각동판이 발견되어 건립년대를 알게 되었으며, 목탑에서의 사리봉안 내용도 파악할 수 있게되었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의 일생을 팔폭의 그림으로 나타낸 팔상도가 봉안되어 있다.

석연지도 국보 제64호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석조. 극락세계의 연지를 상징한 것으로 높이는 1.95m 대석 위에 원형의 석조를 올려 놓은 형상이다. 이 석연지는 균형있는 비례와 조형적인 구성이나 무늬새김의 정교함 등이 돋보이는 걸작품으로 그 자체가 한송이 연꽃같이 아름답다.

연꽃은 더러운 흙탕물에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우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착하게 생활하면 내세에 극락세계에 태어난다는 불교의 윤회적인 교리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대웅보전은 보물 제915호인데 2004년 현재에는 보수중이다. 조선중기 목조 불전으로 1층 평면이 정면 7칸, 측변 4칸인 다포계의 2층 팔각지붕 건물로서 건평 170평, 높이 약 19m에 이르는 대규모 건물이다.

위층에 비하여 아래층의 높이가 훨씬 낮아서 탑파와 비슷한 비례를 보이며, 정면에는 모두 살문을 달았고 좌우 측면의 1칸과 뒷면 가운데 칸에는 따로 외짝문을 달았다. 건물 내부에는 법신, 불신, 보신의 삼존불을 중앙의 불단에 모셔놓았는데, 553년(신라진흥왕 14년)에 창건되었으며, 1624년(조선인조 2)에 벽암대사가 중건하였다.

원통보전은 보물 제916호로 사각지붕의 전형을 지니고 있다. 조선중기의 목조 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인 정사각형 평면의 건물로서 조심포계의 단층 사모지붕 건물이다.관음보살을 모신 건물로서 격이 높으면 원통보전, 격이 낮으면 관음전이라 통칭한다. 건물 내부에는 허리둘레 1.9m, 앉은키 2.8m인 거대한 목조 관세음보살좌상이 있으며, 553년(신라 진흥왕 4년)에 창건, 1624년(조선 인조 2)에 벽암대사 각성이 중건하였고, 1974년 완전 복원되었다.

사천왕석등도 보물 제15호이다. 통일신라시대인 서기 720년 (성덕왕 19)에 조성된 전형적인 신라 양식의 석등으로 높이가 3.9m로 그 크기가 장중하며 몸체에는 사천왕상이 역동적으로 새겨져 있고 그 비례가 매우 아름답다. 우리나라 사찰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석등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 석등은 부석사의 석등과 함께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신법천문도 병풍은 보물 제848호인데 볼 수 없었다. 1742년(영조 18년)에 관상감의 안국빈 등 6명이 북경 천문대 대장이었던 선교사 대진현의 성표를 사용, 한양에서 볼 수 없는 남쪽 하늘의 별까지 포함하여 제작한 신법천문도가 그려져 있는 8폭 병풍으로 1758년(영조 34년) 왕이 직접 법주사에 하사하였으며, 이 천문도는 300개의 별자리에 3038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철확은 유형문화재 제143호인데 720년(성덕왕 19)에 조성한 높이 1.2m, 직경 2.7m, 둘레 10.8m나 되는 거대한 철재 솥으로, 법주사가 번창할 때 3천 승려의 밥솥 또는 국솥으로 사용된 듯하다고 한다.

희견보살상은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원통보전 옆에 나린히 서있다. 원래는 사천왕석등 곁에 있다가 청동미륵대불 곁으로 다가간 커다란 향로를 받쳐든 희견 보살상의 얼굴과 육체는 형편없이 으스러졌다.

목줄기의 땜질을 비롯해 팔목, 발목 등에도 붕대 두르듯 회칠이 뭉개어져 있다. 이같은 외양은 이 석상이 시달린 세월의 풍화를 짐작케 하지만, 애당초부터 만신창이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게 일반적인 감상법이다. 희견은 혹독한 고행으로 일관한 보살로, 법화경의 '약왕보살본사품'은 희견보살이 이룬 소신공양의 행장을 기록하고 있다.

이 보살은 부처에게 공양하기 위해 1,200년 동안 자신의 몸에 향과 기름을 바르고 또한 그것을 먹고 마셨다. 그리고 그 몸을 다시 1,200년동안 불태워 부처에게 공양 했다. 그 과보로 희견은 약왕보살이 되었는데, 사연이 이렇기에 희견보살의 얼굴이 악마가 할퀸 듯한 형상이라고 한다.

한편 희견보살상은 법주사의 창건자로 간주되는 진표율사와 가장 정신적으로 상통하는 인물이다. 진표가 역시 육신에 극한의 고통을 가하는 이른바 망신참(亡身懺)을 수행의 기본방침으로 삼았기 때문인데, 진표가 부안 선계산에 머물면서 바윗돌로 자신의 육신을 내려쳐 마디마디 뼈를 부러뜨리거나 절벽에서 뛰어내렸던 행위가 바로 망신참이다.

정말 많은 문화재와 비등록 문화재, 성보분화재가 산재한 곳이 바로 법주사이다. 하루 종일 경내를 둘러보아도 다 보지 못할 곳이니 세밀하고 유려한 마음으로 둘러 보아야 할 것이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남양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