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에 이어 두 번째 방문한 사죄 사절단

▲ 한철수(편집위원)
7월 마지막 날 금곡동 홍릉에는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112년 전 을미사변으로 비운의 국모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명성황후의 묘인 홍릉을 찾아 사죄하러 온 것이다.

마침 이날 아침 미국 하원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 한국여성들을 성의 노리개로 삼았던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날로 랜토스 외교위원장이 “전후 올바른 선택을 한 독일과 달리 일본은 역사의 기억상실증을 적극적으로 촉진해 왔다”며, “끊임없이 역사를 왜곡하고 부정하며, 희생자들을 비난하는 등 장난을 치는 일부 일본인의 행동은 구역질나는(nauseating) 일”이라고 비판을 받은 날이라 그 뜻은 더 깊다.

그들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반성하는 전ㆍ현직 일본인 교사들로 구성된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사절단)’으로 일본에서는 전무후무한 유일한 단체다. 사절단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올바른 역사교육으로 한일우호증진에 기여하기 위해 지난 2004년 일본 구마모토현의 전·현직 교사들이 만들어 현재 활동하고 있으며, 2005년 5월에도 명성황후 시해범의 후손 두 명과 함께 명성황후의 무덤이 있는 홍릉과 경복궁 등을 방문했었다.

구마모토현에서 사죄사절단을 만든 이유는 을미사변에 가담했던 일본의 낭인 48명 중 21명이 이곳 출신이라는 점을 주시해야 한다. 이날 찾은 사절단 13명 중 조상의 잘못 된 행위를 업보로 안고 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날 명성황후 유택 앞에 일본 전통 가오리연과 목각 탑을 놓고 참배했다.

그들이 왜 하필이면 가오리연을 제단에 올렸을까. 하이쿠 시의 불후의 명작으로 꼽는 방랑하이쿠 시인 바쇼(松尾芭蕉. 1644~1694)가 지은 “가오리연이여/ 어제 하늘이 있던/ 그 자리”는 나이가 들고 세월을 절감할 때쯤 느끼는 즉, 노년에 파란 초봄 하늘에 떠 있는 가오리연을 시린 눈으로 바라보며 어릴 적 시간으로 영사기를 돌려 동심의 세계를 회상한 것으로, 항상 어딘가로 돌아가고픈 인간의 근원적 향수를 나타내는 대상이다. 어쩜 우리의 방패연과 같은 존재이며, 액땜과 회상의 대상이다.

목탑은 백제에서 불교를 전파하면서 일본전역에 영향을 미친 불교양식 중 하나이다. 그들의 사죄 방법은 그들의 정신적인 동경대상인 가오리연과 목각탑을 제단에 올리므로 명성황후와 그들이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로 유추할 수 있다.

그들의 일정을 살펴보면 회원들은 30일 입국하자마자 명성황후 시해 현장인 서울 종로구 경복궁을 찾았다. 3년 전에도 방한한 적 있는 오가사키 와조 회장(78세)은 “일본인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고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진실을 위해 모임을 만들었고, 한국인들에게 사죄의 뜻을 전하기 위해 다시 왔다. 끝까지 용서를 빌고 진정한 한·일 우호관계가 형성되길 바란다”고 입국 이유를 말했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한 경복궁 참배와 홍릉방문에 이어 여주 생가를 찾아 참배하고, ‘일본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낭독도 하였다. 이어 안중근기념관, 백범김구기념관, 서대문형무소, 민속촌, 판문점 등을 방문하고 3박4일 간의 일정을 마치고 2일 출국할 예정이다.

불우한 역사의 주인공 "내가 조선의 국모다."를 외치며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 10월 8일 죽음을 당한 명성황후가 홍릉으로 온 사연을 간추려 본다.

동구릉 숭릉 옆자리에 처음 묻히려 했으나 급변하던 당시 정치 상황 때문에 을미사변으로 집권한 김홍집내각은 시해 사건 이틀 뒤 시해 사실조차 발표하지 않았다. '왕비가 인민을 착취했다'며 황후를 서인(庶人)으로 폐위시켰고, 50여일 후에야 시해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막상 능 조성 공사가 한창이던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이 단행되면서 고종은 김홍집 등을 ‘을미4적’으로 규정해 체포령을 내렸고, 내각은 붕괴됐다.
명성황후 능은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한 뒤인 1897년 11월 22일, 청량리 홍릉에 장사를 지냈다.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한 지 25개월 만에 청량리 홍릉에 장사를 지냈다. 이후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승하하자 같은 해 2월 16일 경기도 남양주시 현재의 홍릉으로 이장됐다.

31일 사절단이 홍릉을 찾던 날.

미국 하원에서 '일본군위안부결의안'을 발의한 일인3세 마이크 혼다 의원은 “이번 결의안 통과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일본 정부가 결의안이 요구하는 대로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을 경우 앞으로도 지속적인 대화 노력을 펴 나갈 것." 이라고 강조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112년이 지났는데도 일본인들은 일본 정부의 외교 정책에 의한 잘못을 알지 못하고 있다"며 "조선 왕조의 궁에서 지력과 미모를 겸비한 황후가 일본 암살자 집단에 의해 살해된 것이 명백하다"라고 뜻을 밝힌 사절단.

일본 정부와 역사 관계자들이 모두 기억 상실증에 걸려있을 때, 혼다의원과 사절단이 있기에 행복한 2007년 8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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