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속리산 경내를 둘러본 다음 복천암(福泉庵)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충청북도 보은군(報恩郡) 내속리면(內俗離面) 사내리(舍乃里) 속리산에 있는 암자. 대한불교조계종 제 5 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산내암자이다. 720년(신라 성덕왕 19)에 창건되었다.

극락전의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다. 현존 당우로는 극락전·나한전·요사채 등이 있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2호·제13호인 수암화상부도(秀庵和尙浮屠), 학조등곡대사부도(學祖燈谷大師浮屠)가 있다. 높이 3.1m의 수암화상부도는 1480년(조선 성종 11)에 건립된 것이다.

법주사 금강문 앞의 다리를 건너기 전 우측으로 복천암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있다. 이곳에서 복천암 까지는 약 3.5키로 정도이다.

제법 먼 길이지만 길이 넓고 격하지 않아 어렵지 않게 차ㅊ아갈 수 있다. 마치 옛날의 비포장 시골길을 가는 느낌이넫 주변에 나무들이 자라고 계곡에는 물고기들이 많아 운치가 있다. 특히 갈겨니라고 하는 물고기가 많은데 갈겨니 (Zacco temmincki)는 경골어류 잉어과의 민물고기로 유명하다.

몸길이가 18㎝정도인 갈겨니는 갈견이, 눈검생이, 불가리라고도 한다. 몸은 길고 납작하며 뒷지느러미가 발달되어 있으나 피라미만 못하다. 몸빛은 등쪽이 청록갈색이고 옆구리는 은청색, 배쪽은 은백색이다.

피라미보다 눈이 크며 비늘이 작다. 수염은 없고 뒷지느러미는 길지만 피라미보다는 짧다. 옆구리에는 가로띠가 있다.

몸높이는 몸길이의 1/4이다. 등지느러미 11연조(軟條), 뒷지느러미 13연조이고 비늘수는 50∼52개이며 척추골수는 39∼40개이다. 비늘은 둥글며 생식기에는 붉은 빛을 띤다. 5월 하순부터 6월 말경에 걸쳐 산란하며 한국·중국·일본의 하천에 분포한다.
한참을 걸어오르니 목욕소이다, 철조망으로 제한하여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속리산 법주사에서 북천암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좌,우 양옆으로 울창한 노송이 즐비하게 서 있고 사이사이에 절벽과 괴석이 솟아 있는 사이로 맑은 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그 냇물에 10여인이 편히 쉴 수 있는 평평한 바위가 있고 그 아래 깊지도 않고 그렇다고 얕지도 않은 웅덩이가 있는데 "목욕소"라 부른다 세조는 속리산에서 피부병에서 대한 요양도 할 겸 고승들에게 국운의 번창을 기원하는 법회도 갖도록 하였다.특히 북천암에는 당시 유명한 학조대사(學組大師)와 신미(信眉), 학열(學悅) 등 법사들이 모여들어 대법회를 열었다.

세조는 법회 중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여러 신하를 물리치고 홀로 산책을 하다 이 웅덩이 앞에 이르러 갑자기 목욕을 하고 싶었다.

발이 시리도록 찬 물이었다. 세조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맑은 물에 심취하여 눈을 지그시 감고 천천히 목욕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세조 앞에 미소년이 나타나더니 "마마, 소생은 월광태자올시다. 약사여래(藥師如來-중생을 질병으로부터 구해주는 부처)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대왕의 병은 곧 완쾌될 것이니 너무 고심치 마옵소서 하고 사라졋다.

세조는 깜짝 놀라 눈을 뜨니 미소년이 서 있던 곳에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 너무 나 신기하고 신비스러운 일이었으나 세조의 마음은 가볍기만 하였다.세조가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을 대 보니 그렇게도 흉칙하던 종기가 깨끗이 어졌다는 것이다. 이와 걑이 세조가 목욕을 하고 병을 고쳤다 하여 "목욕소"라 부르게 된 곳이다.

사실 세조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곳에서 전설처럼 남아있다. 오대산에서도 물을 먹고 병이 낳았다는 문수보살의 전설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이처럼 불교에 의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그 설화가 설화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즉 단종을 폐하고 왕에 오른 세조의 입장으로서는 국민들의 성원을 무시할 수 없엇을 것이고 숭유억불을 하고 있지만 민간에 깊이 뿌리박은 쇼앙으로서 자신이 불교덕으로 용서를 받았다는 타당성을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한참을 오르자 갈라지는 길이 나오는데 무조건 문장대로 향하는 길을 따라가면 된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세심정 약수터에 다다른다.

작은 음식점이 있고 좌측으로는 복천암이고 오른쪽으로는 순조대왕 태실로 향하는 길이라고 쓰여있다. 약 500여미터를 걸어올라가니 드디어 오른쪽 산기슭에 작은 암자가 보인다.

복천암이다.
가파라 보이는 산기슭에 자리한 복천암은 스님들의 수도쳐인지라 관광객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오가는 행인도 마다하지 않으며 화장실 부근, 입구에는 신도들을 위한 공간도 있다.

즉 땀을 씯어내거나 물을 마실 수 있는 공간도 수도하는 스님들을 위한 공간 외에 오가는 등산객과 신자들을 위해 외부에 따로이 마련해 놓았다.

경내 출입이 제한되어 있지만 들어가 본다면 복천암은 두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곳은 선원의 공간이고 한 곳은 복첨암이다. 복천암은 일찍이 세워진 곳이고 선원은 나중에 세워진 곳이다.

풍수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복첨암과 선원이 어떤 공간에 지어졌는지 살펴볼 것이다. 아마도 절집을 보는 기준은 양택3요에 의한 기준일 것이다. 즉, 배산임수와 전저후고, 전착후관이라는 기준을 볼 것이며 그 다음에 양기풍수의 기본으로 득수국이냐? 혹은 평지국이냐 하는 것을 볼 것이다.

복천암은 득수국에 속한다. 산 깊은 곳인데 무슨 소리냐 할 듯하지만 분명 득수국으로 볼 이다. 왜 르 건지는 찾아가 보아야 이해가 되는 것이다. 왜 득수국인지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복천암은 배산임수를 지키고 전저후고라는 법칙과 정착후관이라는 법칙을 100% 적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찰과 향교, 서원의 대부분은 이법칙을 무시하지 않는다.

먼저 선원을 올라가 보았다.

[외부인 출입금지]구역이라 들아가지 않고 외부에서 살펴보았다. 외부인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지만 풍수적으로 중요한 무엇이 잇었다면 양해를 구해서라도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욕심이 생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선원이 골짜기 속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칼날 같은 계곡이어서 계곡풍, 살풍이 몰려드는 곳은 아니었지만 계곡은 계곡이니 혈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뒷산이 둥굴게 바람을 막고 팔요풍으로 파인 곳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복천암은 복천선원과는 사뭇 다르다. 복천암도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는데 어렵게 출입을 할 수 있었다. 과거의 주초석과 현대의 초석이 쌓인 길을 올라 요사채로 들어선다.

그리 오래전 건물이 아니고 특색이 있는 건물은 아니지만 조용하기가 산사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물을 한잔 얻어마시고 다시 올라 극락전에 다다른다.

극락보전은 복천암의 중심적인 당우로서 혈에 자리하고 있다. 입수는 극락보전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잘 파악이 되지 않는다.

단지 그 입수 뒤에 거대한 바위가 서 있는데 언뜻 보아서는 바위가 화표처럼 보인다. 그 바위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새겨져 있다.

사실 거대한 바위 밑이나 낙맥인 경우 혈처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호흡법이나 수련을 통해 땅으로 흐르는 기맥을 느낄 수 있다면 찾기가 수월해진다.

예를 들어 이 거대한 바위 아래 입수처가 있고 당판에 극락보전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건물의 좌향이 정격이지 않다보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혈상은 완벽하고 오악이 갖추어져 있으니 혈이라 할 것이며 혈상은 유상(乳象)이라.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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