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아 내일 논산가자”
“논산을 왜 가요? 군대 가면 당연히 갈 텐데...”
“훈련소 말고 여행가자”
“생각해 볼게요~”

올해로 고등학생이 된 아들이 단기방학이라 집에 혼자 있게 하기는 그렇고 이번 답사는 연초부터 논산여행에 참석할 것이라는 부원장님과의 약속을 했기에 아들을 두고 서라도 집을 나서야 할 상황이었다.

이렇게 시큰둥하게 대답을 했던 아들이 자기도 못이기는 척 따라 나섰다. 나는 내심 참 고마웠다.
‘별걸 다 고마워해야하나?’

라고 말을 하겠지만 머리도 다 커서 자신의 주장이 뚜렷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나이고, 아들의 입장에서는 또래도 없고 함께한 일행이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며 본인이 좋아해서 계획하거나 추진한 일이 아닌 이상, 요즘 아이들은 왠만해선 부모를 따라가질 않으려한다.

맨 뒷자리의 좌석을 배정받은 아들은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듣기 삼매경이다. 나는 일부러 앞에서 둘째 줄에 앉았다. 마침 내가 잘 아는 선생님이 먼저 앉아 계셔서 우린 합석을 했다. 마음은 아들과 함께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했으면 했지만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는 행색이

‘나를 건들이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고 나또한 편안하고 조금이라도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아들도 마찬가지로 오늘 하루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여유도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논산에 일찍 도착했다.
내가 알고 있던 논산은 2년 전쯤 관촉사와 계백장군 유적지, 개태사, 견훤왕릉을 다녀 간 적이 있었기에 그렇게 큰 기대를 안 하고 이번엔 빈 마음을 갖고 합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답사는 그야말로 환상속의 그대였다고나 할까? 오늘 나를 매료시킨 사람은 바로 명재고택에서 윤증선생을 만났기 때문이다.

먼저 명재 윤증(尹拯,1629~1714)의 인물을 살펴봐야 했다.

윤증은 고려 때부터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동북9성을 개척한 파평 윤씨며 명문가문인 윤관(尹瓘)장군과 그의 아들 윤언이(尹彦頤)의 후손이며 윤증의 조부인 윤황(尹煌)은 대사간을 지내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은 비중 있는 인물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율곡 이이와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고 조선 중기의 대표적 학자로 추앙받은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사위였다.

또한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는 성혼의 외손으로 서인의 대표적 계보를 이었고, 당대에 강하게 북벌론을 주장한 남인의 대표인 윤휴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과 교류했으며 그의 아들 윤증의 스승으로는 송준길이나 송시열, 김집 등 학문과 정치에서 당대 시대를 주름 잡던 명사들의 제자였다.

윤증은 조선후기 정치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부친인 윤선거 때부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는 분수령이기 때문이다. 윤선거와 윤증은 같은 성리학을 공부했지만 주자의 성리학만이 최고의 학문이라 여긴 송시열과는 다르게 양명학과 예학도 깊게 공부하여 실생활에 유용한 것이라면 그대로 적용시켜 실천한 유연하고도 온건한 사람이었다.

마치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떠오른다. 위기에 처한 나라의 현실은 생각하지 못하고 재조지은의 명분만 주장했던 서인들의 대책 없는 모습으로 오히려 인조반정을 만들어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의 역사를 만들었지 않는 가?

소론의 영수인 윤증은 일찍이 과거와 벼슬을 포기했지만, 이미 20대 후반 무렵 상당한 명망을 얻었다. 그는 1658년(효종 9)에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선비를 천거하라는 왕명으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천거되었다.

[명재연보]에 따르면 “이때부터 윤증의 명망과 실덕(實德)이 점차 높아졌다.” 그 뒤 윤증의 일생은 징소(徵召: 벼슬을 권유하면서 부름)와 사직의 과정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는 85세의 노령으로 별세할 때까지 공조좌랑ㆍ사헌부 지평ㆍ세자시강원 진선ㆍ사헌부 장령ㆍ집의ㆍ호조참의ㆍ대사헌ㆍ찬선ㆍ이조참판ㆍ우참찬ㆍ이조판서ㆍ좌참찬ㆍ좌찬성ㆍ우의정 등 수많은 관직에 18번이나 제수되었지만, 단 한 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끝에는 우의정을 제수하고 대신들이 5번이나 모시러 왔어도 14번의 상소를 올리고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보통 ‘백의정승’이라 일컫는다. 백의정승이란 비록 관복을 입지 않았지만 정승에 까지 올랐던 분이라는 뜻이다. 조선 500년 동안에 임금님을 직접 뵙지 않고 정승까지 올랐던 분은 명재 윤증선생이 유일하다고 한다.

학문의 경지에 올랐어도 선을 베푸는 선비의 고결한 인품이 있었기에 명재고택은 동학과 6.25전쟁이 발발했어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또 그는 지나친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면서 후손들에게 양잠을 금지했다. 이런 태도는 고결한 선비정신의 실천으로 높이 평가된다.

그의 종택(충남 논산시 노성면 소재. 중요민속자료 제190호)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되어 오늘은 내가 찾아오고 다음은 우리들 후손들이 찾아오는 고향 같은 푸근한 곳이며 윤증의 정신과 함께 기억되어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논산에 도착하자마자 윤증선생이 고택에서 나와 우리를 맞이하는 것 같았다.

담이 없는 명재고택은 조선시대 중기 호서지방의 양반가옥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고택으로 300여 년 전에 지어졌지만 그 때 이미 과학적 원리를 적용한 건축물로 명재고택은 필요한 곳만 지었다고 한다.

뒷산은 비보의 역할을 하는 소나무가 가득하고 혈자리인 우물이 있으며 그 우물을 가리기 위해 향나무로 에둘러서 미관상으로도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배치한 그 넉넉한 안목이 감탄을 자아낸다.

더불어 이 향나무는 물을 정화시킨다고 하니 그 슬기로움과 과학적 공감각은 귀감이 된다. 뿐만 아니라 채원과 정원 그리고 후원 속에 고즈넉한 장독대는 실용성과 경관으로 비교적 잘 처리한 조경의 지혜로 음양의 조화를 맞추고 원근법을 이용한 과학적인 구조를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또한 후손들의 정갈한 마음씨도 느낄 수 있었던 단아한 고택이라 말할 수 있다. 실재로 명재선생은 이곳에서 기거하지 않으시고 그 옆의 작은 초가삼간에서 주거하시며 병이 위독해지자 자손 및 제자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엄히 당부하기를 “상을 치를 때 중국(청)의 물품을 사용하지 말고, 묘표(墓表)에는 관직이나 재호(齋號)ㆍ‘선생’이라는 표현 대신 선비라고만 쓰라’고 당부했다.

평생 동안 징소(徵召)의 은혜를 입은 것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윤증은 1714년(숙종 40) 1월 24일에 85세의 긴 삶을 마쳤다

아들은 명재고택을 둘러보며 사진도 연실 찍어대며 해설사의 설명에 귀 기울인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대와 대조적으로 어느새 노란은행나무 만큼 자라 키가 훌쩍 큰 아들의 늠름한 모습이 내 카메라 앵글에 잡혔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윤증선생의 큰아버지 윤순거가 세운 교육시설인 종학당(宗學堂, 충남 논산시 노성면 소재. 시도유형문화재 152호)은 파평윤씨 자제들과 인척 자여질(子與姪)들을 가르쳐 이 종학당 출신자로 문과 급제자가 무려 46명이나 나온 곳으로 유명하다.

전국에 많은 문중 서당이 있었지만 종학당처럼 체계적이고 대규모로 이루어진 곳은 없고 더구나 오늘날까지 시설이 보존되고 있는 곳은 종학당 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이곳에 온 이유는 해설사님의 강력 추천이었는데 정말 못보고 돌아갔으면 후회할 만큼 명재고택과 종학당은 넓은 들판에 익은 곡식과 함께 내 마음을 힐링해준 곳이다.

언젠가 파주의 윤관장군묘에 갔을 때 그 위엄과 규모에 놀랐지만 파평윤씨 후손들이 파주에서 유지라 건들이지 못한다는 설명의 들었을 때도 그렇구나라고만 듣고 지나갔던 기억이 있었는데 이곳 종학당을 와보니 정말 대단한 종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구(舊)소련 대통령인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기념식수도 있었다.

정수루에 오르자 우리 일행을 아흔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김응주 선생님께서 단체 사진을 멋지게 찍어 주셨다. 정수루에서 아래를 내다보는 경관은 설명이 필요 없다. 그 자체가 그림이 되어 저절로 입속에서는 시를 읖고 추임새와 장단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온다. 또한 작은 발림의 동작들이 어깨를 들썩들썩하게 한다.

정수루는 종학당 옆에 위치하며 정면 중앙에는 현판 ‘淨水樓’가, 오른쪽과 왼쪽에는 ‘향원익청(香遠益淸)’, ‘오가백록(吾家白鹿)’이 각각 걸려 있다.

종학당과 비슷한 시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며 서재 마루와 누각이 연결되어 있어 학문을 토론하고 시문을 짓던 장소로 이용한 곳이다. 정수루 남쪽에 강당이 있는데, 파평 윤씨 자녀들이 해마다 여름에 예절교육을 받는 곳이라고 한다. 시간관계상 바로 이동을 해야 해서 찬찬히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계절이 바뀌더라도 다시 찾아오고 싶은 곳이다. 봄, 여름과 겨울은 어떤 만남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곳이다.

고종8년 1871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 때도 훼철되지 않고 보조된 유서 깊은 돈암서원(遯巖書院)은 원래 있던 숲말이 지대가 낮아 장마 때면 서원마당까지 물이 차오르는 일이 있어 188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온 이곳은 사계 김장생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가 배향되어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예학의 산실이다.

사실 우리나라 서원 9개를 세계문화유산잠정목록에 등재하여 2016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준비 중에 있어서 그런지 오늘의 돈암서원은 행사 준비와 공사로 분주해 (다음 주에 백일장이 열린다고 함) 매우 어수선했다. 그래도 내 눈길을 끄는 것은 강당의 역할을 했던 응도당(凝道堂)이다.

돈암서원에서 가장 빼어난 건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고 다른 서원 건축양식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맞배지붕으로 양 옆면에 하나를 덧댄 가첨지붕(눈썹처마)구조의 지붕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대들보는 크고 웅장하며, 생동감 있는 비늘무늬는 살아있는 용이 꿈틀대는 듯 익공의 화려함과 화반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건물로 창방위에 놓인 화반형 조각은 기둥사이마다 1개씩 얹었다.

단청을 안했어도 그 웅장함과 규모의 화려함은 우리를 압도해 보는 이들에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건물이며 사원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를 하고 있어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개태사(開泰寺)는 마찬가지로 입구부터 공사 중이다. 936년 왕건이 후백제 신검의 군사들과 싸워 승리해 후삼국을 통일했다는 기념으로 세운 고려시대의 호국불교사찰지다. 그래서 그런지 사찰 안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마치 고구려의 기상, 태극기의 도시 구리시처럼...

현재는 고려 초기 웅장했던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인근 토지를 매입하고 대웅전과 설법당을 짓는 등 불사(佛事)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고증이 필요한대 왕건의 초상화를 모신 어진전은 매우 화려한 왕건의 초상화로 금빛 찬란한 용포를 입으셨지만 부채를 들고 계신 21세기화한 어진을 그려 넣은 것이 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어디에 나오는 왕건 초상화로 그렸나요?” 라고 내가 물으니 설명하신 스님은 기록에 있다고만 말씀하시고 본인은 이곳에 온 지 얼마 안됐다고 하신다. 예술은 이미지의 변형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곳에 적용할 수 가 있는지... 예술과 역사는 다르기 때문 아닐까? 이렇게 혼자 되새기며 내 발걸음도 어수선하게 개태사 경내를 돌아보았다.


차에 올라타고 서울로 상행하는 버스 안에서 안의원님의 박학하시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개태사에서 받은 황량함을 눈 녹듯이 녹여주셨다.

동양의 시성들에서 부터 화담과 황진이, 지족선사까지 다양한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셔셔 박수로 환영하며 즐거워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제비꽃이라고 알려진 괴테의 “앉은뱅이 꽃의 노래”을 읊어 주셨는데 매우 감동적이었다.

어느 날, 들에 핀 한 떨기의 조그만 앉은뱅이꽃이 양의 젖을 짜는 순진무구한 시골 처녀의 발에 짓밟혀서 시들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앉은뱅이 꽃은 조금도 그것을 서러워하지 않는다. 추잡하고 못된 사내의 손에 무참히 꺾이지 않고 맑고 깨끗한 처녀에게 밟혔기 때문에 꽃으로 태어났던 보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행복의 의미를 다시 새기며 잠시나마 나의 10대, 20대는 어땠는지 과거로의 추체험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눈을 감고 새근거리며 잠자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 고단한 모습을 보니 아들에게도 보람 있던 날이었던 것 같았다. 아무 말 없이 잘 따라와 줘 고맙다.

윤증 선생이 학문을 대했던 자세와 인품, 그 명재고택이 유지될 수 있었던 후손들의 노력, 종학당 정수루에서 본 넓은 들판과 풍경, 논산의 높고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이 네가 힘이 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지칠 때 오늘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빠와 동생은 참석하지 못했지만 엄마와 함께한 이 소소한 여행이 내 아들에게 추억의 한 조각이 되어서 나중에 진짜 논산 훈련소에 올 때 즐거운 기억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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