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세의 짧은 생애,,, 묘비번호 205241호 주인공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으련다."
-가난한 소설가의 가난 이야기, 신경향파의 선두주자 
-1920년대 생활상을 다룬 '탈출기, 홍염, 담요' 등이 대표작


망우산 사색의 공원을 산책로 박인환시인의 묘를 참배하고 오른쪽 길을 따라 2~3분을 가다보니 검은 색의 표석이 있다. '작가 최학송문학비'라고 쓴, 망우산 사색공원의 어지간한 근현대인물들은 커다란 표석이 있음에도 최학송의 묘 입구에 세워진 표석은 가족과 지인들이 세웠다. 죽어서도 왠지 빈궁해 보인다. 표석에서 10m 정도의 언덕을 오르면 양지바른 곳의 만년유택(萬年幽宅)이 두 번째 사자후(死子逅)의 주인공이다.

망우리 사색공원 산책로 오른쪽으로 5분 거리에 있는 서해 최학송의 문학비.

묘비번호 205241. 미아리 공동묘지에 있던 묘를 수원으로 수원에서 다시 이리로... 그의 삶도 그렇고 죽어서도 방랑이다.

암울했던 일제 때 자신의 가난을 경험삼아 자전적 소설을 구가하던 우리나라 체험문학, 저항문학, 신경향파문학을 일깨운 서해(曙海) 최학송(崔鶴松). 그와 가난이 어떤 문학을 잉태했는지 이야기 해본다.
여기서 '사자후(死子逅)'란 '죽은 이와 우연히 만나다 또는 죽은 이와 만나 허물없이 지내다'라는 의미이다. (글쓴이 주)

가난은 곧 문학이다.

선생은 1901년 함경북도 성진(城津)군 임명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학송(鶴松), 아호는 서해(曙海), 설봉(雪峰) 또는 풍년(豊年)이라 불렀다.
서해의 아버지는 소작농이다 혹은 작은 한약방을 했다는 등으로 알려졌지만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에는 그를 알고 연구하는 이들은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서해 최학송

신경향파문학(新傾向派文學)의 기수로서 각광을 받았던, 그의 초기 작품 중 '탈출기'는 살 길을 찾아 간도로 이주한 가난한 부부와 노모, 이 세 식구의 눈물겨운 참상을 박진감 있게 묘사한 작품으로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그가 추구한 새로운 문학의 장르인 빈곤문학은 모두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펼쳐나간 것이라 서해선생만이 지닌 간결하고 직선적인 문체임에도 큰 호소력을 내 뿜고 있다.

예술적 표현이 작았던 탓에 초기의 인기를 지속하지 못하고 불우한 생을 살다가 1932년 3월 위문협착증으로 출혈이 심해져 같은 해 7월 6일 관훈동 삼호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나이 31세로 문학과 이승과의 인연의 끈을 놓았다. 그는 1924년 1월, 동아일보에 '토혈(吐血)'을 발표한 이래로 8년 동안 60여 편이라는 적지 않은 작품을 발표한 우리의 근대소설사에 비교적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가이다.

서해가 세상을 떠난 지 3주년이 되던 1935년 7월에 친구 박상엽은 그의 소년 시절에 대해 "그는 외아들이었다. 누님이 하나 있었는데 출가한 뒤 죽었다는 것이다. 날 때부터 서해는 축복된 가정에 태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견묘(犬猫. 개와 고양이)의 사이와 같은 아버지의 미움과 어머니의 사랑 밑에서 자랐으니 어릴 때부터 음울한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것도 상상할 수 있다.

그의 단편 소설 '박돌의 죽음'을 읽으면 돈밖에 모르고 인정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한의가 나온다. 서해의 아버지도 한방의였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회상했다.

1910년 아버지가 간도(間島)지방으로 떠나자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년시절 한문을 배웠고, 성진보통학교에서 3년 정도 수학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만 한 학교교육은 받지 못했다. 소년시절을 가난하고 피폐한 생활을 하면서 "청춘(靑春)", "학지광(學之光)" 등을 찾아 읽으면서 문학에 눈을 떴다. 문학에 눈을 뜬 후 그는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통하여 춘원에 심취한다.

1918년 고향을 떠나 간도로 건너가 품팔이, 나무장수, 두부장수 등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도 문학에 손을 놓지 않았다. 1923년 간도에서 나와 국경지대인 회령에서 잡부 일을 하였다.
그의 체험은 그의 문학의 바탕이 된다. 이시기부터 '서해(曙海)’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거친 노동일을 하면서도 늘 동경하던 춘원과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광수를 만나고 소설가의 길로 들어서

춘원 이광수 

호의호식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청년기에 접어든 서해는 1924년 문학가로 출세 할 것을 결심하고, 노모와 처자를 남긴 채 혈혈단신 서울로 와 늘 마음속으로 존경하던 춘원 이광수를 찾는다. 서해는 춘원의 소개로 남양주시 봉선사(奉先寺)에서 불목하니 생활을 한다.

그의 봉선사 승려생활은 일기형식의 '백금'이란 소설에 잘 나타난다. "갑자 시월 삼십일(甲子 十月 三十日) 청(晴) 소한(小寒). 나는 중이 됐다. 장삼을 입고 가사를 메고, 목탁을 드니 훌륭한 중일세! 세상은 나더러 세상이 귀찮아서 승문에 들었거니 믿는다. 하하하. 내가 참말 중일까? 하하하" 여기서 갑자년은 1924년이 된다.

3개월 정도 승려생활을 하던 서해는 다시 서울로가 조선문단사(朝鮮文壇社)에 입사한다.
서해의 문단활동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보다 먼저 그가 15세 때인 1918년 3월에 "학지광(學之光)"에 '우후정원(雨後庭園)의 월광(月光)', '추교(秋郊)의 모색(暮色)', '반도청년(半島靑年)에게' 등 산문시 3편을 발표했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서해가 최초로 동경유학생들의 잡지인 학지광에 산문시 3편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춘원의 배려였을 것이다.

1923년에는 학송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서해’라는 가명으로 쓴 시 '자신(自身)'을 "북선일일신문(北鮮日日新聞)"에 기고했는데, 이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한 음악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필명을 아예 '서해'로 했다고 한다.

1924년 1월 "동아일보 월요란(月曜欄)"에 단편소설 '토혈(吐血)'을 발표했으나, 그의 정식 문단 데뷔는 같은 해 10월에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단편소설 '고국(故國)' 추천되면서이다. 비로소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김기진의 권유로 카프에도 가입했다. 1927년에는 '조선문예가협회'의 간사직을 맡았으며, 1926년에 휴간한 '조선문단'을 남진우가 인수하자 1월에 다시 입사하지만 4월에 또 실직했다.

기생들이 만든 잡지 '장한' 편지일도 맡아

1927년 서해선생이 편집장으로 발간한 "장한' 이 잡지는 당시 기생들의 동인지이다.

지난 2005년 일제시대 기생들이 만든 동인지인 "장한(長恨)" 창간호 원본이 발견됐다. 화류계 여성으로 치부되고, 천대받던 기생들이 약 80년 전인 1927년 스스로의 권익보호를 위해 만든 잡지로, 창간호 원본이 처음 소개되었다. 이 잡지는 도서애호가이며, 원로 출판인 최덕교(崔德敎) 선생의 개인서재에서 발견되었다. 

이 책의 발간일은 1927년 1월 10일이며, 편집·발행인은 김보패(金寶貝), 인쇄인은 노기정(魯基貞), 인쇄소는 한성도서며 발행소는 ‘장한사(長恨社)’다. 흥미를 더하는 것은 장한사의 주소가 ‘서울 관수(觀水)동 14-1’로, 당시의 대표적 요리집이었던 ‘국일관’의 주소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는 국일관에서 자본을 대고, 발행인 김보패는 가명이거나 필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110여쪽에 달하는 이 책의 가격은 40전, 필진은 대부분 당시 이름을 떨쳤던 유명 기생이다.

소설가 김유정이 사랑한 여인이자 훗날 여류 판소리의 대가로 꼽힌 명창 박녹주(朴綠珠)는 물론 김월선(金月仙), 윤옥향(尹玉香), 김남수(金南洙), 백홍황(白紅黃) 등 소개된 40여 편의 글 대부분이 현직 기생에 의해 직접 쓰였다.

중견작가의 반열에 있으면서 가난을 늘 달고 다니던 서해에게는 장한의 출판은 흥미로웠고, 주머니 사정도 좋아지니 일석이조라 편집 일을 맡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문사들과 대중은 장한을 기생들이 낸 '도색 잡지'로 치부하고, 편집장이었던 궁핍한 서해는 지식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된다.

"결국 서해는 (중략) 더 지저분한 잡지에까지 손을 대었는데, 하다못해 기생들이 하던 잡지에까지 손을 대어 보았다. 다 먹기 위함이었다."
-1933년 대한매일신보 기사-

당시 사회의 이슈거리였던 이 책은 발행 2회 만에 폐간한다.

간도와 함경도 유랑은 서해의 문학적 배경

그의 소설의 경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최서해

첫째, 조국에서 살지 못하고 간도로 유랑한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인 '고국(故國)-1924.조선문단','탈출기(脫出記)-1925.조선문단','기아(饑餓)와 살육(殺戮)-1925.조선문단', '돌아가는 날-1926.'홍염(紅焰)-1927.조선문단'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함경도 지방 사람들의 무식하고, 가난한 노동자나 잡역부들의 생활을 그린 소설로 '박돌(朴乭)의 죽음-1925.조선문단', '큰물이 진 뒤-1925. 개벽', '그믐밤-1926.신민', '무서운 인상-1926.동광', '낙백불우(落魄不遇)-1927.문예시대', '인정(人情)-1929.신생' 등의 작품이다.

셋째, 잡지사 주변을 맴도는 문인들의 궁상맞은 생활을 그린 '팔개월(八個月)-1926.동광', '전아사(錢迓辭)-1927.동광', '전기(轉機)-1929.신생' 등의 소설이다.

1918년부터 1924년까지 간도와 회령군에서 육체노동을 한 경험은 그가 작가가 되었을 때, 가난과 지주들의 착취로 고통을 받던 민중들의 애절한 삶을 담아내게 한다. 이것이 그의 문학적 특징이다. 이러한 빈궁은 사회적 소산이라기보다 개인적인 체험에서 더욱 절실히 느낀 그였기에 그의 문학을 빈궁문학 또는 체험문학이라고 말한다.

서해 소설의 문학적 재조명

1920년대는 '빈곤화의 시대'로 불려지고 있다. 그것은 일제에 의한 국권 상실의 상태에 직면함으로써, 자각과 계몽의 정신적 진보와는 별개로 경제적으로는 궁핍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시대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기아와 고통을 소재로 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내재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시대 소설에 있어서의 가장 커다란 특징을 꼽는다면 '가난에 대한 인식' 이라고 할 수 있다.

20년대를 영유한 서해의 소설이 어느 정도 연구되어 왔고,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를 몇 사람의 주요 연구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서해선생의 일생을 논하다. '탈출기'를 중심으로.

"1950년대 백철은 최서해의 소설이 경향파 문학으로 가치가 있다 평가했으며, 60년대 말 김우종은 서해의 소설은 빈궁과 반항의 문학이며 사상설이 빈곤하고 소설적인 기교가 부족하다 평했다. 70년대 들어와서는 좀 더 세밀한 비평이 행해져 '서간체와 정경묘사체'를 효과적으로 사용했으며(김윤식/김현 론), ‘눈물과 울음’이 지배적인 톤을 이루고 있다(김주연 론), 소설을 양식화하면서 하층인에서 지식인으로 관점의 상승을 꾀했다(조남현 론) 등의 평가를 받았다."
-신춘호, "최서해- 궁핍과의 문학적 싸움", 건국대학교출판부, 1994,


"그의 작품이 소설인지, 수필인지, 또는 서간문인지 구분하기가 모호한 점이 없지 않다. 그리고 서해는 늘 자신이 관찰자(觀察者)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작품의 가운데에 놓이기를 원했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작가로서보다는 작품의 주인공이 되기를 더더욱 원했던 작가였다.

서해의 이러한 버릇은 문학적 역량이 어느 정도 쌓이고 명성이 높아진 이후에 서서히 없어지며, 후기작품에서는 스스로 냉철한 관찰자의 위치로 돌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영성. "최서해 문학연구서설", 도서출판도리, 2006.

"빈궁상의 제시는 사회적인 소산이 아니라 그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나온 것으로 '체험의 작품화'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빈궁 속에 있는 사람들의 호소와 절규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1920년대의 경향문학의 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김영화. "현대한국소설의 구조".태광문화사. 1977.

서울막걸리와 뇌종담배를 올리고 묘를 살피다.

대표작 '탈출기'에서 서해를 만나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으련다. 나에게는 고민이 있다. 내가 어째 글을 쓰며 쓰려고 하는가? 내 글이 과연 많은 노동자, 인쇄 직공의 수고를 빌려 세상에 내놓을 가치가 있는 가. 있다 하면 있거니와 없다 하면 나는 백일청천(白日晴天)에 낯을 못 들 죄인이다. 죄인 되기를 누가 원하랴. 나는 양심의 부끄럽지 아니한 글을 쓰련다. 나는 나의 사사로운 감정을 그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경험 없는 것은 쓰지 아니하련다."
-1925년 2월 24일자 일기에서

가난에 시달리다 못해 고국을 등지고 간도 땅으로 살길을 찾아 나섰던 빈농이 차디찬 현실에 의해 꿈이 좌절당하는 과정과 1920년대를 전후한 수난사의 한 단면을 솔직 담백하고, 박진감 넘치게 그렸다. 1920년대 문제작의 하나로 지목받는 '탈출기'는 흔히 자연발생기 프로문학의 대표적 작품으로 거론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처절한 빈궁생활을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간체 형식을 취한 소설이다. 주인공 박군이 극도의 빈궁에 허덕이는 가족을 버리고 XX단에 가입하여 사회운동을 하게 된 이유를 친구 김군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고백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서간체 형식이 도입된 것은 소설이 일반적으로 지닌 허구성보다는 서간문이 지니는 사실성에 입각하여 주제를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로 보여 진다. 즉 내용의 전달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사건의 제시보다는 주인공 내면 심리를 독자에게 펼쳐보여서 독자를 이해시키려 하는 것이다.

"묘비의 한 켠. '그믐밤' '탈출기' 등 명작을 남기고 간 서해는 유족의 행방도 모르고 미아리공동묘지에 수원에 누웠다가 여기 이장되다-위원일동" 표석의 내용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살펴보면, 주인공인 화자(話者)는 박군이며, 나이다. 나는 고향을 떠나 간도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 집을 탈출[脫家]한 가난한 지식인. 세상을 성실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빈궁한 현실과 허위에 찬 제도 때문에 저항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 현실의 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단에 가입한다.

아내는 보조적 인물. 순박하고 수줍음을 잘 타는 시골 여인으로 표현된다. 어머니는 가난하게 살지만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당시 한국 여인의 전형적 모성(母性)을 보여준다. 나의 편지의 수신인인 김군은 나의 탈가(脫家)를 반대하는 인물로 '나'가 상정한 가상적 인물이다.

시간적인 구성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되 과거의 삶을 회고하는 허구적 시간이며, 공간적으로는 만주 간도 일대가 배경이 되고 있으며, 총 6단락으로 구성하고 있다.

"김군 ! 내가 고향을 떠난 것은 오 년 전이다. 이것은 군도 아는 사실이다. 나는 그 때 어머니와 아내를 데리고 떠났다. 내가 고향을 떠나 간도로 간 것은 너무도 절박한 생활에 시든 몸이 새 힘을 얻을까 하여 새 희망을 갖고 새 세계를 동경하여 떠난 것도 군이 아는 사실이다."-탈출기 도입

주인공 '나'는 5년 전 어머니와 아내를 데리고 새 삶의 터전이요, 기름진 땅이라는 간도(間島)를 찾아갔다. 그곳에만 가면 농사를 지어 배불리 먹고 무지(無知)한 농민을 가르쳐 이상촌(理想村)을 만들겠다는 부푼 꿈이 있었다. 그러나 간도에는 빈 땅이 거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중국인 소작인 노릇을 해보지만 빚을 갚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면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으로 노력하지만 빈곤은 날로 심해만 갔다. 어느 날, 임신한 아내가 귤껍질을 주워 먹는 것을 보고 '나'는 심한 갈등과 자책감에 빠졌다. 생선 장수, 두부 장수를 하면서 연명했지만 갓난아이는 젖 달라고 보채고, 겨울이 닥쳐오자, 두부 장수도 땔나무가 있어야 할 수 있기 때문에 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순사에게 잡혀 매를 수없이 맞았다.

'나'는 세상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으나 세상은 '나'와 어머니와 아내까지도 멸시하고 학대했다. 그리하여 하루라도 괴로운 생활과 기한(飢寒)에서 벗어나려면 가족을 모두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김 군 ! 나는 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나부터 살려고 한다. 이때까지는 최면술에 걸린 송장이었다. 제가 죽은 송장으로 남(식구들)을 어찌 살리랴. 그러려면 나는 나에게 최면술을 걸려는 무리를, 험악한 이 공기의 원류를 쳐부수어야 하는 것이다. (…중략…) 이 사상이 나로 하여금 집을 탈출케 하였으며 ××단에 가입케 하였으며 비바람에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벼랑 끝보다 더 험한 ×선에 서게 한 것이다."-탈출기 결론

그러나 그때 ‘우리는 여태까지 속아 살아왔다. 우리는 우리로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어떤 험악한 제도의 희생자로서 살아왔었다.’는 분노가 머릿속에서 꿈틀대었다. 그리하여 이 제도는 그냥 둘 수 없다는 현실 인식으로 '민중의 의무를 이행'하겠다고 의식의 전환을 하고서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까지 버리고 ××단에 가입하게 되었다.

[사족] 서해의 창작의지는 남달랐다. 서해는 자신의 작품을 ‘아들’이라고 부를 만큼 창작에 많은 애정을 가진 작가였다. 그가 글 쓰는 작업에 그토록 치열하게 몰두했던 이유는 자신의 체험이자 곧 하층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던 의지에서였다.

그러나 서해는 <小說 쓴 뒤>에서도 밝혔던바 “소설은 사실을 기초로 하고 인격을 토대로 써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空言空想으로 끝나 실패하게 된다.”는 그릇된 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많은 근로자들의 아픔을 대변해야 한다는 쓸 데 없는 부담을 안고 소설을 썼다.

서해는 8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창작기간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 나갔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도 당시대의 아픔을 충실히 증언하고자 노력한 작가였다. 그래서 일부 평자들은 그의 작품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으나 결국 우리 문단에 있어 새로운 흐름의 시원(始原)이 되었음을 크게 평가하여 당시대 대표작가의 한사람으로 인정하게 된다.

서해선생과의 사자후.

서해 최학송선생과 사자후를 마치며

서해선생의 삶의 흔적을 찾으려 동분서주했지만, 그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아 애를 먹었다. 어지간한 문사들은 후원회, 기념회 등을 통하여 그들의 문학적 가치를 따지고, 분석하고, 비평하지만 서해선생의 기록을 찾기란 수월하지 않았다.

본고는 신춘호 선생의 '최서해- 궁핍과의 문학적 싸움', 김우종 선생의 '가난한 백성의 증언', 이영성선생의 '최서해 문학 연구 서설' , 글쓴이 미상의 '최서해의 문학과 신경향파 문학의 특징' 등을 토대로 재구성했음을 밝힌다. 나는 시인이다. 소설은 잘 모른다. 아니 문외한이다. 서해 선생을 만나며, 20년대 문학의 태동기의 잊고 있었던 작가들의 모습이 아련하다. 그리곤, 다음 사자후를 준비한다.

서해 최학송선생 문학비앞에서 사자후를 약속하다.

***서해 최학송의 연표***

서해 최학송은 실제로 머슴살이로, 방랑객으로, 아편장이로, 두부장수로, 인부로, 또 고국에 와서는 승려로 전전하면서 배고픔 때문에 죽음과 직면했던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그의 소설은 1920년대 조선 민중의 고난에 찬 삶의 모습을 소재로 하였는데, 이는 작가의 체험과 무관치 않은 절실한 문제였다.

■ 1901년 5월 - 함경북도 성진군 임명(臨溟)에서 한의사의 외아들로 출생. 아명은 저곡(苧谷), 
■ 1915년(14세) - 성진보통학교 5학년 중퇴
■ 1917년(16세) - 가출한 부친을 찾아 만주 간도로 감. 이광수의 '무정(無情)'을 읽고 감명을 받음.
■ 1918년(17세) - "학지광(學之光)"에 '후정원(後庭園)의 월광(月光)'등 산문시 3편 발표.
■ 1920년(19세) - 결혼했으나 빈곤한 생활 때문에 곧 이혼하고 뒤이어 재혼했으나 부인이 얼마 후 사망.
■ 1923년(22세) - 간도(間島)에서 귀국 국경 부근의 정거장에서 노동자로 생활. "북선일일신문(北鮮日日新聞)"에 서해(曙海)라는 필명으로 시 '자신(自身)'을 발표.
■ 1924년(23세) -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단편 '고국(故國)'이 추천되어 문단 데뷔. 이광수를 찾아 상경, 양주에 있는 봉선사에서 3개월간 승려생활.
■ 1925년(24세) - 조선문단사 사옥이었던 방인근의 집에서 기숙하며 활발한 창작활동. "조선문단"에 단편 '십삼원(拾參圓)', '탈출기(脫出記)', '박돌(朴乭)의 죽음' 등 발표. "개벽(開闢)"에 단편 '큰물 진 뒤'를 발표하여 일약 중견작가가 됨.
■ 1926년(25세) - 문우였던 조운(曺雲)의 누이동생 조분려와 재혼. 각종 문예지에 '폭군(暴君)', '백금(白琴)', '그믐밤', '무서운 印象' 발표.
■ 1927년(26세) - 조선문단(朝鮮文壇), 현대평론(現代評論) 등의 잡지사에 종사. 단편 '홍염(紅焰)', '낙백불우(落魄不遇)', '전아사(錢迓辭)' 등 발표.
■ 1928년(27세) - 중외일보(中外日報)에 입사. 단편 '갈등(葛藤)', '부부(夫婦)' 등 발표.
■ 1929년(28세) -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입사, 기자로 근무. 단편 '인정(人情)', '전기(轉機)', '무명초(無名草)', '주인아씨' 등 발표.
■ 1930년(29세) - 매일신보에 장편 '호외시대(號外時代)' 연재 발표.
■ 1931년(30세) -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승진. 창작집 "홍염(紅焰)" 간행. 위병 악화로 병원에 입원.
■ 1932년(31세) - 경성의전 병원에서 위문협착증 수술 후 출혈과다로 7월 9일 사망.

망우산에는 17명의 애국지사 문인, 예술인 외에도 역사의 굴레를 이야기 할 많은 사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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