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여주시 산북면 소재지 부근은 후리와 상품리로 이루어져 있다. 부근에 원상(元庠)의 묘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상품리 산나골의 뒷산 구릉에 남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원상의 묘를 찾아 나섰다지만 찾을 수 없었다.

2009년 3월 11일, 새로이 깔린 산나골 골자기까지 도착하여 계곡을 오르니 좌측으로 묘역이 있을 것 같다.

긿이 끝나는 곳에서 불과 5분의 거리가 되지 못하는 거리였다. 마을 노인들에게 듣기로는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불과 5분의 거리에 원상의 묘가 있다 했다. 관리가 되지 않아 민묘로 남았고 후리 일대의 거문세족이었던 원씨들은 모든 재산을 팔아갔다고 했다. 그래도 묘역을 다듬을 것이라 생각했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200여미터를 들어가 좌측 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산능의 길목에서 우측으로 올라가자 바위들이 보인다. 그 너머로 묘역의 흔적이 보였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 묘역이 있고 비석을 살펴보니 완산이씨(完山李氏), 이덕여(李德輿)의 묘였다.

완산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939가구 9,62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동향(同鄕)인 전주이씨와의 관계는 상고할 수 없다.

완산이씨(完山李氏)에 대한 자료는 구하기가 어렵다. 조선시대에 과거 급제자는 적지 않은데 이현당(李賢○), 이현충(李顯忠), 이수철(李壽鐵), 이충원(李忠元), 이익한(李翊漢, 1609 己酉生), 이야(李○, 1648 戊子生), 이용원(李容元, 1833 癸巳生), 이장(李璋, 1833 癸巳生) , 이발(李拔, 1833 癸巳生), 이억상(李億祥, 1833 癸巳生)등 모두 414명이 있다.

문과 77명, 무과 55명, 사마시 200명, 역과 65명, 의과 9명, 음양과 6명, 율과 2명이다. 능호관 이인상은 완산이씨 밀성공파로 백강 이경여의 현손이다. 작품으로는 [설송도]가 있다.

완산(完山)은 전주(全州)의 옛 지명이다. 전주는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成)에서 유래하며, 백제시대에 완산(完山) 또는 비사벌(比斯伐)·비자화(比自火) 등으로 불렸다가, 555년(위덕왕 2)에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이덕여의 비문을 살펴보니 통덕랑 (通德郞)이다. 그의 부인은 청송심씨였다. 통덕랑은 정5품 문관벼슬이다. 지금의 중앙정부 과장급인 4급 서기관 정도로 보면 되겠다.

통덕랑은 조선시대 문산계의 하나로 문관정 5품 상계로 통덕랑 이하는 낭품계로서 사라고도 불렀다. 통덕랑은 향리들의 한품으로서도 중요하다. 향리의 호장들이 스스로 통덕랑이라 자처하였다는 것이나, 토관계의 한품이 정5품이었던 것도 이것과 관계가 있다.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인명에서도 이덕여의 이름과 약력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의 묘역은 나름의 뛰어난 바가 있으니 눈여겨 보지 않을 수도 없다.

주산을 제쳐 두더라도 묘역에 이르는 입수룡이 짧게 휘어지고 지현자로 움직인다. 굴곡입수는 아니라 해도 강한 기맥을 느낄 수 있다. 당판은 매우 안정되어 있다. 입수에서 우측이 조금 넓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측면으로 선익의 기맥이 발달하여 귀성(鬼星)이 매달린 현상이다. 귀성은 응결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

당판을 지나 전순을 살펴보면 새의 주둥이처럼 생겨보인다. 전형적인 순(脣)의 형상이다. 이 형상 아래에는 바위들이 줄지어 있다. 강한 바위의 존재는 기맥의 강함과 연결된다. 즉 강한 기맥의 응결이라는 증거로 보는 것이다.

묘역에서 전순을 지나 내려가면 낮은 굽이를 지나쳐 다시 올라간다. 전형적인 비룡형의 안산(案山)이다. 이 안산의 존재는 이 묘역이 지닌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교쇄 또한 매우 뛰어남을 볼 수 있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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