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여주군 산북면 백자리에는 선조대의 문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까지 호종(扈從)하였던 충신 이충원의 묘역이 있다. 절골 마을의 뒤쪽 능선에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2009년 3월 11일, 일행은 여주군 산북면을 향해 차를 달렸다. 구리방향에서 6번 도로를 이용해서 강변을 따라 달린다.

영평에서 양평대교를 건너 88번 도로를 타고 다시 남쪽으로 달린다. 2010년에는 여주 양평간 고속도로가 개통된다고 들었는데 아직 도로개통은 요원해 보인다.

이포대교에서 올라온 길과 양평 강상면에서 내려온 길이 만나는 곳이 세월리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98번 도로를 타고 10킬로미터를 가면 산북면 소재지이다.

그런데 백자리는 세월리와 산북면 소재지가 있는 후리와 중간지점이다. 이곳 백자리의 절골마을 뒤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제각이 나타나고 표주막모양의 골짜기 안에 이충원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제각과 사당은 최근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상고하거나 눈을 잡는 기물은 보이지 않는다. 재각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묘역으로 올라간다.

이충원의 묘는 쌍분(雙墳)으로 구성되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 3, 폭 77, 두께 35), 상석(높이 24, 폭 138, 두께 85), 향로석(높이 44, 폭 34, 두께 32), 망주석(높이 154, 폭 40, 두께 35), 문인석(높이 137, 폭 44, 두께 38)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망주석을 세운 위치가 계체석 안쪽의 봉분 바로 옆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금관조복을 입은 문인석엔 이끼가 많이 껴있으나 상태는 양호하다. 쌍분의 사이에 방부원수 양식의 묘표(총 높이 154)가 건립되어 있다.

원수형(圓首形)의 비신(높이 124, 폭 53, 두께 18) 앞면에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완양부원군(完陽府院君) 겸판의금부사(兼判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이공지묘(李公之墓)”라 쓰고 비신의 좌측에 “천계(天啓) 이년(二年) 임술(壬戌, 1622, 광해군 14) 구월(九月) 초사일(初四日) 입(立)”이라 연대를 새겼으나 음기는 따로 마련하지 않았다.
백대리석의 비신은 검게 산화되고 많이 박락되어 판독이 까다로운 실정이고, 방부에는 복련과 안상을 장식하였다.

이충원(1537~1605)은 누구인가? 본관은 전주, 자는 원보(元甫) 혹은 원포(圓圃), 호는 송암(松菴)·여수(驪叟)이고 정종의 제10왕자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현손이며 영선감(永善監) 이간(李簡)의 아들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장원급제 후 출사하여 홍문관수찬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형조참의에 재직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까지 호종(扈從)하였고, 환도(還都) 후 형조참판에 특진되었다.

이후 첨지중추부사,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으며,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완양부원군(完陽府院君)에 봉해지고,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글씨에도 능해 고양시의 계원군(桂原君) 이의(李艤) 신도비와 화성시의 조계상(曺繼商) 신도비를 썼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음택의 가장 중요한 주안점은 기맥이다. 기맥은 기본이며 기맥이 뭉쳐있는 곳이 혈이라 부르는 것이다. 기맥은 능선을 따라 흐른다. 능선이 그치면 기도 그친다. 이충원의 묘는 기맥이 그친 곳에 자리하고 있다.

가장 이상적인 음택은 기맥이 흐르는 곳에 뭉친 형상. 즉 혈이다. 혈은 고유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돌출되어 있다. 지나치게 기울어진 땅이나 넓은 땅, 갈라지고 흩어지는 노년기 산에서는 혈이 결지되기 어렵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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