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명당은 많이 있지만 광릉내에서 30여분 거리에 있는 가평군 상면 태봉리에 있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이정구 선생의 묘는 오래 전 반복해서 찾아보았던 곳이고 회원들을 모시고 몇 번인가 관산(觀山)을 갔었지만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 곳이다. 또한 아무리 보아도 마음을 잡아당기는 매력이 있는 곳이기도 하기에 선뜻 추천을 했다.

“그렇게 좋아?”
차를 몰던 최형이 물었을 때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가만히 생각하니 최근 풍수를 배우기 시작한 최형은 아직 월사의 묘를 본 적이 없었다. 최근 부쩍 재미를 붙인 최형은 틈만 나면 관산을 가자고 조른다. 오래 걸리지 않아 내가 아끼는 관산지를 모두 보여주어야만 할 것 같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선생 묘소를 찾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서울에서 월사 이정구 선생의 묘역을 찾아간다고 하면 구리에서 방향을 틀어 퇴계원 방향으로 길을 선택해야한다. 서울 강남에서 찾아온다면 강변으로 달려 강동대교를 건너 구리 톨게이트를 거쳐 퇴계원 앞까지 한숨에 내달릴 수 있을 것이다.

퇴계원 부근에서 일동이라 쓰여진 길을 따라 퇴계원 외곽으로 난 47번 국도를 따라 달려야 한다. 순식간에 장현을 지나고 광릉내를 드나들지 않고 스치듯 지나칠 수 있을 것이다. 평상시에도 비교적 잘 닦여진 2차선도로는 차가 그다지 많지 않다. 차는 광능내를 지나 내촌면 사무소 외곽도로를 달려 일동이라고 쓰여진 도로만 따라 달리면 된다.

한참을 달리면 비스듬한 언덕이 나온다. 언덕을 오르면 검문소가 나오고 길이 갈라진다. 이곳이 서파 검문소다. 2차선 도로를 직진하면 일동과 운악산(雲岳山) 방면으로 향하는 길로 왕복 2차선도로로 2003년경부터 일부 구간이 4차선으로 개통되었고 오래 걸리지 않아 이동과 금화로 이어지는 왕복 4차선이 개통될 것이다. 2006년 추석에는 이동면 도평치까지 개통되었다.

서파 검문소에서 오른쪽으로 나가면 가평 현리다. 흔히 서파 검문소라 불리는 곳에서 현리로 이어지는 1차선 도로를 선택해야 한다. 왕복 4차선 도로에서 [현리]라는 표지판을 따라 길을 바꾸면 다시 길이 갈라지는데 우회전하면 명덕온천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계속 직진하면 가평군 상면에 다다른다.

불과 8키로의 거리에 가평 상면과 하면 소재지가 연이어 붙어있다. 겨우 다리 하나를 두고 현리는 하면이고 이중에 연하리는 상면인데 초행자는 구별이 쉽지 않으므로 면소재지에 도착하면 태봉리를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천천히 길을 따라 운전하며 오른쪽을 살피면 농로 길처럼 생겼지만 조금 넓어 보이는 길로 간판이 서 있는데 간판이 월사 이정구 선생의 묘소를 알려준다. 이곳에서 찾아가기란 손을 뒤집는 것이나 다름없이 쉬운 일이다.

가평군 상면 태봉리 산11번지에 있는 월사 이정구(1564~1635)의 묘소는 1984년에 경기도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묘역에는 그의 후손인 이명한(李明漢 1595~1645), 이일상(1612~1666), 이광수 등의 묘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

묘는 풍수지리를 익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다. 물론 분묘가 풍수의 전부는 아니라고 하지만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현재는 음택(陰宅)이라고 불리며 풍수의 정점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풍수지리는 크게 양택과 음택으로 이원화되어 있으며 한국의 풍수지리에서 음택이 지나치게 강조된 시기는 조선 중기 이후다.

제각으로 보이는 건물 부근에서 차를 내린다. 장유(張維), 이식(李植), 신흠(申欽)과 함께 조선 중기 문장 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던 월사 이정구 선생의 묘역에는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음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있다.

장막처럼 쳐진 주산을 배경으로 길게 내려온 생룡에는 4기의 무덤이 있는데 가장 위에 자리잡은 묘는 월사 이정구의 묘가 아니고 이정구의 아들인 이명한의 묘이다. 아버지의 묘보다 위에 있으니 흔히 역장(逆葬)이라 부르는 형태인 것이다.

두 번째 묘가 이정구의 묘이다.
이 정구의 자는 성징이고 월사는 그의 호이며, 본관은 연안이다. 그는 15세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선조 23년(1590)에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승문원에 등용되었고, 임진왜란때에는 명과의 대외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국가적 난국을 타개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으며 이후 호조판서, 예조판서, 좌의정, 우의정을 거치면서 순탄한 관료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한문학의 대가로 서예에도 뛰어나며 조선중기 4대문장가 중의 한사람으로 시호는 문충이다.

역사상 3대(三代)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은 연안이씨 [월사(月沙)집]의 이정구(李廷龜), 이명한(李明漢), 이일상(李一相)와 광산김씨 [사계(沙溪)집]의 김만기(金萬基), 김진규(金鎭圭), 김양택(金陽澤)이 있으며, 달성서씨 [약봉(藥峰)집]의 서유신(徐有臣), 서영보(徐榮輔), 서기순(徐箕淳)이 있으며, 전주이씨 [백강(白江)집]의 이민서(李敏서), 이관명(李觀命). 이휘지(李徽之) 등 네 집뿐이었다.

묘역 입구에 자리한 건물 속에 보존되고 있는 월사집 목판은 연안이씨의 자랑이라 할 것이다. 월사집 목판은 1988년 3월 21일 유형문화재 제133호로 지정되었으며 상면 태봉리 산 115-1번지, 월사 이정구 선생의 묘소 아래에 장판각을 짖고 보관되고 있다.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 곁에 다가가면 진항 향내와 소나무 내음이 코를 스친다. 월사집 목판은 인조14 년(1636)에 월사의 손자인 이익상이 판각한 것으로 현재는 모두 1,334판이 보존, 관리되고 있다.

묘역에 올라 묘제를 살펴보면 봉분을 향하여 오른쪽 바로 앞에 묘비가 세워져 있고 그 앞으로 긴 댓돌로 쌓은 기단 1단이 있다. 이 기단 앞에 상석, 향석, 동자석, 망주석, 문관석 등 상설이 배설되어 있다. 묘비는 비신, 비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빗몸돌은 높이가 140㎝, 폭이 아래쪽 59㎝, 위쪽 63㎝로 위로 가면서 넓어지는 형태이며, 비자릿돌은 가로 98㎝, 세로 60㎝, 높이 27㎝이다.

월사 이정구의 신도비는 1656년에 건립된 것으로 당시에 좌의정이던 김상헌이 시문을 짓고 전을 썼으며, 영의정이던 이경석이 글씨를 썼다.

이정구 선생의 묘역은 누가 보아도 눈에 뜨일 정도로 확연하다. 묘를 살펴보면 길게 늘어진 모양이라 언뜻 보면 설기(洩氣)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 터에는 묘가 4기나 자리 잡고 있다. 모두 혈심(穴心)에 자리한 것은 아니지만 1개 이상의 개의 혈심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묘가 자리 잡은 산줄기의 후면에는 5개의 산이 마치 울타리처럼 두르고 서 있다.

오룡쟁주(五龍爭珠)!
이 다섯 개의 산이 마치 힘을 모아주는 듯 하다. 묘소의 뒤쪽에는 여러 개의 바위가 자리잡고 있는데 대부분 땅속에 묻혀있어 일부분만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또 부드러운 곡선으로 드러난 부분을 감싸고 있어 능히 귀석(貴石)이라 할 만하다. 앞쪽은 지나치게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으며 안산이 혈판의 높이와 비슷하다. 굽어봄도 없고 지나치게 낮지도 않아 에워싼 모양이 아늑하기 그지없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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