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진천읍 상계리 미역수마을 윗산에 자리하고 있는 이거이 선생의 묘역을 찾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상목이라고도 불리는 마을에서 한참동안 올라가야 하지만 길이 외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묘역을 찾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중앙고속도를 달려 진천 톨게이트를 지나 진천읍 버스터미널을 거치지 않고 21번 도로를 타고 직진했다. 간혹 터미널 곁으로 지나친 다음 헛갈릴 수 있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백곡저수지 방향이므로 직진하여 천안방향으로 가야 한다.

진천읍에서 묘소까지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21번 도로를 타고 천안방향으로 가는 일부 구간은 17번 국도와 겹쳐진 구간으로 사석리에 이르면 갈라진다. 21번 국도는 천안과 아우내 장터로 유명한 병천으로 향하고 17번 국도는 오창과 청주로 향한다.

이거이 선생의 묘소로 가기 위해서는 21번 국도를 타야 한다. 사석리 삼거리에서 21번 국도를 따라 우회전하면 성암 초등학교를 지난다. 약 1.5키로 정도를 가면 보탑사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난다. 이 도로의 입구에는 보탑사라는 간판이 있다. 아울러 연곡리라는 길 표시도 있다.

보탑사 방향으로 약 1킬로를 가면 이거이 선생의 묘소를 알리는 간판이 보인다. 이 길가에 청운사(凊雲寺)간판이 붙어있다. 이중 청(凊)자는 특이하게 청(淸)자와는 다른데 서늘하다, 혹은 차갑다는 뜻을 지닌 글자다.

이 마을 입구부터 미역수 마을이다. 이 도로는 폭도 좁아 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이지만 골짜기가 매우 깊어 보인다. 산거리라 불리는 이 마을을 통해 상계리로 들어가야 한다. 흔히 미역수 마을이라고 불리는 이거이 선생 묘소는 이 마을 끝에 있다.

큰길에서 마을 입구를 지나 계곡 하천을 따라 올라가면 다시 마을이 나타나는데 바로 미역수 마을이다. 묘소 진입로변(進入路邊)위에 비신높이 120cm의 신도비(神道碑)와 마을 입구에 토지를 하사(下賜)받은 사패비(射牌碑)가 있다.

마을을 지나 산길로 이어진다. 마을 끝에서 서쪽의 계곡을 따라 오르는데, 계곡에 수구사(水口砂)가 보인다. 수구사는 혈 앞의 물길 속에 단단히 박혀 혈의 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는 바위나 작은 산을 가리키는데, 수구사가 보인다면 그 앞에 좋은 혈이 있다는 증거이다.

산길은 차가 한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를 지녔는데 그 생김이 마치 산에 뚫어놓는 사방도로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길이 만들어진 것은 꽤나 오래된 듯 잔풀과 질경이 등이 무성하다.
오래 걸리지 않아 차를 돌릴 수 있을 정도의 넓은 공간이 나타나고 오른 쪽으로 산에 오르는 길이 보인다. 이 입구에 작은 간판이 붙어 이거이 선생의 묘소임을 알리고 있다. 차도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길 앞에 차를 세우고 약 10미터를 걸어 오르면 사람의 손가락처럼 길게 뻗어 내린 산줄기를 볼 수 있다.

이거이 선생의 묘역이다.
이거이(李居易) 공은 충간공(忠簡公) 이정(李挺)의 4째 아들로 자(字)는 낙천(樂天)이며 호(號)는 청허당(淸虛堂), 본관(本貫)은 청주(淸州)이다.

진천(鎭川) 출신으로 문백면 사양리(文白面 思陽里)에서 태어나 고려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태조2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거쳐, 1397년 평안도, 병마절제사 (平安道 兵馬節制使),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使), 판한성부사 (判漢城府事)등을 역임하였으며 태조(太祖) 조선 건국에 공이 있으며, 제1차 왕자의 난때 일등정사공신(一等定社功臣)이 되었고, 정종 2년(1400) 문하 좌정승(門下 左政丞)에 올랐으나, 사병(私兵)제도를 혁파하여 삼군부(三軍府)에 소속시키고자 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좌천되었다.

정종(正宗) 2년(1400) 11월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좌의정(左議政)이 되었으며 1401년에는 좌익공신에 올랐다. 공신(功臣)의 기록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공

신은 국가, 왕실을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을 뜻한다. 공신이란 훈공(勳功)을 나타내는 명호(名號)를 주며 등급을 나누어 포상하였다. 이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신라 때 벌써 녹공(錄功)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공신호(功臣號)를 내렸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공신제도가 성행한 것은 조선 태조 이래 역대 공신을 시상하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는데, 문헌에 나타나는 것에는 고려의 개국공신에 대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1392년(태조 1)의 개국공신, 1399년(정종 1)의 정사공신(定社功臣), 1401년(태종 1)의 좌명공신(佐命功臣), 1453년(단종 1)의 정난공신(靖難功臣), 1455년(세조 1)의 좌익공신(佐翼功臣), 1467년(세조 13)의 적개공신(敵愾功臣), 1469년(예종 1)의 익대공신(翊戴功臣), 1474년(성종 5)의 좌리공신(佐理功臣) 이하 1728년(영조 4)의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이르기까지 28종을 헤아릴 수 있다.

이거이는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오른다. 좌명공신이란 조선시대 박포(朴苞)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46명에게 내린 공신의 칭호이다.

이거이 선생 묘소의 크기는 가로 4m, 세로 5.5m, 높이 2m이고, 석물로는 묘비와 양석 1쌍, 촛대석 1쌍, 문인석 1쌍이 있다. 묘소는 직사각형으로 쌓은 토석혼축묘로서, 원형이 잘 남아있다.

2003년에 찾아갔을때와 2005년 4월의 묘역과는 변화가 있다. 2005년 4월 현재 약간의 묘역 조성이 이루어져 석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기존의 고색 창연한 석물과 새로이 조성한 백색의 석물이 어쩐지 부조화를 이룬다.

이거이 선생의 묘소 앞으로는 길게 늘어진 당판이 보인다. 마치 늘어진 개 혓바닥을 연상시키는 이 당판은 누가 보아도 설기(洩氣)한 듯 보이는 당판이다. 당판이 늘어지는 것은 기가 멈추지 못하고 흐른 까닭이고 이처럼 설기한 당판에 묘를 쓰면 후손 중에 걸식자가 나거나 고향을 떠난다고 풀이되고 있다.

정말 그럴까?
문제는 혈판을 제대로 보는 눈이다. 와겸유돌(窩鉗乳突)이라 불리는 혈의 사상 중에서 대부분의 혈은 반드시 하나의 혈심만을 가지게 되나 유혈만은 여러개의 혈심을 가질 때가 있다.
즉 하나의 혈판에 하나의 혈심이 자리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유혈의 경우는 하나의 혈판에 2개, 혹은 3개처럼 여러 개의 혈심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자세히 살펴보고 전후좌우를 살펴보면 이거이 선생의 묘가 자리한 혈판의 경우에는 여러개의 입수와 선익, 혈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거이 선생의 묘소 아래 가까이 자리한 혈심은 보여주기라도 하듯 돌로 이루어진 선익이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거이 선생의 자손들은 그 아래 묘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설기했다고 본 것일까?
알 수 없지만 한가지 가정은 가능해진다.

여러 개의 묘를 쓸 수 있는 혈판이라는 것을 판단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거이 선생의 묘 아래는 비웠을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거이 선생의 묘소를 둘러싼 좌청룡과 우백호는 교쇄만 따진 다면 매우 양호하다. 그러나 우백호가 지나치게 하늘 높이 솟아있어 앞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위의 호종사(護從沙)나 청룡과 백호가 높으면 지나치게 압도당하므로 선현들은 묘우를 선택함에 꺼려하는 바가 있었다.

묘소의 우측에 요석(瑤石)이 단단히 박혀 있으니, 이곳이 좋은 혈처임을 보여준다. 아울러 묘역 우측 상부에도 돌이 박혀 있어 기맥을 증명하고 있다. 묘하 가장 아래쪽 전순에도 돌이 박혀 있어 강한 기맥을 느끼게 해준다.

선녀가 자신의 용모를 단장하고 있는 모양이라는 옥녀단장형(玉女丹粧形)이란 혈의 이름에 걸맞게 안산이 네모스름한 거울 모양이다. 거울 모양은 묘 앞에서 보다 뒤쪽으로 갔을 때가 더욱 또렷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또 묘역의 뒷부분 북쪽에 솟은 야트막한 산인 현무(玄武)는 쪽을 지은 머리의 형상이라고 하기에도 어울릴 듯하다. 이는 귀인이 난다고 하겠다. 옥녀가 단장을 하니 아름다운 귀인의 탄생을 예고하는지 모르겠다.

안산은 백호가 안산을 이룬 백호안산이다. 그런데 지나치게 안산이 바짝 다가서 있어 혈이 안산에 고압(高壓)을 당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백호의 안쪽으로, 단정한 지맥 하나가 따라 내려오다 멈춰 서있다. 백호가 있는 오른쪽에 발달되어 있으니, 이 또한 딸과 외손(外孫)이 발복을 이루게 되는 형세이다.

물줄기는 좌에서 우로 그냥 내질러 빠졌다. 물이 을진의 방향으로 빠져나간 을진파(乙辰破)이다. 오므리거나 아우른 느낌이 없으니, 큰 재산은 모이지 않을 것이다.

해좌사향(亥坐巳向)의 묘로, 건룡(乾龍)이다. 뒷켠으로 중조산(中祖山)에 해당하는 길상산(吉祥山)이 보이고, 조산인 만뢰산(萬雷山)은 보이질 않는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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