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 산58번지에는 지방기념물 제94호로 지정된 이정부부의 묘와 묘표석이 있다. 마침 진천에서는 제법 유명한 농다리로 가는 길목에 있었으므로 찾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중부고속도로 진천 IC로 들어서서 사내를 들어간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롱다리를 알리는 간판이 나타나는데 약 7킬로미터 정도 된다고 적혀 있다. 진천읍을 통과하여 진천농공단지 옆으로 지나갈 수 있다. 다른 길은 중부고속도로 진천IC에서 나와 좌회전을 하고 성석사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증평 방향으로 34번 도로를 타고 가다 삼덕리에서 신정교를 이용 백곡천을 건너는데 진천농공단지 앞이다.

진천농공단지 앞에서 진천농교 앞으로 약 2킬로미터 정도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문상초등학교가 나타나고 왼쪽으로 마을길이 나타난다. 이 마을길 안에는 사양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정부부의 묘는 알지 못했다.

마을길을 따라 계속 들어간다. 한참을 들어가니 정면에 저수지의 둑이 보이고 작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이 사미마을이다. 사미마을 입구 오른쪽을 바라보니 주차장이 제법 넓고 뒤로 제각이 보인다. 그리고 산줄기 하나가 힘차게 내려왔는데 그 앞에 안내간판이 빛을 반사시키고 있고 신도비가 보인다.

제각을 지나 올라보니 신도비가 보인다. 수없이 많은 관산을 하며 음택에서는 신도비가 바로 묘의 근처에 있어 묘역을 찾았음을 알리기 때문에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신도비는 그다지 크지 않고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귀부가 특이하게 자라목처럼 쏙 들어가 있어 재미있다. 무엇보다 눈에 뜨이는 것은 이 신도비가 당대의 권신인 권근이 짖고 아들 이거이가 쓴 신도비라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권근의 묘는 음성에 있는데 당대에 보기드믄 묘로 흔히 국반이라 부르는 대혈이며 그의 아들인 권제와 한때 천하를 주물렀던 권람의 묘가 함께 있고 이정의 아들 이거이의 묘는 김유신 장군의 출생지가 있는 상계리 입구의 미역수 마을에 자리하고 있는데 역시 명당이다.

묘역을 올라보니 2개의 묘가 위아래로 모셔져 있다. 위쪽의 묘와 아래쪽의 묘 사이에는 약 20미터 이상의 간격이 있다. 위쪽의 이정의 묘이고 아래는 부인 경주김씨의 묘역이다. 유난히 눈에 뜨이는 것은 두 묘역에 공통으로 자리한 묘표이다.
크지 않지만 오래된 것이며 고려조에 주로 사용했던 방식으로 하나의 돌에 모든 것을 새겼다. 그러나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인데 비두가 구름무늬로 되어 있고 태극무늬를 새겼다. 특이하기 때문에 바로 이 묘표가 문화재가 되었다.

가장 위쪽으로 올라가 묘역을 내려다보았다. 제법 탄탄한 기맥위에 올라앉은 묘는 고려말기의 제형묘(梯形墓)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상석(床石)과 묘비(墓碑)는 당대의 석물로 현존하고 있다.

이 묘는 고려말의 문신인 이정(李挺, 1297∼1361)부부의 묘소로 공의 처음 이름은 춘길(春吉)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아버지는 중대광(重大匡) 계함(季함)이며, 어머니는 도첨의참리(都僉議참理) 김련(金聯)의 딸이고, 아내는 통례부사(通禮副使) 김계초(金繼貂)의 딸이다.

1325년(충숙왕 12) 29세에 문음(門蔭)으로 팔관보판관(八關寶判官)에 보임되었다. 다음해 병과 2등으로 급제하여 봉거직장(奉車直長)에 오르고 이어 전법좌랑(典法佐郞)을 역임, 1335년 판도정랑(版圖正郞)으로 지초계군사(知草溪郡事)에 나아가 선정을 베풀었다. 그 뒤로 감찰, 장령, 전법총랑(典法總郞)을 역임하였고, 경상도찰방으로 나갔다가 그 뒤 10년간 한거하였다.

1353년(공민왕 2) 중정대부(中正大夫)에 개자(改資)되어 성균좨주에 탁용되고, 이어 봉순대부판전교시사(奉順大夫判典校寺事)에 가자(加資)되었다. 다음해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에 오르고, 1355년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보문대제학(寶文大提學)에 보임되었고, 다시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승위하여 우상시(右常侍)가 되었다.

1357년 영록대부우산기상시(榮祿大夫右散騎常侍)로 집현전 학사에 올랐다. 공민왕의 각별한 총애를 입어 내불당(內佛堂)을 감역하였는데, 어제친필(御製親筆)의〈탄상하교문 嘆賞下敎文〉을 친수하여 공적을 찬양받았다.

1358년 광록대부형부상서(光祿大夫刑部尙書)에 이르렀다. 그의 친족은 모두 현달하여 가히 고려 후기의 세신대가(世臣大家)로서 영록을 누렸고,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이후 그의 집정기간에는 유력한 지지세력으로서 조선건국을 이룩함에 보익한바 컸다.
아들 거이(居易)는 태조원종공신(太祖原從功臣), 정사공신(定社功臣),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문하좌정승에 이르러, 삼조(三組)를 추증할 때 추충직절수문 병의보조공신 특진보국광록대부 문하우정승 판도평의사사사병조사 수문전대학사 영예문춘추관사 서원백(推忠直節守文 秉義補祚功臣 特進輔國光祿大夫 門下右政丞 判都評議使司使兵曹事 修文殿大學士 領藝文春秋館事 西原伯)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아래에서 보면 이정의 묘역 위에 불룩한 부분이 있어 잠시 흥분했었다. 그 흥분은 혹시 이 묘가 정돌취기입수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러나 올라가 살펴보니 비주(飛走)하여 묘역 위쪽의 용수된 부분은 묘역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그로 인해 현재의 묘역이 가장 이상적인 자리가 되었다.

이정의 묘역은 전형적인 유혈이다. 약간의 각도가 있기는 하자만 중요한 것은 역시 당판이다. 완벽하게 당판이 이루어졌지만 좌측과 우측, 즉 좌선익과 우선익이 부조화를 이루는 것 같이 보인다. 즉 좌선익이 조금 더 발달하여 편산처럼 보이는데 이는 양기의 흐름 때문이고 우선익이 발달하였음을 볼 수 있다. 아울러 묘역 아래 우측으로 돌출되는 지각을 만들어 귀성을 만들었다.

단지 눈여겨 볼 것은 우측의 귀성은 이정의 묘에서 발달한 선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정 묘역의 아래 부분 오른쪽으로 발달하여 혈판이 맺힌 것은 이정의 묘에서 발달한 것이 아니라 이정묘 아래에 하나의 입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정의 묘가 조금 내려온 듯한데 그 아래 새로운 당판이 맺혀 있고 입수에서 갈라진 선익 끝에 맺힌 귀성이라는 것이다. 이리 생각해 살펴보며 이정 묘와 이정 부인의 묘 사이에 혈판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현재 세워져 있는 신도비의 위치이다. 신도비가 있는 위치의 기선(岐線)에서 살펴보면 직진하듯 지각이 발달하여 기맥을 이루여 뻗어나가고 있다. 이는 지극히 일반적인 산세이고 기맥의 움직임이다. 그런데 신도비에서 제각이 있는 방향으로 바라보면 특이하게 배가 부르고 인작으로 깎기는 했지만 돌출된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돌줄이 나와 있다.

기맥을 측정해 보면 전형적인 잉혈의 혈상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어머니가 애를 밴 모습처럼 측면으로 맺히는 잉혈은 흔히 잉육혈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괴혈로 즉시발복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두드러지는 않았으나 돌이 받치고 있는 형상으로 부족한 전순의 모습을 돌들이 유지시키고 있다.

이정부부의 묘는 참으로 재미있다. 현재는 저수지를 막아 둑이 보이지만 과거에는 물이 들어오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혹자는 물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일 수 있으니 험이라 말하지만 묘역을 쓸 때에 해당하는 고려말조선초에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아울러 조상의 묘는 그 가치가 있을 뿐이지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발복운운하는 것은 조금 고루하고 지나친 억측이다.

교세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다. 단지 좌선익 방향으로 약간 트인 듯 보이는데 이는 묘역이 전체적인 지형에서 조금 높은 듯 보이기 때문이고 트인 것은 아니다. 이 정도의 교쇄라면 그럭저럭 수준급은 된다.

앞쪽의 산이 수형산(水形山)으로 백호방향에서 청룡방향으로 길게 뻗었는데 마치 허리를 매는 옷자락의 일부가 펄럭이는 것과 같다. 이는 옥대사와 비슷하지만 완벽한 옥대사는 아니다. 아울러 정면의 조안산 중에 규봉(窺峰)이 있으니 재산상의 손실이 보이는데 문필봉 (文筆峰)형태의 규봉이기에 관재수(官災數)나 당시로 따지며 왕권에 의한 억압이 예상되는 곳이다.

앞쪽으로는 깊은 계곡이 정면으로 향하고 있다. 이처럼 깊게 파인 계곡은 급류사(急流沙), 혹은 검살사(劍殺沙)와 유사한 좋지 않은 사격으로 판별하는데 다행히 큰 산이 하나 뻗어나와 앞을 가리고 있다. 대체적으로 좋은 사격이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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