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인 박인환 편

 

영원한 '목마와 숙녀' 박인환. 102308 묘비번호가 그의 주민등록번호다
유작시집으로 살아 있는 그의 저항주의를 품은 낭만시들이 있다. 

영원한 '목마와 숙녀' -박인환(朴寅煥)과 그리움을 논하다

망우산 사색의 공원을 산책로 오른쪽을 따라 2,3분만 걸어가면 박인환 시비가 보인다. 시비의 아래쪽 가파른 언덕아래 명동백작, 대니보이로 통하는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의 묘가 있다.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을 열고, 당대의 라이벌 김수영과 격론을 벌렸던 입담의 박인환은 자신이 노래했던 '그리움'을 남긴 채 후배 문학인들을 맞이한다. 묘비번호 102308 그것이 망우산에 있는 그의 주민등록번호다. 이곳에서 첫 사자후를 한다.
여기서 '사자후(死子逅)'란 '죽은 이와 우연히 만나다 또는 죽은 이와 만나 허물없이 지내다'라는 의미이다.

지난 6월 18일 구리문협회원들과 함께 한 문학기행을 계기로 사자후를 연재한다.  <글쓴이 주>

-자신의 죽음을 노래한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의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전문)

인제 박인환의 고향에 있는 시비 "세월이 가면" 육필원고를 돌에 새겼다.

나는 이 시를 노래로 먼저 만났다. 포크송이 유행하던 시절, 까까머리들의 카세트테이프 꽂이에 하나씩 꽂혀있었던 박인희라는 여가수의 노래로 말이다. 테이프 A면 첫 곡에 '목마와 숙녀'가 낭송되고, 두 번째 곡으로 들을 수 있었던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가수 박인희는 70년대 박인환이라는 시인을 전파하는 메신저였다. 이 테이프로 인해 중고등학교행사는 물론 크고 작은 무대에서는 음악과 시와 만남이 이루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목마와 숙녀'를 대중화 시킨 가수 박인희.

이 시가 노래로 만들어진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56년 3월 중순. 명동의 선술집에는 문인과 음악인 몇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갑자기 박인환은 휴지위에 한편의 시를 쓰고는 작곡가 이진섭에게 바로 건냈고, 이진섭은 단숨에 악보를 그렸다. 그리고는 한 자리에 있던 테너 가수 임만섭과 나애심이 그 곡을 젓가락 장단으로 즉석에서 불렀다는 것이다. 이후 이 노래는 ‘명동의 샹송’으로 유명해지고 훗날 박인희에 의해 대중화가 된 것이다.

시인 박인환은 이 노래를 쓰고 부르고 일주일 뒤 31세의 일기로 영원한 그리움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인제의 부전자전 박씨 일가

1926년 8월 15일. 소양강의 원류가 되는 강마을 강원도 인제군 상동리에서 아버지 박광선(朴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면사무소 직원 이었고 약간의 토지도 소유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세련된 외모 와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버지 박광선은 면직원을 그만두고 여러 지방과 도시를 떠돌며 산판사업을 하다가 끝내 서울에 안주하였다.

1936년 11살의 박인환에게는 그의 생애에서 큰 전환을 맞는다. 아버지의 뜻에 의해 고향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거처를 옮기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산판업을 시작하면서 먼저 자리 잡고 있다가 가족을 모두 서울로 이주시키기에 이른다. 이는 어린나이에도 어머니가 사준 버스표 한 장으로 아버지의 집을 찾아 갈 정도로 똑똑한 아들을 서울에서 공부 시키려는 아버지의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134의 8번지가 새로운 박인환이 새로 태어난 곳이다.

아버지의 호방함과 잘생긴 외모 그리고 넉살은 영락없는 부전자전이라는 것이 이 부자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이다. 서울로 온 박인환은 덕수보통학교에 시험을 통해 4학년에 편입하고 우등상을 받으며 1939년에 졸업하였다. 14세 같은 해 내놓으라하는 수재들이 모인 경기중학교(5년전)에 입학했다. 경기중학의 입학은 아버지는 물론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중학 시절에 박인환의 속내를 잡고 있던 예술적 기질이 발동하여 학업보다는 시, 그림,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1941년 경기중학교를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에서 졸업을 했다. 이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해방이 되자 학업을 중단했다.

-책방, '마리서사'가 시인 박인환을 만들다

스무 살 되던 해. 해방을 맞아 평양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아버지와 이모로부터 빌린 돈 5만원으로 시인 오장환(吳章煥. 월북작가)이 종로3가 낙원동 입구에서 경영하던 스무 평 남짓한 서점을 인수하여 화가 박일영(朴一英. 초현실주의작가)의 도움으로 간판을 새로 달고 다시 문을 열었다. 이곳이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산실인 책방 마리서사(茉莉書肆)이다.

문우와 예술인들이 들락거리던 책방 '마리서사' 앞에서 우측이 박인환이다.

서점 이름은 일본 현대시인 안자이 후유에(安船衛)의 시집 "군함 마리(軍艦茉莉)"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의 이름에서 빌렸다는 이야기는 전하나 어느 것이 정확한지 확인하지 않다.

 이 책방의 쌓여 있던 책들은 박인환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마리 로랑생, 장 콕토와 같은 외국 현대 시인들의 시집, "오르페온" "판테온" "신영토" "황지"와 같은 일본의 유명한 시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어 시인이나 소설가, 화가들이 매일같이 모여드는 예술가들에게는 전문 책방으로 소문이 났다.

이곳을 드나들던 문학인은 이봉구, 김광균, 김기림, 오장환, 장만영, 정지용, 김광주 등이고, 특히 "신시론(新詩論)"의 처음 동인이었던 김수영, 양병식, 김병욱, 김경린과 나중에 합류한 조향, 이봉래 등이 대표적이니 해방 후 문학을 우리문학의 꽃을 피운 다양한 장르의 문인들이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여기에 화가 최재덕, 길영주 등도 단골명단에 있었다.


-신시론(新時論)을 펼치다


책방에서 여러 문학과 예술인과 조우한 박인환은 본격적으로 시를 쓰고 시론(詩論)을 논하게 된다. 1946년 12월 그는 '거리'라는 작품으로 "국제신보" 발표하므로 시인으로 데뷔한다.

<"국제신보"에 발표한 박인환의 시 '거리' 전문>

"나의 시간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
붉은 지붕 밑으로 향수가 광선을 따라가고
한없이 아름다운 계절이
운하의 물결에 씻겨갔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지나간 날의 동화를 운율에 맞춰
거리에 화액(花液)을 뿌리자
따뜻한 풀잎은 젊은 너의 탄력같이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
지금 그곳에는 코코아의 시장이 있고
과실처럼 기억만을 아는 너의 음향이 들린다
소년(少年)들은 뒷골목을 지나 교회에 몸을 감춘다
아세틸렌 냄새는 내가 가는 곳마다 음영같이 따른다
거리는 매일 맥박을 닮아갔다
베링해안 같은 나의 마을이
떨어지는 꽃을 그리워한다
황혼처럼 장식한 여인들은 언덕을 지나
바다로 가는 거리를 순백한 식장으로 만든다
전정(戰庭)의 수목 같은 나의 가슴은
베고니아를 끼어안고 기류 속을 나온다
망원경으로 보던 천만(千萬)의 미소를 회색 외투에
싸아
얼은 크리스마스의 밤길로 걸어 보내자
"

1948년 입춘을 앞두고 박인환이 문학의 씨앗을 발아하던 마리서사를 처분하고 김경린, 양병식, 김수영, 임호권, 김병욱 등과 "신시론(新詩論)" 제1집을 발간하고 자유신문사에 기자로 생활한다. 이때 한 살 아래의 이정숙(李丁淑)과 결혼하여, 이후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1949년 박인환은 김수영, 김경린, 임호권, 양병식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都市)와 시민(市民)들의 합창(合唱)"이라는 동인지(앤솔로지)를 낸다. 이 시집에 '열차. 지하실' 등 5편의 시를 발표한다. 그리고 자유신문사에서 경향신문사로 옮긴다. 그리곤 또 다른 동인지인 "후반기"를 발족한다.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발표 한 박인환의 '열차' 전문>

"폭풍이 머문 장거장 거기가 출발점
정욕과 새로운 의욕 아래
열차는 움직인다
격동의 시간
꽃의 질서를 버리고
공규한 운명처럼
열차는 떠난다
검은 기억은 전원에 플로가고
속력은 서슴없이 죽음의 경사를 지난다
청운의 복받침을
나의 시야에 던진채
미래에의 외접선을 눈부시게 그으며
배경은 핑크빛 향기로은 대화
깨진 유리창 밖 황폐한 도시의 잡음을 차고
율동하는 풍경으로
활주하는 열차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관습과
봉건의 터널 특권의 장막을 뚫고
피비린 언덕 너머 곧
광선의 진로를 따른다
다음 헐벗은 수목의 집단 바람의 호흡을 안고
툰이 타오르는 처음의 녹지대
거기엔 우리들의 황홀한 영원의 거리가 있고
밤이면 열차가 지나온
커다란 고난과 노동의 불이 빛난다
혜성보다도
아름다운 새날보담도 밝게
"

이때가 가장 절친했던 문우이자 동년배인 김수영과의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김수영

김수영은 서구적인 것에 경도된 박인환의 취향을 경박하고 값싼 유행의 숭배자라고 몰아 부치며 경멸하고, 박인환은 또 그대로 김수영이 세속적인 눈치만 보는 속물이라고 비난했다.

여기서 잠시 50년대 박인환과 김수영을 대표로하는 한국적 모더니즘을 살펴보자.

한국 현대시를 이해하기 위해 살펴 보아야할 것들 중 하나로 모더니즘 시를 들 수 있다. 20년대 후반 창작되기 시작한 한국의 모더니즘 시는 30년대에 이르러 양적으로 풍부하게 창작되었고 질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50년대를 거쳐 오늘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30년대 모더니즘 시에 대해서는 그 성과와 평가가 풍부하게 논의된 반면 50년대 모더니즘 시에 대해서는 '30년대 모더니즘시의 아류에 불과하다'는 식의 평가가 주류를 이루어온 듯하다. 그러나 50년대의 모더니즘 시에는 그 시대적 과제들을 충분히 수행하려고 고심한 흔적들을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고 현대시를 연구하는 평론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50년대 모더니즘 시의 가장 중추적인 창작집단이었던 "後半期" 동인 그룹의 대표적인 시인인 박인환과 김수영의 작품은 그 고뇌가 한층 돋아나온다. 하지만 50년대 모더니즘의 두 시인인 박인환과 김수영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같이 동년배로서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새로운 도시와 시민의 합창" 이라는 앤솔로지를 발간할 정도로 두터웠던 두 시인의 시는 당시의 문학주류였던 모더니즘의 선상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박인환은 모더니즘으로는 실패한 듯 보인다. 전쟁이라는 시대의 질곡을 거치면서 체험을 바탕으로 한 현실 인식의 시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아울러 1950년대적인 한계 상황을 인식하고 절망과 좌절의 불안과 고독 등 실존적 포즈를 취함으로써 1950년대 전후문학의 당대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하고 있다고 하겠다. 김수영은 나라는 소시민적 성찰에서 비롯된 일상성을 천착하는 과정에서 모더니즘의 영역에서 60년대 참여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여겨진다.

두 시인의 도시적 정서는 모더니즘을 표방하며 출발했고 그 영향권 내에서 이루어졌지만 도시문명의 체험에 대한 새로운 충격에서 이국적 정조로 모더니즘을 수용한 박인환과는 달리 김수영은 산문적이고 서술 중심의 독특한 글쓰기로서 일상적인 언어로서 일상적 삶에 뿌리를 내려 일상성의 가치를 진정한 시의 지평으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대니보이' 그리고 '명동백작'


시인 박인환은 훤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의 미남이었으며, 당대 문인 중에서 최고의 멋쟁이,'댄디보이' 또는 '명동백작'이라 불렀다.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냐" 이렇게 말하며, 그는 여름에도 정장을 하곤 하였다. 어느날 그는 친구들 앞에 땅끝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를 입고 나타나, "이게 바로 '에세닌'이 입었던 외투란 말이야" 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세닌'이 31세의 나이로 자살하기 직전 입었던 외투를 본떠, 미군용 담요로 지어 만든 외투를 입었던 박인환도 '에세닌'과 같은 31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날 줄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그의 기인적인 행동에는 문단의 선배는 물론 내노라하는 평론가들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고 한다. 그를 댄디보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가 통속적인 것을 혐오하고, 원고를 쓸데는 구두점 하나에도 신경질적으로 까다롭게 굴고 싫어하는 사람과는 차도 한잔 마시지 않는 결벽증을 지녔다 한다.

수주 변영로선생이 금주를 선언하자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선배 자격이 없다며, 앞으로는 선생자격이 없다며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스카라(구 수도)극장에서 "제3의 사나이(그레엄 그린 원작)"를 문단 선후배들끼리 모여서 관람하던 중 박인환이 갑자기 일어나 선배 평론가 백철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이. 백철씨 제3의 사나이를 알아야 해. 저걸를 말이야. 저것을 모르고 무슨 평론을 쓸라고 해." 느닷없는 일갈에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친구들 가운데 그와 친한 문인들은 물론 주변사람에게 자신의 나이를 4~5세 부풀린 탓이다.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나이를 정확히 아는 사람도 없었고, 그의 부친 또한 그가 죽을 때까지 자식이 문학을 하는지 모를 정도였다고 하니 그를 기인이라고 해야 할지 희대의 반항아라 해야 할지 그것 또한 숙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그는 경향신문사 본사가 있는 부산과 대구를 왕래하면 종군기자의 길을 걷는다.

<종군기자 시절 발표한 박인환시 '고향에 가서' 전문>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은 내 고향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
피 묻은 전신주 위에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
무수한 포탄의 작열과 함께
세상엔 없다
인간이 사라진 고독한 신의 토지
거거 나는 동상처럼 서 있었다
내 귓전에 싸늘한 바람이 설레이고
그림자는 망령과도 같이 무섭다
어려서 그땐 확실히 평화로웠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미래와 살던 나의 내 동무들은
지금은 없고
연기 한 줄기 나지 않는다
황혼 속으로
감상 속으로
차는 달린다
가슴 속에 흐느끼는 갈대의 소리
그것은 비창한 합창과도 같다
밝은 달빛
은하수와 토끼
고향은 어려서 노래 부르던
그것 뿐이다
비 내리는 사경의 십자가와
아메리카 공병이
나에게 손짓을 해 준다

1952년 그가 27세 되던 해에 "주간국제" 지면에 ‘후반기 문예 특집’ 호를 발간하면서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 이라는 산문 기고한다. 그리고 그해에 경향신문사를 그만둔다. 그리고 곧바로 대한해운공사에 취직하여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떠한 날까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등을 쓰고는 53년 서울이 수복이 되자 서울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부산에서 그가 그렇게 애착을 갖고 있던 동인 '후반기'를 해체하기로 결심을 한다. 이시기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떠한 날까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등의 글을 썼다.

<한국전쟁 중 쓴 박인환의 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전문>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회상과 체험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 차례의 살육에 복종한 생명보다도
더한 복수와 고독을 아는
고뇌와 저항일지도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과 초연의 도시 그 암흑 속으로---
명상과 또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을 회상하면서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의 오늘을 살아나간다
---아 최후로 이 성자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의 회화 속의 나녀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에게 팔은
철없는 시인
나의 눈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일 것이다---

1955년 그는 아무 계획도 기대도 없이 남해호(南海號)라는 외항선을 타고 외국으로 나갔다. 석 달 뒤에 귀환한 그는 "아메리카 시초(詩抄)"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그가 생애 동안 가장 사랑했던 것 중의 하나가 책이다. 귀국 후 조선일보에 '19일간의 아메리카'를 기고(5월 13일 및 17일)하고는 대한해운공사를 퇴사한다. 그리고는 그의 불후의 명작인 '목마와 숙녀'가담긴 시집을 10월 15일 "박인환 선시집(朴寅煥 選試集)" 을 출간함으로 늘 베일에 가렸던 그의 시의 세계를 첫 선을 보이게 된다.

1955년을 결산하는 문단 행사로 아시아 재단에서 제정한 자유문학상 수상자 후보에 박인환이 올랐다. '박인환 선시집'을 낸 후라 스스로 수상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상도 상이지만 그보다도 상금을 받아 그간 밀린 외상 술값과 친구들 신세를 갚을 생각으로 수상에 대한 기대가 누구보다도 컸다. 그래서 타협할 줄 모르고 자존심이 강했던 그가 심사위원인 박종화를 찾아가 인사까지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한 표 차로 떨어지고 서정주, 박목월에게 수상의 영광이 돌아갔다. 그이 실망은 컨 것이었다. 1955년은 박인환에게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던 해였다.

<박인환의 불후의 명작 '목마와 숙녀'>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雜誌)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시선집, 산호장, 1955> 

옛 친구들의 조니워커와 카멜 대신 서울막걸리와 뇌종을 올리고 사자후하다 

'목마와 숙녀'는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박인환의 대표작이다. 그는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인 인생의 무엇을 끝까지 응시하려고 했고, 전쟁으로 황량한 명동 거리를 누비며 거침없는 언설과 재치를 뽐내며, 시대를 가로질러 가던 시인 박인환은 1956년 3월 20일 밤 9시에 세상을 떠난다. 그가 명동의 경상도집에서 송지영, 김광주, 이봉구 등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며 '세월이 가면'을 써낸 지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미스터 모의 생과 사'는 그의 죽음 의식을 각인하다

"입술에 피를 바르고
미스터 모는 죽는다.
어두운 표본실에서
그의 생존시의 기억은
미스터 모의 여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인도 없이
유산은 더욱 없이
미스터 모는 생과 작별하는 것이다.
일상이 그러한 것과 같이
주검은 친우와도 같이
다정스러웠다.
미스터 모의 생과 사는
신문이나 잡지의 대상이 못된다.
오직 유식한 의학도의
일편의 소재로서
해부의 대에 그 여운을 남긴다.
무수한 촉광 아래
상흔은 확대되고
미스터 모는 죄가 많았다.
그의 청순한 아내
지금 행복은 의식의 중간을 흐르고 있다.
결코
평범한 그의 죽음을 비극이라 부를 수 없었다.
산산이 찢어진 불행과
결합된 생과 사와
이러한 고독의 존립을 피하며
미스터 모는
영원히 미소하는 심상을
손쉽게 잡을 수가 있었다."
<박인환의 시 '미스터 모의 생과 사' 전문>  

박인환이 죽은 뒤 친구들이 세운 시비
이시는 그가 죽기 직전 195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마치 자신의 참회록을 쓴 것처럼. 평소 이상(李箱)을 유난히 좋아했던 그는 이상의 기일(忌日)인 3월 17일 오후부터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이상을 추모하며 폭음을 했다. 하지만 이상이 실제로 죽은 것은 1937년 4월 17일이니 기억의 착오였다. 그 날 박인환은 옆자리에 있던 이진섭에게 '인생은 소모품. 그러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야지'라고 메모한 것을 주었다.
"누가 알아. 이걸로 절필을 하게 될지..." 무슨 예감이라도 있었던지 박인환은 씩 웃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밤 9시에 만취상태로 세종로의 집에 돌아온 그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답답해! 답답해!"를 연발했다. 그러다가 자정 무렵 "생명수를 달라!"는 부르짖음을 마지막 말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새벽 미처 술이 깨지 않은 술친구들이 그의 시신이 있는 방에 들어섰을 때 눈을 부릅뜨고 있는 모습을 감히 바라보지 못했다. 그의 눈을 감긴 이는 송지영이다. 또 다른 친구가 그의 시신에 조니 워커를 따라주었다. 그의 나이 불과 삼십 일세였다. 그의 시신이 시인장으로 망우리에 묻힐 때 지인들은 그가 좋아했던 조니 워커와 카멜 담배를 함께 묻었다. 그가 죽던 해에 발표한 글은 '죽은 아포롱', '옛날의 사람들에게' 등이다.

박인환과 그리움을 논하고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검은강'을 읊조리다.
 

-박인환과 사자후를 마치며

박인환시인의 면모를 여기저기 섭렵하면서 자료를 얻었다. 70년대 고등학교시절 통키타를 치는 선배 옆에서 읊조리던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은 시인이 얼마나 고뇌를 하고 그 고뇌속에서 명작이 나오는 가를 잘 알려주는 대목이다.
쫄대기 시인으로 시인의 흉내를 냈던 지난 시절이 부끄러워진다. 그가 너무 너무 사랑했던 고향 '인제' 라는 시와 그의 가족에게 남긴 '어린 딸에게'로 첫 사자후를 마친다.

<죽기 10일전 조선일보에 발표한 박인환의 시 '인제' 전문>

봄이면 진달래가 피었고
설악산 눈이 녹으면
천렵 가던 시절도
이젠 추억.
아무도 모른 산간벽촌에
나는 자라서
고향을 생각하며 지금 시를 쓰는
사나이
나의 기묘한 꿈이라 할까
부질없고나
그곳은
전란으로 폐허가 된 도읍
인간의 이름이 남지 않은 토지
하늘에 구름도 없고
나는 삭풍 속에서 울었다.
어느 곳에 태어났으며
우리 조상들에게 무슨 죄가 있던가
눈이여
옛날 시몽의 얼굴을 곱게 덮어준
눈이여
나에게도 정서와 사랑이 있었다 하더라.
나의 가난한 고장
인제
봄이여
빨리 오거라

<박인환이 가족에게 남긴 시 '어린 딸에게'>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 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주검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삼개월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와 비와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벼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드 애소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럼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데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 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가을의 유혹
가을은 내 마음에 유혹의 길을 가리킨다
숙녀들과 바람의 이야기를 하면 가을은 다정한 피리를 불면서 회상의 풍경을 지나가는 것이다
전쟁이 길게 머물은 서울의 노대에서 나는 모딜리아니의 화첩을 뒤적거리며
정막한 하나의 생애의 한시름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 가을은 청춘의 그림차처럼 또는 낙엽보양 나의 발목을 끌고
즐겁고 어두운 사념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즐겁고 어두운 가을의 이야기를 할때 목메인 소리는 나는 사랑의 말을 한다
그것은 폐원에 있던 벤치에 앉아 고갈된 분수를 바라보며
지금은 죽은 소녀의 팔목을 잡고 있던 것과 같이 쓸쓸한 옛날의 일이며
여름은 느리고 인생은 가고 가을은 또다시 오는 것이다
회색 양복과 목관 악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목을 늘어뜨리고
눈을 감으면 가을의 유혹은 나로 하여금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사람으로 한다
눈물 젖은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면 인간이 매몰될 낙엽이 바람에 날리어 나의 주변을 휘돌고


[키워드1]앤솔로지/
앤솔로지는 그리스어의 안솔로기아(anthologia;꽃을 모아놓은 것)에서 유래한다.
서적이라면 편집자가 잡지나 책등 발표되었던 명작, 걸작 등을 모아 다시 수록한 작품집이다. 음반이라면 그 동안 발표되었던 곡 중에서 좋은 것들만 다시 모아 실은 음반으로 꼭 한 사람의 작품만 모아놓은 것은 아니고 여러 사람의 작품을 모은 것도 앤솔로지에 해당한다.

[키워드2]에세닌/
19세기와 20세기를 넘나들며, 무용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이사도라 던컨이 한눈에 반한 남자가 바로 세르게이 에세닌이다. 던컨이 44세에 17년 연하인 에세닌과 깊은 사랑에 빠졌고, 에세닌은 31세의 일기로 세상을 뜬다.

사람은 갔어도 세월은 남는 거... 세월의 흔적을 훔치며...


-박인환시인의 연보

암울한 시대의 절망과 실존적 허무를 피에로의 몸짓으로 대변한 당대의 정신적 제왕이자
모더니즘, 리얼리즘, 실존주의의 시세계를 구축하며 전후 문단의 지평을 넓힌 기린아였다.

■ 1926년(1세) :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에서 4남 2녀 중 맏이로 출생. 중학생 시절부터 시와 영화에 관심을 두고, 관련 책을 사들이기 시작.
■ 1945년(20세) :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개업.
■ 1946년(21세) : 12월, 《국제신보》에 「거리」라는 작품 발표로 시인 데뷔.
■ 1948년(23세) : 마리서사 폐업. 김경린, 양병식, 김수영, 임호권, 김병욱 등과 함께 동인지 《신시론(新詩論)》 제1집을 발간. 한 살 아래의 이정숙(李丁淑)과 결혼, 이후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에서 기거. 자유신문사에 입사. 시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世界日報》), 「지하실」(《民聲》), 산문 「아메리카의 영화 시론(詩論)」(《新天地》1월), 시 「인도네시아 인민(人民)에게 주는 시」(《新天地》5월), 산문 「사르트르와 실존주의」(《新天地》10월) 등 발표.
■ 1949년(24세) :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 등과 5인합동 시집《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 이 시집에 시 「열차」, 「지하실」 등 5편 발표. 4월, 《민성》지에 시 「정신의 행방을 찾아」 발표. 경향신문사에 입사. 동인 그룹 ‘후반기’를 발족시킴.
■ 1950년(25세) : 6.25 발발.
■ 1951년(26세) : 경향신문사 본사가 있는 부산과 대구를 왕래. 종군기자로 활동. 「신호탄」, 「고향에 가서」, 「문제되는 것」, 「벽」 등을 쓰다.
■ 1952년(27세) : 《주간국제》의 ‘후반기 문예 특집’에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이라는 산문 기고(6월 16일). 경향신문사 퇴사, 대한해운공사에 취직.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떠한 날까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등을 쓰다.
■ 1953년(28세) : 7월 중순경, 서울의 옛집으로 돌아오다. 환도 직전, 부산에서 ‘후반기’의 해산이 결정됨.
■ 1955년(30세) : 화물선 남해호의 사무장으로 미국을 여행. 귀국 후 《조선일보》에 「19일간의 아메리카」를 기고(5월 13일 및 17일). 대한해운공사 퇴사. 10월 15일 『박인환 선시집(朴寅煥 選試集)』 출간.
■ 1956년(31세) : 「세월이 가면」, 「죽은 아포롱」, 「옛날의 사람들에게」 등 쓰다. 3월 20일 오후 9시,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 9월 19일, 문우들의 손으로 망우리 묘소에 시비가 세워지다.

망우산에는 17명의 애국지사 문인, 예술인 외에도 역사의 굴레를 이야기 할 많은 사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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