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만경에서 군산방면으로 1㎞쯤 가다가 서쪽으로 화포리로 가는 길을 따라 가면 나지막한 유양산에 이른다. 이곳에 성모암이 자리 잡고 있다. 성모암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진묵대사(雲點大訶)의 어머니 묘소가 400여년이 넘게 긴 세월동안 잘 보존 되여 내려오고 있다.
이 묘는 진묵대사 어머니 묘로 만경읍 화포리 토정마을의 주행산(舟行山)에 자리잡고 있다.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에 있는 진묵대사 어머니의 묘를 無子孫千年香火之地라고 부른다. 즉 자손이 없어도 천년동안 향불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明堂으로 진묵대사가 어머니를 위하여 잡은 明堂이다.

진묵 대사(1562-1633)는 조선중기의 고승으로 김제군 만경읍 화포리에서 1남 2녀의 독자로 태어났으며 대사의 이름은 一玉이고 호는 진묵(震黙)이다. 1562년(명종 17년)에 태어나 1633년(인조 11년)에 입적하셨다.

대사는 어릴 때부터 성품이 지혜롭고 자비로워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불거촌에 부처님이 났다"는 찬탄을 받았다고 한다. 여러 가지 신비한 이적을 보인 진묵대사는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진묵대사는 자신이 스님이었던 관계로 출가하면 대를 이을 손이 끊기어, 어머니 묘에 성묘할 사람이 없을 것을 예견하여 풍수설에서 말하는󰡐천년동안 향불이 꺼지지 않는 자리인 이곳에 묘를 마련하여 만인의 참배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성모암 곁에 자리한 진묵대사의 어미니 묘는 1천년동안 향화가 끊기지 않는 명당터로 이 무덤에 고사를 드리면 병이 낫고 부자가 된다고 하여 성묘객이 잇달았다 한다. 신묘한 기운 덕분에 지금도 참배객이 끊어지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 이 묘는 만경현 불거촌에서 나서 출가 사문이 된 일옥의 어머니를 모셨는바 누구든지 풍년을 바라거나 질병이 낫기를 바라거든 이 묘를 잘 받들지어다. 만일 정성껏 받든 이가 영험을 못 받았거든 이 진묵이가 결초보은 하리라" 라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한다.

그 후 이 묘에 향화를 드리고 소원을 빌면 소원을 이루지 못한 이가 없다고 하며 오늘날까지 많은 참배객들이 향을 사르며 소원을 빌고 있다.

조선후기의 초의 스님이 지은 [진묵 조사 유적고]에는 18가지 대표적인 이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어느 날 늙은 어머니를 왜막촌에서 봉양하고 있을 때 어머님이 여름날 모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보고 산신령을 불러 모기를 쫓게 한 후로 이 촌락에 모기가 영영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대사께서 지으신 어머니에 대한 시는 스님의 효심이 잘 나타나 있다.

"열 달 동안 태중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오리까,
슬하에서 3년동안 길러주신 은혜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만세 위에 만세를 더하여도 자식의 마음에는 오히려 불만이온데,
백년생애에 백년도 못 채우시니
어머님의 수명은 어찌 그리도 짧으십니까.
한 쪽 표주박을 들고 길에서 걸식하는 이 중은
이미 말할것이 없거니와
규중에 비녀를 꽃고 들어 앉아
아직 출가하지 아니한 어린 누이야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습니까.
상단 불공도 마치고 제사도 끝나니
스님네는 제각기 방으로 찾아들었습니다.
앞산은 첩첩하고 뒷산은 겹겹한데
어머님의 혼은 어디로 돌아가셨습니까.
아! 애 닳으오이다. "

성모암에 도착하여 고개 숙여 합장한 후 조심스럽게 봉분 주위를 둘러보니 깨끗하게 손질된 묘역은 신성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봉분 주위는 전체적으로 수맥이 느껴진다. 예의상 봉분까지 올라가서 기운을 느껴보지 못하고 뒤를 돌아가 주위를 살펴보았다.

오래도록 성모암 주위의 지세와 진묵대사의 묘는 물형으로 연화부수형이라고 알려져 왔다. 지난날 찾아 갔을 때 주차장에서부터 연화부수형이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고 절에서도 애써 연화부수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이적에 연화부수형에 연관이 있다는 듯 주장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동안 성모함과 진묵대사의 어머니 묘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풍수를 공부하는 많은 후학들이 관산을 하고 연화부수형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면서부터 이곳의 연화부수에 대한 의미는 많이 퇴색되었고 아울러 연화부수형에 대해 새로운 이론들이 제기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논할 수 없지만 일부 풍수가들의 주장에는 이 성모암 주위에 대해 연화부수형이라는 주장은 괴거로의 전승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화부수형에 대한 주장은 30년전, 혹은 40년전 일세를 풍미했던 연천 출신의 유명한 풍수가가 연화부수라고 주장한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이확인 의견도 있다.

일설에 주장하는 풍수가들의 주장은 참으로 기함이 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봉분이 정확한 기운에 소점하였다고 말한다. 아울러 이곳을 봉분에만 기운이 있고 주위는 전체적으로 수맥이므로 물형으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한다.

과연 그럴까?
우선 이치가 맞지 않는 이야기임을 밝히고자 한다. 봉분에만 기운이 있다는 말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이 말은 풍수가들이 말하는 좋은 기운이 봉분 밑에서 솟구쳐난다는 말인가? 혹은 하늘에서 뿜어져 내려온다는 말인가?

참으로 이해를 하지 못할 말이다. 그동안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공통으로 느끼는 것은 용이 산을 따라 흐르고 기맥은 이 산을 따라 흐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맥이란 용을 따라 흐르는 것이지 솟아오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맥은 용을 따라 흐르기 때문에 장경의 불자장지에 대한 이론을 살피면 [단산(斷山)은 불가장지(不可葬地)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즉 기맥은 용을 따라 흐르기 때문에 산맥이 끊어지면 기맥도 끊어지기 때문에 기맥이 봉분에만 있다는 말은 그야말로 억지로 가져다 붙인 이야기거나 봉분이 자리한 지점을 신성시하기 위한 거짓 이론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두 번째 주장을 살피면 주변이 모두 논이기 때문에 이는 물에 해당하며 판도 좁으니 연화부수형이라는 이론이다.

후학은 연륜도 짧고 학문의 깊이도 일천할 수 있을지 모르나 연화부수형이 어떤 형상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어떻게 생성이 되었는지도 안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연화부수형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가 보기도 했다.

하회마을이며 강원도 생둔과 같은 전형적인 연화부수형은 물론이거니와 서천군에 있다는 논 가운데의 연화부수형도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전형적인 연화부수형은 성모암이 자리한 곳과는 전혀 다르다.

주위에 논이 감싸고 있어 연화부수형이라 주장한다면 김제시 일원의 무수한 벌판과 만경뜨락의 무수한 산들, 부산 인근의 비행장 부근의 무수한 작은 산들도 모두 연화부수형일 것이다.

후학은 수승님으로부터 풍수를 배우고 여행을 시작하고 관산을 했을 때 가장 먼저 혈의 사상(四象)을 배웠다. 와겸유돌은 혈상의 기본이라 할 것이다. 혈상을 찾고 난 후에 기맥의 흐름을 용맥과 대비할 것이다. 그런 연후에 혈의 좌향을 따지고 형상에 따른 사물의 대비를 통해 살필 것이다.

풍수 여행을 하며 살필 것의 우선순위를 살핀다면 우선 당판의 구조일 것이다. 모양으로 당판이 생겼나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의 얼굴을 보고 사람이라는 것을 알 듯 당판을 살펴 혈이 이루어졌나를 볼 것이다. 이 혈상이야말로 혈의 가장 첫 번째 조건이다.

두 번째는 이 혈상에서 오악을 찾을 것이다. 즉 혈상은 다른 곳에 비교해 두툼한 살집도 있고 그에 따른 특징이 나타나는데 오악은 바로 입수와 좌우선익, 당판과 전순이다. 모든 혈은 이 오악이 갖추어져야 하고 하나라도 없다면 혈이 아니다. 혈이 이루어진 후에야 음택으로서의 명당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용맥을 살피는 일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멀리서 볼 이유는 없다.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미론천리지내룡, 단간도주지응결(未論千里之來龍, 但看到頭之凝結)]이라 했으니 천리를 살필 이유가 없이 입수 뒤 3절만 보아도 기맥의 흐름을 알 수 있다 했다.

결국 이 입수뒤 3절은 물론이고 혈의 구조를 알려 한다면 기맥을 느낄 수 있는 수련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단지 모양만 보고 짐작하거나 패철에 의지해 시시때때로 장소를 이동해가면 소점하는 행위는 영원히 정확한 화점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자신의 몸을 단련하여 기맥을 몸으로 느끼는 수련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후학은 수많은 책을 읽었다. 풍수에 고나한 공동된 내용이 있으니 아마도 그것은 사상에 관한 내용일 것이다. 혈의 사상은 와겸유돌 4가지이며 형기론에 관한 서적이든, 이기론에 관한 서적이든 필수적으로 쓰여 있는 내용이며 고래로 전래된 모든 서적에 기맥론과 함께 필수적인 내용을 차지고 있다.

후학은 도착하자마자 형상에 따라 사상을 살피기로 했다. 형상을 살피는 것은 일정한 장소가 과연 혈인가를 살피는 것으으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과 같다. 심혈이란 결국 얼굴을 찾는 일이다.

혹자는 패철로 좌향을 정할 수 있으며 패철로 혈의 성질을 알 수 있다고 하며 얼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것처럼 모양이 아니라 땅의 성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후학은 공부를 하러가서 그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앞서 사람의 얼굴을 판별하여 사람인지 짐승인지를 가려내는 기술이 중요한 것임을 사람들이 잊는 경우가 있으니 애석한 일이다. 고래로 산서에는 반드시 이 와겸유돌을 논하고 이 기준에 어긋나면 명당이 아니라고 했으니 먼저 사상을 찾아야 함은 산서를 읽고 풍수를 논하는 진리라 할 것이다.

먼저 지도를 살폈다.
등고선 표시와 용맥의 행진을 살피니 조산은 대모산이다. 진묵대사의 어머니가 묻힌 묘역의 주변으로 논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크게 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만경강이 흘러 에워싸듯 돌아 서해로 들고 있다. 망경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부분은 묘역의 뒤를 지나 묘역 백호 방향이다. 그러나 어떤 유명한 풍수사가 주장한 것처럼 묘역 뒤에서 기가 들어왔다는 말은 영 허구인 셈이다.

묘역으로 들어온 기맥은 모악산 방향이다. 입수용맥(入首龍脈)을 살펴보면 모약산에서 출발한 용이 과협처(過峽處)에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후 은맥(隱脈)으로 잠룡(潛龍)하여 성모압 우후면으로 다시 출맥하여 당판을 이루기 시작한다.

현재의 성무암 뒤쩍 우측으로 들어온 맥이 두 갈래로 갈라져 한 줄기는 성모암 뒤로 새로지은 법당 뒤로 길게 뻗어 방악산 뒤로 지나 주차장 뒤의 논으로 녹듯 사라진다. 기맥은 그같은 한줄기의 기맥을 갈라놓은 다음 성모암과 묘역 뒤로 계속 뻗어나가 묘역 뒤에 거대한 귀성을 만든다.

귀성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뻗어나간 기맥은 새로이 조성된 고시례전 뒤와 산등성이 넘어 유양산 진묵조사전 사이의 기맥을 파고 뻗어 고시래전 넘어에서 넓게 퍼지기는 했지만 완연한 기맥으로 주차장 앞으로 뻗어 논 속으로 사라진다. 자세히 살펴보면 기맥은 계속 뻗어나가 한참동안 높은 지대를 형성하며 앞길까지 뻗어나간다.

그 사이에 묘역이 있다.
풍수를 배운 사람이라면 이 형태가 어떤 모양인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즉 어떤 책이나 쓰여져 있는 사상에 의거하면 두개의 갈고리 모양을 지닌 기맥과 뒤로 뻗어나간 귀성을 볼 것이다. 아울러 만경강이 흙과 산으로 이루어진 사격 대신 환포하듯 뒤를 둘렀으니 이야말로 나성이 아니던가? 물은 사격과 동격으로 보느니 니 경우에도 충분히 나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내청룡(內靑龍)이 미사(微沙)로 환포하였으며 외청룡(外靑龍)이 훌륭하게 혈장(穴場)을 감싸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백호(白虎)가 본신룡(本身龍)에서 반배(反背)하여 도망을 가는 백호배반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행히도 백호배반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성모암과 진묵대사 어머니의 묘를 유혈로 판단하고 강제로 꿰어 맞추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나온 것이다. 유혈로 판단한다면 응히 그런 주장이 나올 법하나 유혈은 반드시 여자의 유방처럼 살집이 있어야 하고 그 모양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에는 다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이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어디로 보아 유혈이란 말인가? 유혈은 반드시 산진처와 용맥에 맺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묘역은 산등성이 측면으로 맺혀 있으며 앞을 보아도 전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용맥은 보이지 않는다.

측면으로 맺히는 혈은 오로지 하나 뿐이다. 수많은 책에도 들어있듯 횡룡입수인 경우는 단 하나 뿐이다. 횡룡결혈은 와혈 뿐이니 어찌 이처럼 어이없는 설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와혈은 횡룡에서 이루어지고 두개의 갈고리 모양이 혈의 좌우를 감싸게 되어 있다. 따라서 다리를 벌린 모양이라 개각(開脚)이라는 말이 생겼다. 즉 다리를 벌린 모양이라는 의미이다. 좌우의 갈고리모양은 개각의 전형적인 특색이다.

와유현릉사(窩有縣陵沙)라 했다. 아울러 와유유귀유락(窩有有鬼有落)이라 했던가? 고서에 이른대로 등고선 같은 능선을 끼고 현릉사가 있고 귀성과 낙산이 있으니 어찌 와혈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며 와혈을 논하지 않고 연화부수를 논할 것인가?

후학은 연화부수가 그렇게 갑자기 높아지는 형국을 지녔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연화부수혈이 용맥이 나타나는 측면으로 결혈 된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후학이 듣기에 연화부수형의 모습은 마치 돗자리를 펼쳐놓은 듯 원형이거나 타원형이며 아울러 혈심은 가장 중심에 있다고 들었다.

즉 기맥이 끝나는 부분에 맺혀 마치 짚으로 만든 고리 방석의 중앙처럼 보이며 엄지손가락 중심의 손금에 난 원형 테두리 모양이라 배웠다. 어찌 용맥의 흐름이 완연한 데 이를 비껴 혈이 맺힐 수 있으며 용맥이 계속 뻗어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후학은 풍수 여행을 하며 무수한 풍수 서적과 비교하기를 서슴지 않으며 그림을 그려 비교하고 대비해본다. 아울러 지도를 사서 등고선을 확인하여 용맥의 흐름을 살핀다. 아무리 살펴도 성모암과 진묵대사의 머머니 묘를 비교하기 바란다.

혹자는 진묵대사의 묘에 대해 패철을 들이대고는 좌향을 따진다. 그리고는 명당임을 증명하고 제자리에 소점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그야말로 그림을 보고 논하는 격이다. 이는 틀린 행위임을 분명히 하고자한다.

있는 형상 그대로를 말하자면 파구(破口)는 을진(乙辰)이고 좌향(坐向)은 유자묘향(酉坐卯向)이므로 사처봉왕(死處逢旺)에 합법하다 할 것이다. 이는 이기에 의한 풀이일 뿐이다. 깊은 이야기를 하자면 이 경우 진묵대사 어머니의 묘는 혈처에 소점되었지만 좌형은 비틀어 놓았다.

이 말은 재혈분금을 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진묵대사는 부모님의 묘를 정하고 재혈을 할 때 자신이 수도하는 모악산에서 아침이면 일어나 늘 같은 방향으로 절을 하고 모친의 묘가 자신과 일직선이 되어 늘 향할 수 있도록 향을 틀어놓았다. 아마도 자신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신중하게 생각한다면 다시 한 번 성묘암을 찾을 것이라 확신하는 바이다.

전체적으로 판단해 보자면 진묵대사 어머니의 묘는 와혈이며 국세는 형성되어 있으나 당판의 구조와 구성은 빈약한 느낌 든다. 아울러 기맥의 흐름을 표현하는 특이할 점도 없으니 혈은 이루어졌지만 귀함은 떨ㄴ어진다 할 것이다. 흔히 혈을 파악할 때 국반이니, 도반이니, 향반이니 하는 말을 하는데 이 혈을 논한다면 향반이라 할 것이다.

와혈이라는 특징 외에는 특별한 점이 찾기가 어렵다. 아울러 파구는 교쇄되지 않고 水口가 열려있어 흠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외당(外堂)은 만마(萬馬)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게 형성되어있어서 매우 훌륭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눈여겨보면 혈의 기맥과 당판의 크기, 격에 비해 지나치게 넓게 볼 수도 있는데 역시 흠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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