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

경주에 와서 이것을 안 먹고 가면 헛 온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경주 교동법주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주에 가서도 이것을 맛보지 못한다. 사전지식이 없다면 경주법주를 경주교동법주로 알고 마실 게 뻔하다.

󰡐최씨고택󰡑이란 현판과 나란히 붙어 있는󰡐경주교동법주󰡑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왠지 귀한 술을 대한다는 설레임보다 종가집의 깐깐함과 고집스러움을 마주할 듯한 긴장감이 앞선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된 교동법주는 최씨 집안의 전통중 하나이다.

경주교동법주의 유래는 10대조인 최국선 옹으로까지 올라간다. 조선 숙종 때 임금님 수라상과 궁중 음식을 감독하는 사옹원의 참봉을 지낸 인연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흔히󰡐최부자댁󰡑이라고 불리는 최씨 집안은 일제시대 때까지 12대 만석꾼일 만큼 조선조의 손꼽히는 부잣집이었다. 최부자댁으로 알려진 집 부근의 향교와 더불어 교동 땅의 절반이 이 집 소유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집안은 항상 각지에서 모여든 과객들로 붐비었다. 또한 부와 명예를 쌓기보다는 덕을 베풀라는 집안의 가르침에 따라 가뭄이 들면 곳간을 풀어 인근 백리의 사람을 먹여 살리기도 했다.

흔히 경주 최식가옥(慶州崔植家屋)으로도 알려진 이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확한 행정구역은 경북 경주시 교동(校洞) 69번지이다. 경주 최부자집 또는 경주 최진사집으로 널리 알려진 최식의 가옥은 교동에 자리하고 있다.

경주에 가면 누구나 찾아보는 대릉원, 흔히 알려진대로 천마총입구 사거리에서 서쪽방향으로 이어진 좁은 도로를 따라 조금 가면 삼거리가 나타난다. 여기에서 남쪽 방향(좌회전)의 도로를 따라 계속 올라 간다.

200m 정도를 가면 작은 다리가 나타난다. 다리 입구에서 좌측으로 난 도로로 50m 정도 가면 요석궁이라는 간판이 있다. 이곳에 바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이야기가 전설로 전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다시 북쪽으로 보면 고택들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최씨 고택이다.

고택 앞에는 문화재임을 알리는 간판이 있고 옆에는 교동법주를 알리는 간판도 있다. 막상 들어가 보면 특이한 점이 많이 보이는데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은 사라진 건물의 터이다.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해 안채 바깥 건물은 대부분 흔적맘 남기고 있다. 그리고 몇가지 눈에 뜨이는 점은 건축의 구성이다.

170여 년 전의 건축으로, 그 평면구조가 경상도 지방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건물재목들도 일반가옥에서는 보기 어려운 좋은 재목을 썼을 뿐 아니라, 건축물 자체의 조형적인 아름다움도 뛰어나다. 그러나 1969년의 화재로 사랑채와 행랑, 새사랑채와 그 남쪽에 달린 바깥 변소 등이 소실되었고, 문간채와 고방, 안채, 사당만이 남아, 이를 1971년 5월 26일 정부에서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특이 이곳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거대한 쌀창고는 민가규모에서는 당대 최고일 것이다.

이곳 교동에 있는 옛 목조기와 건물들은 2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조선시대의 민가들이다.최씨의 종가택 건물은 원래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ㅁ'자 모양으로 배치된 가옥만 남아 있다. 현재 이곳에서 중요 무형문화재 제86호인 경주교동법주를 생산하고 있다.

최씨 종가를 살펴보면 풍수적으로 한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난히 눈에 뜨이는 구조는 아마도 바람의 흐름을 배려했다는 것일 것이다.

즉, 문을 열면 바로 안채가 보이거나 바람이 직격하지 못하도록 바람막이나 담을 설치하여 거친 바람이 일단 멈추었다가 드나들도록 배치한 것인데 이는 풍수의 개념에서 충(沖)을 막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넓게 보아서는 전착후관이라는 양택삼요의 이치와 더불어 안에 사는 사람의 자율성과 공간 확보라는 과학이 접목되어 있다.

아울러 밖의 인기척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두어 내부인의 준비성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특히 최부자댁은 일대에 굶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유시가 전해지고 있는 집안으로 바로 한국의 아그레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관직을 진사 이상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은 권력이 가까우면 법을 어기게 되고 욕심이 생기며 당시의 구조로 보아 당파 싸움에 휘말려 멸문의 가능성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문중을 보존하고 아울러 양반의 맥을 이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선택이 아니었나 하는 마음이다.

경주 최부자집에는 가훈이 있다고 한다. 가훈이라면 으레히 한마디로 압축된 짧은 문장을 연상하지만 경주 최부자집 가훈은 여섯 가지의 가훈과 처신함에 육연(六然)을 가훈으로 삼아 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경주 최부자 집은 12대 진사 벼슬과 9대 만석꾼을 했다는 것이 경상북도 교육위원회가 발간한 '내 고향 역사' 책에 그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어찌해서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만석꾼을 유지했었는지 그 비결이 무엇이었는지를 여기에 소개해 보고자 한다.

그 유명한 최부자 집 가훈은 여섯 가지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科擧를 보되 進士 이상은 안 할 것
둘째, 재산을 모으되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 것
셋째, 찾아오는 過客은 貴賤을 구분치 말고 厚하게 대접할 것
넷째, 凶年期에는 財産을 늘리지 말 것
다섯째, 최씨 家門에 시집온 며느리는 시집온 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을 것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할 것 등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家訓이인가? 최씨 家門사람들의 처신함에는 六然이 있었다.
1. 自處超然 - 스스로 처신함에 있어서 초연하게 처신을 해야 한다,
2. 對人楡(애)然 - 남을 대할 때는 화기애애하게 대해야 한다.
3. 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는 물이 맑듯이 하라
4. 有事敢然 - 일이 있을 때는 과단성 있게 처리하라
5. 得意談然 - 뜻을 얻었어도 담담하게 처신하라
6. 失意泰然 - 뜻을 잃었어도 태연하게 처신하라
이상 여섯 가지의 家訓과 處世訓을 더듬어 보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한가지도 빼놓을 수가 없는 것들이다.

이 최부자댁에는 전설도 전해진다. 옛날 경주에 살던 최부자 부부는 난이 일어나 한밤중에 피난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경황이 없어 아기를 데리고 나간다는 것이 그만 베고 자던 베개를 안고 도망치게 되었다.

한참을 가다 정신을 차려보니 품에 안고 도망친 것은 아기가 아니라 베개인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가서 아기를 데리고 나오려고 했으나 이미 동네는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어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산 속에 몇 날 동안 피신해 있던 최씨 부부는 난이 진압되고 소동이 잠잠해 지자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집에 들어와 방문을 열어보니 집에서 기르던 개가 두고 간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이 아니가!

난이 일어났을 당시 이 개는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주인이 아기를 남겨두고 피난을 떠나자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 대신 주인 아기에게 젖을 먹였던 것이다. 자연히 이 개의 강아지들은 젖을 먹지 못해 모두 굶어 죽고 말았다. 최씨 부부는 이 어미개의 은혜에 보답 하고자 자식처럼 사랑하며 아끼고 죽은 후에는 후히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고택을 살피는 것은 풍수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육과정이다. 풍수란 단순히 음택으로만 이야기 할 수 없다. 바로 양택이 풍수의 나머지 반쪽인 것이다. 아울러 시대가 흐를수록, 혹은 문명이 발달할수록 양택은 더욱 중요해진다.

양택을 살핌에 있어 중요한 것은 역시 양택삼요이다. 즉, 배산임수, 전저후고, 전착후관이라는 중요성은 물론이지만 이 양택삼요는 가장 기본이 되는 기분과 같은 것이다.

그밖에 동사택과 서사택을 따져 동일사택내에 문주조가 배치되어 있는지에 따라 이 주책의 흉함과 복가를 구별하였다.

혹자는 주택이 자리한 위치를 따져 산맥을 따지기도 한다. 즉 어느 주택이 어느 산맥의 갈라진 지각의 끝에 자리하고 있는가에 따라 기운이 달라진다는 것인데 그다지 신빙성은 없다고 보인다.

예로부터 풍수사들이 양택을 정하거나 양기풍수를 설파할 때는 산의 흐름을 따진 것이 아니라 집이 자리할 마을의 국새와 더불어 흉함이 없는가를 따졌다. 즉, 마을을 위태롭게 하는 못난 사격이 없으며 교쇄가 뛰어나고 물이 감싸주면 최고의 길지로 보았다. 아울러 남향이라는 의미는 태양을 많이 받는 구조로 선호했다. 그러나 북향의 경우에도 산을 등에 지고 있으면 길지로 보았다.

그다음에 추가로 보는 것이 바로 혈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기맥이 흐르고 있는 곳이라면 동일한 지역에서도 가장 좋은 곳으로 본 것이다. 즉, 교쇄가 이루어진 마을에서 혈판이 있다면 주택을 지을 가장 길지로 보는 것이지만 반드시 혈이 선행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널리 퍼진 혈판은 음택보다 양택의 길지로 보았다.

최씨 고택의 경우 겉으로 보아서는 터가 잘 보이지 않는다. 고택 앞에서 살피면 좌우측으로 가는 기맥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좌측으로는 기맥이 흘러 지각이 발달하여 향교가 있는 방향으로 흐르고 오른쪽은 빈 공터가 나오는 곳까지 이어진다. 

집을 나서 뒤로 돌아가 길에서 바라보면 완만한 맥이 고택의 좌측에서부터 밀려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선덕여왕릉이 있는 방향에서 흘러온 기맥이 낮게 기복하여 최씨 고택 뒤에 둥군 모양으로 뻗어가며 교동향교 방향으로 하나의 지각을 형성하고 다시 뻗어 나와 최씨 고택 뒤를 지나 뻗어나가며 다시 하나의 지각을 만들었다. 지각을 지나친 주룡은 점차 힘이 약해져 흩어진 모습이다.

최씨 고가를 둘러싼 용맥 뒤는 넓은 벌판인데 사람의 손을 탄 탓이다. 평야지대에게 때문에 산이 넓게 퍼진 모양이지만 다가가 최씨 고택의 뒤에서 바라보면 희미하지만 불룩한 모양임을 알 수 있다.

2개의 지각이 양 옆으로 나오고 아늑한 당판이 조성되어 있으며 뒤로 불룩한 모습, 즉 귀성이 갖추어져 있다면 이는 전형적인 와혈이라 할 것이다. 즉, 최씨 고택은 전형적인 와혈의 혈상을 갖추고 있으며 아울러 고택이 당판에 정확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덧붙인다면 최부자댁을 나서 안산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풍수사들 중에는 형상학을 논의함에 있어 죄부자댁 앞 냇물 건너 안산의 마치 말의 구유 형상이라 부자가 났다고 한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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