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봉선사는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25번지 운악산(蕓岳山) 아래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다.

『봉선사본말사지』의 「봉선사」조에 의하면 운악산은 한국의 5대 명산 중 하나로 꼽히는데 동쪽은 금강산, 서쪽은 구월산, 남쪽은 지리산, 북쪽은 묘향산, 그리고 가운데가 운악산이다. 이것은 중국의 오악(五岳)을 모방한 것으로 경기지방 역시 이를 설정하여 개성의 송악, 과천의 관악, 연천의 감악, 가평의 화악, 양주의 운악이라 하였다.

역사를 더듬어 봉선사의 창건은 고려시대인 969년(광종 20)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에 의해서였다.

창건 때의 이름은 산 이름과 같은 운악사라고 하는데 사실 이러한 창건내용을 전하고 있는 《봉선사본말사지》의 <봉선사>조에서도 구체적인 자료나 문헌에 대한 언급이 없다.

절의 창건주라고 한 법인국사의 행장을 살펴보아도 이 운악사의 창건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한편 가평의 운악산에 위치한 현등사도 처음에는 운악산사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곧󰡐운악산사󰡑라는 것이 절 이름이 아니라󰡐운악산에 있는 절󰡑정도의 의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비록 대규모의 가람은 아니었지만, 조선초 봉선사로 거듭나기 이전에 사찰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물론 절의 실질적인 창건은 봉선사라는 이름으로서였겠지만, 그 전신으로서 운악사 혹은 다른 이름의 절이 고려시대까지 존재했었다고 보여진다.

창건 이래 고려시대의 봉선사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법등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후 대규모의 가람으로서, 또 경기지방의 으뜸 사찰로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즉 1469년(예종1년)에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의 능인 광릉의 능침사찰로서 크게 중창하면서 비로소 봉선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정희왕후는 능과 절의 간격이 꽤 떨어져 있음을 보고, 절의 동쪽 가까이에 다시 숭은전을 세워 세조의 진영을 봉안하였으며, 세조의 아들인 예종은 봉선사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하기도 하였는데󰡐선왕의 능을 받들어 모신다(奉護先王之陵)󰡑라는 뜻에서 절 이름이 유래하였다. 그러므로 봉선사의 실질적인 창건은 세조의 능침사찰로 중창되면서부터이고 그 창건주 또한 정희왕후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후 명종 때에는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불교계에 새로운 활력이 일어나면서 1551년(명종 6) 지금의 서울 강남에 자리잡은 봉은사는 선종수사찰, 경기도 남양주시에 자리한 봉선사는 교종수사찰에 올랐다. 이때 수진(守眞)스님이 봉선사의 주지로 판교종사도대사(判敎宗事都大師)에 임명되어 전국의 교종사찰을 관장하였다. 전국의 교종사찰을 관장하였으니 그야말로 불교의 임금이나 같은 위치였다.

능사(陵寺)라는 말이 있다. 숭유억불을 주장하고 국시로 삼았던 조선이 불교를 핍빡하면서도 유지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능(陵)을 지키기 위하여 세웠거나 지키도록 지정한 절이다. 사실 이러한 제도는 고려 때부터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내려와서도 그대로 따랐다. 조선은 불교를 억압하였지만 산성을 지키거나 왕릉을 기키기 위해 승인들을 이용하였다.

국가에서는 정책적으로 불교를 억압하고 무시하였지만 왕실의 여인들은 불교를 숭상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유교가 국시인 조선이었지만 사실 유교는 종교로서는 부족하였고 학문이나 사상으로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조선은 왕릉이 조영되면 반드시 사찰로서 왕릉을 수호하고 관리하도록 한 흔적이 보인다. 조선시대의 능사로는 개경사(開慶寺:조선 태조의 健元陵의 능사), 봉선사(奉先寺:세조의 光陵의 능사), 신륵사(神勒寺:세종의 英陵의 능사)가 있다. 3대 태종(太宗)만은 그의 유언에 따라 능사가 없다.

봉선사의 유서를 살펴보자면 1469년(예종 1)에 예종이 이 절 이름을 봉선사라 지어 사액하였는데 이것은 선왕의 능침을 수호하는 원찰이라는 의미이다. 김수온이 지은 「봉선사기(奉先寺記)」에 의하면 봉선사는 1469년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1468년 세조가 승하하자 운악산에 능을 마련하고 세조의 능침사찰로서 봉선사를 중창하였다. 중창불사는 1469년 6월에 시작하여 7월에 낙성하고 9월에 끝났다. 여기에는 세조의 유일한 부마였던 하성부원군 정현조(鄭顯祖)와 세조의 왕위 찬탈시 공신이었던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 능성부원군 구치관(具致寬) 등이 영건제조(營建提調)가 되어 능실 남쪽 아늑하고 물맛 좋은 곳에 터를 잡아 절을 짓는 데 참여하였다.

모두 89칸의 적지 않은 규모였는데 짓는 도중 부실공사라 하여 당시 세조와 정희왕후의 신임이 두터웠던 고승 학열(學悅)과 학조(學祖)에게 승당(僧堂)을 허물고 다시 짓게 하였을 정도로 정성들여 지은 건물이다. 그래서인지 이곳 봉선사의 건물은 왕실의 건물 형태와 유사하게 닮은 건물들이 적지않다.

1472년(성종 3)에는 숭은전(崇恩殿)을 봉선전(奉先殿)으로 그 명칭을 바꾸고, 1480년에 왕명으로 절을 보수하였으며, 1483년 유생과 잡인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당시 절을 무시하고 난장을 치던 유학의 생원들을 생각하면 대단한 조치였다.

그리고 1488년에는 전각의 지붕을 청기와로 바꾸었다. 그 후 연산군 시대에는 봉선사에 두었던 2인의 참봉제도를 폐지하는 등 사세가 축소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봉은사와 함께 다시 왕실의 원찰로 중요시되었다.

1551년(명종 6)에 봉은사는 선종(禪宗) 수사찰(首寺刹), 봉선사는 교종(敎宗) 수사찰로 승격되었는데 이것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불교계에 새로운 활력이 일어나면서 비롯된 결과이다.

문정왕후는 1550년 12월 15일 당시 우의정이었던 상진(尙震 : 1493∼1564)에게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선교 양종을 복립(復立)하고 봉은사를 선종 수사찰, 봉선사를 교종 수사찰로 정할 것과 승과(僧科)를 부활하여 선교 양종의 인재를 시험으로 뽑으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1551년 6월 25일에 보우(普雨)를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 봉은사 주지로, 수진(守眞)을 판교종사도대사(判敎宗事都大師) 봉선사의 주지로 임명하여 전국의 선종과 교종사찰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한 식년시와 증광시에서 모두 승과를 보게 하니 1552년에는 봉선사에서 승과고시인 교종시(敎宗試)가 열려 국가에서 공식으로 인정하는 승려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1566년에 선교 양종이 백지화되어 봉선사도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받았는데 이것은 불교 부흥의 중심에 있었던 문정왕후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전체를 살펴보면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부흥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교종의 맥을 잇는 학승들은 항상 봉선사를 근본 도량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 후 봉선사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광릉을 훼손하는 등 작폐를 부리다가 퇴각하면서 방화하여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다행히 이 때 낭혜정현(朗慧正玄)에 의해 대웅전과 약사여래좌상은 화를 모면하였으며, 세조의 어진(御眞) 또한 봉선사 승려 삼행(三行)이 모셔내어 광릉 참봉이었던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의주 행재소로 모시고 갔기 때문에 열성어진으로 태조 어진과 함께 보존될 수 있었다.

왜군이 퇴각하자 1593년 주지 낭혜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전각들을 중건하였으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청군에 의해 또다시 전각 일부가 소실되는 화를 입게 된다. 이에 1637년 계민(戒敏)이 조정의 힘을 빌려 소실된 전각을 재건하였다.

이후 1715년(숙종 41) 청풍루(淸風樓)를 신축하였고, 1749년(영조 25) 주지 재점(再霑)이 법당을 중수하였으며, 1780년(정조 4)에는 정희왕후가 중창했을 때 근처 묘적암에서 모셔온 약사여래좌상을 개금하였다.

1790년에 봉선사는 전국 5규정소(糾正所)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수원 용주사(龍珠寺)의 낙성을 계기로 남북양한(南北兩漢)과 용주사, 봉은사, 봉선사를 5규정소로 정하고 전국의 사찰을 감독하게 할 때 봉선사는 함경도 일원의 사찰을 관장하게 되었다.

1902년(광무 6)에는 원흥사(元興寺)가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 되면서 봉선사는 전국 16개 수사찰 가운데 하나가 되어 경기도 내 본산이 되었다.

그리고 1911년 일제의 사찰령 반포로 전국 사찰이 31본산 체제로 구획될 때 봉선사는 그 중 하나로 지정되어 교종본산으로 경기도 북부 일원의 사찰을 관장했다. 지금까지도 봉선사는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사찰로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가람은 계속해 수축하고 증축하거나 개축하지 않으면 무너지고 퇴락하기 마련이다. 일제 식민기인 1925년에는 주지 월초거연(月初巨淵)이 다시 중수하였고, 1968년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가 되어 현재 고양시를 제외한 한강 이북 10개군 82개소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계속해서 말사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므로 날이가면 갈수록 봉선사의 영향력은 확대일로에 있다.

봉선사는 현재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전쟁 당시 1·4후퇴 후 중공군이 이곳에 진주하자 미군이 집중폭격하여 16동 150칸의 당우가 완전 폐허화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옛 모습을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는 자료는 『고적도보(古蹟圖譜)』에 실린 사진으로 용주사와 같은 가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정면에 솟을대문이 있고 좌우로 줄행랑이 있다. 행랑 안에 외정(外庭)이 있으며 누문을 통해 들어가면 내정(內庭)이 있다.

그리고 내정 좌우에 승당과 선당이 ‘ㄷ’모양으로 자리 잡았으며, 내정 정면 상단에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 동쪽 조금 높은 곳에 어실각이 있는 것도 용주사나 봉은사의 구조와 같다. 재궁(齋宮)과 사찰의 혼합건축 양식인 것이다.

큰법당은 원래 규모보다 줄여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창건은 고려 광종 때라고 하지만 명확하지 않다. 1469년 중건 이후 1677년 계민이 일괄적으로 다시 건립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으로 폐허화하였다가 1970년에 정씨문수행(鄭氏文殊行)의 대시주로 운허 스님이 복원하였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부처만 모셨고, 그 뒤에 영산회상탱화를 모셨으며, 내부 좌우 벽면과 후벽에 한글 화엄경과 고려대장경판 법화경을 동판에 새겨 부착해 놓았다. 그리고 편액은 1970년 운허스님의 뜻에 따라 ‘큰법당’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한글화를 위한 역경사업으로 대표되는 불교 대중화 사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성각은 큰법당 서쪽 언덕 위에 있는데 산령각(山靈閣), 북두전(北斗殿), 독성각(獨聖閣)의 세 개 현판이 걸려 있다. 1926년에 주지 월초가 처음 지은 것으로 한국전쟁 때에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법당이다. 정면 중앙에 1908년(융희 2)에 새로 조성한 칠성탱화를 모셨고, 왼쪽에는 1972년에 조성한 산신탱화, 오른쪽에는 독성탱화를 모셨다.

개건당(開建堂)은 1977년 정보현행(鄭普賢行)의 시주로 삼성각과 같은 규모로 건립되었다. 개산대공덕주(開山大功德主) 정희왕후 윤씨와 중건공덕주(重建功德主) 계민, 그리고 정문수행을 모시기 위한 것이므로 개산과 중건 두 낱말을 포개어 개건당이라고 하였다. 내부 중앙에는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셨고, 왼쪽에는 계민과 월초의 진영을 모셨다. 개건당의 편액은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峰)이 썼다.

설법전(說法殿)은 청풍루라고도 하는데 120평 건물로 수천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한국전쟁 전 천왕문과 해탈문과 소설루(小雪樓)가 있던 자리에 지은 누각이다. 동쪽 벽에는 단을 차려 아미타불과 탱화를 모셨으며, 서쪽 벽에는 영단(靈壇)을 차렸다.

남쪽 정면에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이 쓴 ‘청풍루’ 현판이 걸려 있고 북쪽 정면에는 시암(時庵) 배길기(裵吉基) 글씨의 ‘설법전’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서쪽 외벽 중앙에는 심은(沁隱) 전정우(全正雨)가 쓴 ‘불천회관(佛泉會館)’이 걸려 있는데 불천은 운허의 아호이다. 

어실각(御室閣)은 봉선전 자리에 있는 것을 재건하여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셔왔는데 1758년(영조 34)에 영조의 양모인 영빈(寧嬪) 김씨의 묘소를 부근 장현리에 모시게 되자 숙종과 인경(仁敬), 인현(仁顯), 인원(仁元) 세 왕후 및 영빈의 위패를 이곳에 함께 모셨다.

봉선사는 이처럼 왕실과 인연을 맺으면서 왕실의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 밖에 봉선사는 다경실(茶經室), 방적당(放跡堂), 동별당, 종각 등 크고 작은 전각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봉선사는 크낙새와 수목원으로 널리 알려진 광릉에서 아주 가깝다. 만약 의정부에서 온다면 측석령 고개를 넘어 광릉 방향으로 와야 한다. 광릉 매표소에서 광릉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전나무 숲길 따라 남동쪽으로 1.5km쯤 내려가면 수십채의 식당과 유흥업소가 영업 중인 동네가 나타난다. 여기서 오른쪽 길로 방향을 틀어 일주문을 지나고 주차장을 지나 300m가량 들어간 곳에 봉선사가 있다.

서울 강남이나 구리방향에서 접근하기도 어렵지 않다. 구리에서 일동방향으로 향하는 국도를 타고 계속 달리다 장현을 지나 광능내로 들어가는 도로로 들어가다가 도로 밑으로 지나는 터널을 지나 314번 지방도를 타고 가면 봉선사를 찾기가 쉽다.

공릉동에서 출발한다면 태능으로 나가서 태능컨트리클럽을 지나 덕송I.C.를 통과하고 수락산 유원지를 거쳐 의정부시로 들어가기 전에, 송산동 용현아파트에서 우회전하고 의정부 우회도로를 통해 민락교 다리 앞 3거리를 지나 314번 도로로 들어갈 수 있다.

봉선사에 가면 가장 먼저 찾아볼 것이 대웅전 처마 밑에 걸린 현판이다.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큰법당이라고 한글로 쓴 것이 이채롭다. 1970년 운허선사(춘원 이광수 팔촌 동생)가 대웅전을 세우면서 써서 달았다고 한다.

지금은 간혹 한글로 쓴 현팜이 보이지만 당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또한 경내에 봉선사 대종(보물 제397호)이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동종 중에서 몇 개 남지 않은 것으로 예종 원년(1469)에 왕실의 명령에 따라 만들었다. 조선왕조 전기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절에서 100m 떨어진 곳에 큰 비석 여러 개가 눈길을 끈다. 이 비석들은 절 입구쪽에 있어 절에 들어가기 전에 살필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춘원 이광수 선생 기념비다. 그는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패하기 전 4년간 남양주 사능 부근 작은 집에서 산 적이 있는데 그때 한해 겨울을 봉선사에서 지낸 인연이 있다.

당시 주지 스님이 운허라 그런 인연을 맺은 것이다. 비석에는 그가 남긴 글 중 일부를 빼곡히 새겨놓았는데 글은 주요한이 짓고 글씨는 서예가 원곡 김기승이 써서 1975년 가을에 세웠다.

풍수를 익히고 배우느라 전국을 돌다 보면 전국에 산재한 사찰은 한 번 씩 돌아다니게 되는데 그 연우로 사찰의 특징뿐 아니라 어떤 목적을 지닌 사찰인지 파악하게 된다. 능사처럼 왕릉을 지키는 사찰이 있는가 하면 남한산성 내부의 사찰처럼 승병을 육성하고 산성을 지키기 위해 건립한 사찰도 있다.

또 비보사찰로 세운 사찰도 있고 돈이 많은 부자나 관리, 혹은 독실한 신도가 세운 사찰도 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던 사찰은 우리 역사와 함께했으며 오래도록 민속 신앙을 포용해왔다는 것이다. 또 요즘처럼 어수선하고 삶의 위협이 가중되는 국제사회에서 불교란 과거 호국사찰로서 존재했다는 것이다.

종루에서 바라보니 좌측으로 춘원 이광수를 비롯한 많은 비석이 세워져 있는 곳이 보인다. 그 사이에는 사찰의 좌청룡이 지나가고 있다. 좌청룡 너머로 보이는 비석군이 심상치가 않다. 다시 내려와 살펴보니 청룡이 앞을 가리거나 교쇄한 것이 아니라 주차장 방향으로 비주했다. 다시 살펴보니 이는 청룡 배반이 아닌가?

다시 종각으로 올라가 살펴보니 완연한 청룡배반이다. 애매한 것은 청룡이 달아난 형상이지만 작은 지각이 뻗어 비석이 많이 세워진 공간과 청룡 사이에 뻗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절마당에서 좌청룡이 달아나는 모습이 완연하다.

그나마 역리사(逆理砂)가 아니라 다행이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오랜 세월 이 사찰을 짓거나 지키고 중착했던 많은 고승들이 이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면 내가 무언가 잘못 생각한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기 싫은 것은 버려야 할 아집 때문인지 모르겠다. 정말로 청룡배반인가? 그렇다면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하다. 음택지가 아니라서 골육상쟁이나 자식들의 불효는 없겠으나 바람이 불어드는 것을 막아주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겠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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