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교현리. 오봉산 관음봉 중턱에 자리 잡은 석굴암은 서울 인근에서는 숨은 보석과도 같은 나한기도도량이다.

절 뒤로 펼쳐진 빼어난 산세가 그렇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 또한 맑고 깊다. 게다가 군부대 초소를 통과해야만 갈 수 있어, 아직까지는 일반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지라 서울과 바로 인접해 있으면서도 천혜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또 서울의 명산 북한산과 도봉산, 그 중에서도 산세가 가장 뛰어난 도봉산 서쪽에 있으며, 석굴암 위로는 다섯 봉우리가 그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석굴암이라고 하면 흔히 경주의 석굴암을 생각한다. 그 다음이 경상도 군위군의 제2석굴암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석굴 사원의 형태를 띈 사찰은 적지 않고 서울 근교에도 여럿 있다. 목정굴이라던가 문수사 등도 이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경기지역, 서울 인근의 석굴사원 중 한곳이 바로 양주의 석굴암이다. 석굴암(石窟庵)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1번지 오봉산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선사의 말사이다.

http://www.koreatemple.net/korea_temple/의 자료에 따르면 서울에서 석굴암으로 가는 코스가 가장 가깝다. 36번 시외버스가 불광동에서 일영, 장흥, 송추를 경유하여 의정부까지 운행되는데 이 버스를 이용하여 북한산성을 지나 오봉산 휴게소에 내리면 석굴암을 찾아가기가 아주 수월하다. 

이 버스는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그러나 석굴암 입구에서 석굴암까지는 대략 4킬로의 거리이므로 바쁘게 찾아가기는 무리가 있다.

이외 구파발에서 송추행으로 가는 704번 시내버스가 북한산성을 지나 석굴암이 있는 오봉산 휴게소로 가는데 15분 간격으로 운행되며, 오봉산 휴게소에서 석굴암까지는 군부대를 지나 산길을 따라 약간 경사진 길이 4㎞정도 거리에 있다. 역시 4킬로미터의 거리를 걸어가야 하므로 약간의 여유는 필요하다. 대략 1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초파일이나 관음재일과 지장재일 등의 절에 행사가 있는 날에는 다른 날과 비교하여 조금 편하게 절에 오를 수 있다. 오전 8시 30분부터 10분 간격으로 절에서 운영하는 승합차가 오봉산 휴게소에서 사찰까지 왕복으로 운행되고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에는 보다 편하게 접근할 수 있다. 서울에서 석굴암으로 올 경우 구파발에서 349번 도로를 이용하여 송추로 진입하기 전에 석굴암이 있다.

구파발에서 석굴암이 있는 오봉산 휴게소까지는 20분정도 소요되며, 이곳에서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 비포장도로를 올라가면 석굴암에 다다를 수 있다. 이외 원당에서 39번도로를 이용하여 장흥관광지 입구로 진입하면 송추검문소가 나오고 그곳에서 구파발방면으로 1㎞정도 들어오면 석굴암이 있는 오봉산 휴게소가 있다.

1년 전만 해도 주위 군부대와 군사 시설이 있어 사찰방문을 위해 철저한 검사가 있었으나, 이제 사찰 신도증이나 신분증만 있으면 쉽게 사찰을 찾아 갈 수 있다. 그러나 항시 열려있는 것은 아니어서 때때로 통제를 하고 있으므로 뮤턱대고 찾아가면 때로는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사찰까지는 비포장도로로 승용차도 충분히 오를 수 있으나 날씨가 험할 경우 석굴암으로 오르는 길 중턱에 차를 주차하고 10분정도 도보로 오르는 것이 좋다. 오봉산 휴게소에서 석굴암까지는 도보로는 30-40분정도 소요되며, 신도들을 위해 기도시간에는 승합차를 운행한다.

2008년 11월 19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관산을 나섰다. 오늘은 날씨도 춥고 학기 중에 휴강을 한 터라 많은 회원들이 많이 모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 차를 이용해서 편한 마음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애초에는 진관사를 비롯해 서울 은평구지역의 문화재와 전주이씨 왕자들의 묘역을 둘러볼 생각이었으나 어찌 하다 보니 그동안 염두에 두었던 석굴암을 오르기로 했다.

2007년에 새로이 개통된 순환도를 타고 돌기아가기로 했다. 어느 비구니의 강렬하고도 몸을 버린 저지로 인해 이 고속도로의 사패산 터널은 예정보다 적어도 4년이 지난 이후에 개통되었고 대략 4조원 이상의 국고손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비구니는 자연을 보호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다. 종교인은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목적도 중요하지만 방법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구리 방향에서 의정부로 향하다가 사패산 터널을 지난다. 이곳을 지나면 곧 송추로 나가는 나들목이 나온다. 송추나들목을 나서 대략 구파발 방향으로 700여미터를 가면 좌측으로 석굴암 표식이 보이고 곧 방향을 틀어 산길로 올라갈 수 있다. 큰 길에서 산길을 따라 대략 4킬로미터를 오르면 산의 벼랑을 깎아 세운 듯한 석굴암이 나타난다.

석굴암이 자리한 곳은 이는 오봉(五峰)으로 불리는 곳 아래에 해당하는 곳으로, 석굴암(石窟庵)은 서남쪽에 있는 관음봉(觀音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가람의 지세는 위로는 도봉이 치닫고 아래로는 삼각산이 모여서 마치 여러 별이 모여 북극성을 떠받들고 있는 듯환 지세로 전체의 국세가 크고 뛰어난 산세이다. 또한 물이 맑고 골이 깊어 수행하는 사람이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도봉산은 주봉인 자운봉(紫雲峰)에서 남쪽으로 만장봉(萬丈峰)과 선인봉(仙人峰)이 있고, 서쪽으로 오봉산 석굴암(五峰山 石窟庵)이 있으며, 우이령을 경계로 북한산을 접하고 있다. 또 도봉(道峰)은 풍수지리상으로 왕관(王冠)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의 오봉(五峰)은 주봉을 호위하는 장군기마상(將軍騎馬像)이라 할 수 있다.

석굴암 창건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께서 창건했다는 설도 있고, 도선국사께서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고려시대 나옹화상이 공민왕시절에 왕사로 3년간 수행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오봉산의 산세와 그 절경은 옛 대사들의 창건설을 뒷받침해 주듯 고찰이 들어설 자리임을 짐작케 한다. 그만큼 산세가 뛰어난 바가 있다. 산세를 보듯, 그리고 가람을 보듯 석굴암이 자리한 관음봉 중턱은 정말 빼어나기가 그지없어 선풍을 지키는 수도처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찰과 영험한 기도처는 대부분 우람한 바위나 바위산을 등지고 있는데 오봉을 이루는 다섯 개의 봉우리는 하나같이 맑은 기를 뿜어내는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석굴암은 전설이 적지 않고 역사가 말해주듯 고승들이 수련하여 득도한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의 제자인 설암관익(雪庵寬益)대사가 주석하며, 석굴에 지장과 나한 두 존상을 조성했으며, 1455년에는 왕후원찰로 중수하기도 하였다.

이후 끊임없는 고승들이 주석하며 선맥을 이어갔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이 가람은 일반인들에게 오래도록 잊혀진 사찰이 되었다. 그러나 근래에 초안스님의 불사와 기도, 그리고 그의 상좌인 도일스님의 원력으로 현재 석굴암은 일반인들에게 나한기도의 도량으로 찾아 가고 있다.

출입할 때 경험했던 것처럼 출입구에는 군인이 보초를 서고 출입을 통제하고 깊은 계곡은 군부대의 유격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따라서 석굴암이 자리한 계곡은 깊숙한 곳까지 수십년간 군사보호시설로 묶여 속세의 때가 묻지 않았으며, 옛 고승대덕의 수도처로서 지금 당장이라도 영험함을 보일 것만 같다.

오래도록 군사보호시설로 묶여 있었던 것이 다행인지 오봉산의 뛰어난 산세와 자연절경은 그대로 간직되어 있으며, 산길을 오르는 곳곳마다 비경이 펼쳐진다.

조선시대 설암스님이 오봉의 아래에서 발원하여 조성한 지장과 나한님!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이곳에 치성을 드리러 오는 모든 분들에게 나한의 신통력이 전해진다. 아울러 이곳 석굴암은 나반존자의 영험함이 서린 기도도량이다.

석굴암은 자주 가고 싶고, 가면 앉고 싶고, 앉으면 기도가 절로 되는 나한기도도량이다. 석굴암이 경주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양주의 석굴암은 기도처로 그 이름을 알리고 있다.

유명한 사찰이나 기도처에는 어디나 그럴싸한 전설이 흐르고 있다. 경기도의 석굴암도 그런 전설이나 설화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http://www.koreatemple.net/korea_temple/의 자료와 기록에 따르면 석굴암에도 전설이 흐르고 있다.

나한신앙은 나한(羅漢)을 대상으로 하는 불교신앙의 하나로서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이며 의역하면 살적(殺賊), 응공(應供), 응진(應眞)이라 한다. 살적은 수행의 적인 모든 번뇌를 항복 받아 죽였다는 뜻이고, 응공은 모든 번뇌를 끊고 도덕을 갖추었으므로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뜻이며, 응진은 '진리에 상응하는 이'라는 뜻이다.

불교가 전래된 이래 명맥을 이어 국교로서 오래도록 존재하고 전파되었던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나한신앙이 유행하였고,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크게 성행하여 나한재(羅漢齋)가 빈번하게 열렸으며, 나한을 봉안한 전각을 사찰의 금당(金堂)으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 나한전을 주불전으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하니 나한도량도 여럿 있었던 모양이다.

오봉산 석굴암은 중부 제일의 나한기도 도량의 하나로 그 영험이 뛰어나기로 이름이 높다. 실제 나한기도 도량은 지극정성으로 기도 정진하면 빠른 시간 안에 반드시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반면, 계율을 어기고 소홀히 하거나 몸가짐이 부정하면 엄한 과보를 받는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나한기도 도량으로는 우선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이기는 하지만 함경남도 길주군 석왕사, 경북 청도 운문사 사리암, 경북 영천군 거조암, 전북 완주군 봉서사, 서울 수유동 삼성암을 꼽을 수 있다. 이중 삼성암이나 운문사 사리암은 하루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의 염원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통일이 되어야만 찾아갈 수 있지만 함경남도 북청군 설봉산(雪峰山) 나한사(羅漢寺)의 경우 이름 자체가 나한이고 오봉산 석굴암과 같이 '동짓날 팥죽과 불씨' '부정한 이가 찾으면 마르는 샘물' 등 비슷한 영험과 설화를 갖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오봉산 석굴암의 독성님이 보이신 영험과 이적(異蹟)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그 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6·25전쟁이 끝난 지 2년쯤 된, 1950년대 중반의 일이다.

당시 주지 초안선사가 석굴암에 움막을 짓고 모친 조삼매심 보살님, 화주 윤일광심 보살님과 함께 석굴암 중창발원 천일기도를 드리던 중 인근마을에 사는 세 명의 노파들이 불공을 드리기 위해 찾아왔다.

당시 초안선사는 승복 한 벌을 구할 수 없어 제대할 때 입었던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을 정도로 어려운 사중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었지만, 지극정성으로 드리는 선사의 기도발원은 공덕이 뛰어나기로 소문이 나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석굴이 너무 비좁아 서너명밖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황씨 부인 등 기도객 세 명만이 석굴에 들어가고, 초안선사와 윤일광심 보살은 석굴밖에 자리를 깔고 앉아 염불과 기도를 올렸다.

사건은 '생마지'가 발단이 됐다. 본래 독성님은 생식(生食)을 하시기 때문에 그날도 석굴암에는 생공양미 세 불기가 올려졌다. 그러나 이 같은 이치를 알 턱이 없는 노파들은 불공 중간에 자기들끼리 "절 사람들이 게을러 밥을 지어 마지를 올리지 않는다"고 험담을 했다. 그들은 생마지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불공이 끝나갈 무렵 고개를 들어 나한상을 쳐다본 세 노파는 그 자리에서 놀라 황급히 맨발로 석굴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들의 얼굴은 놀라움과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초안 선사와 윤보살이 노파들의 손에 이끌리어 황급히 석굴에 들어가 보니 생쌀 불기마다 움푹 패인 자국이 있고, 없어진 생쌀은 독성님의 입과 가슴, 그리고 무릎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다. 그 날 이후 석굴암 인근 마을은 물론 경향 각지에 '석굴암 부처님이 생쌀을 드신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전국의 기도객이 공양미를 들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초안선사와 윤보살이 화주 탁발을 나가면 사발 가득히 공양미를 시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결국 독성님의 이 같은 이적과 영험에 힘입어 중창불사 발원 천일기도가 끝날 즈음에는 비록 임시 가건물 이었지만 요사채와 삼성각의 낙성을 볼 수 있었고, 이 때 석굴암과 인연을 맺은 선남선녀들은 이후 계속된 40여 년 중창불사를 원만성취하는데 있어 누구보다 앞장서 시주공덕을 쌓아 나갔다. 그 때 이후로 오봉산 석굴암 나한전은 생미를 올리는 도량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석굴암의 석굴로 들어서서 살펴보면 왼쪽에는 바위틈에서 나오는 자그마한 샘이 있다. 지금은 지하수를 뚫어 물을 풍족히 쓰고 있지만,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이 샘이 석굴암의 유일한 식수원이었다. 이 물을 용왕샘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용왕샘은 가뜩이나 부족한 수량에도 불구하고 강우량과 상관없이 자주 말라붙곤 하였다. 특히 부정한 이들이 샘물을 마시려 하면 아무리 비가와도 샘에는 물이 고이지 않았다.

그 때도 6.25전쟁 직후라 석굴암에 움막을 짓고 살 때였다. 중병을 앓는 한 처사가 석굴암에 움막을 짓고 요양을 하게 되었다. 백일기도를 드리던 처사는 어느 날 집에를 다녀오겠다고 하였다. 주지였던 초안 선사는"기도 중에 부정한 것을 접하면 안 된다"고 신신 당부해 보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욕심이 있고 허투루 하면 안된다는 당부를 저버리는 사람이 꼭 있기 마련이다. 처사가 돌아오자 그만 샘이 말라붙고 말았다. 한편 초안 선사와 함께 움막에 기거하던 그 처사는 집에 다녀온 후로 무엇인가를 몰래 먹는 모습이 목격되곤 했다. 이를 이상히 여기기는 했으나 차마 누구도 추궁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화주 윤일광심 보살이 마른 뱀이 우물 위 허공에서 또아리를 틀고 왔다갔다하는 현몽을 꾸었다. 윤보살이 꿈 이야기를 초안선사에게 하니, 스님이 그 즉시 처사에게 수상쩍은 점을 캐물었다.

결국 처사가 실토하기에 이르렀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 처사가 집에 갔을 때 형수가 몸에 좋다면서, 뱀 말린 것을 갈아 약으로 만들어 주어 몰래 가져와 먹었다는 것이다. 초안 선사는 크게 노하여 "그러한 부정한 것을 먹으며 몸이 낫기를 바란다면 절에 있을 필요가 없다"며 집으로 쫓아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처사는 병이 악화되어 생을 마감했다. 이후에도 석굴의 우물은 보신탕 등 부정한 음식을 접하거나 몸가짐이 바르지 못한 신도가 오면 예외 없이 물이 말라 버렸다. 사실 보신탕과 같은 음식이나 비린 것을 먹은 사람이 절에 들어오면 우물이 마르는 경우에 대해서는 여러 사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석굴암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흐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전인 1792년의 일이다. 당시에는 석굴암에 노스님과 동자승 단 둘이서 살았다고 한다. 그 날은 마침 동짓날이었고, 밖에는 많은 눈이 와서 마을과의 왕래가 두절되었다.

동자승이 아침 일찍 일어나 팥죽을 끓이려 아궁이를 헤집어 보니 그만 불씨가 꺼져 있었다. 노스님께 꾸중들을 일에 겁이 난 동자승은 석굴에 들어가 일심으로 기도하다 지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눈을 뜬 동자승이 공양간에 가보니 아궁이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바로 같은 시간. 석굴암에서 10여 리 떨어진 아랫마을 차(車)씨네 집에서도 팥죽을 끓이고 있었다. 당시 50대 초반의 차씨 부인(파평 윤씨)이 인기척에 놀라 부엌 밖으로 나가보니 발가벗은 아이가 눈 위에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차씨 부인이 놀라 "어디에서 새벽같이 왔는냐" 하고 묻자 동자승은 "오봉 석굴에서 불씨를 얻으러 왔다"고 대답했다. 차씨 부인은 하도 기가 막혀󰡒아니, 스님도 너무 하시지. 이 엄동설한에 아이를 발가벗겨 불씨를 얻으러 보내는 법이 어디 있냐󰡓고 안타까워하며, 때마침 펄펄 끓는 팥죽 한 그릇을 떠서 동자승에게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보통아이 같으면 펄펄 끓는 팥죽을 수저로 불며 떠먹었을 텐데, 이 동자승은 그릇째로 들이마시더라는 것이다. 얼른 부엌에 가서 불씨를 담은 차씨 부인은 소중히 동자승에게 건넸고, 불씨를 얻은 동자승은 홀연히 자취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차씨 영감(차대춘 씨)에게 부인이 새벽에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자, 차씨 영감은 혹시 동자의 흔적이라도 있을까 해서 사립문 밖에 나가 보았지만 눈 위에는 발자국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후 눈이 어느 정도 녹아 노스님이 아랫마을에 내려가니 차씨부부가 일주일 전 동짓날 새벽에 일어났던 일의 전말을 설명하면서 노스님에게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노스님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동짓날 사시에 마지를 드리려고 예불을 드릴 때 나한존상의 입가에는 팥죽이 묻어 있고 김이 무럭무럭 났던 것이 새롭게 떠올랐다. 그래서 동자승을 불러 확인해 보니, 동자승이 불씨를 꺼뜨리고 항망한 중에 나반존자께 기도를 들었는데, 불씨가 저절로 되살아나 팥죽을 끓여 부처님께 공양하였다는 것이었다.

바로 동자승의 안타까운 사정을 굽어 살핀 독성님이 이적(異蹟)을 보이셨던 것이다. 이후 독성님께 팥죽을 공양한 차씨 집안은 6대조 차대춘(1802년 작고)씨와 2000년 현재의 차영민(60세)씨에 이르기까지 6대째 화제(話題)의 그 집에서 그대로 살고 있다.

차씨 집안은 특히 이날 독성님께 팥죽을 공양한 음덕과 어머니의 간절한 나한기도 덕분에 6·25전쟁 피난길에서 잃어버렸던 당시 아홉 살인 차영민씨가 살아서 돌아오는 등 집안이 나날이 번창해 화목한 일가를 이루었다.

정말로 필설로 가할 수 없는 대단한 이적이 아닌가?
산길을 오르면 다섯의 오봉이 우뚝 솟아 있는 오봉산이 보인다. 마치 붓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 보이는 산이다. 풍수지리에서는 이를 문필봉이라 하는데 좋은 양택이나 음택의 자리에서 이 러한 모양의 산이 보이면 과거에 급제하거나 출세하는 후인이 나온다고 해석한다. 이곳이 불자들이 머무는 가람이니 옛날로 말하자면 국사나 나올 자리이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깨달음을 얻거나 불교계에서 학문으로 이름을 날리는 율승이 나올 자리라고도 할 만하다. 하나같이 바위로 이루어져 밝은 서기를 뿌리니 영산이라 아니할 수 없고 누군가 기도처를 찾았을 것 같다.

석굴암은 넓거나 풍후한 곳은 아니다. 석굴암은 바로 오봉산을 배경삼아 협소한 골짜기에 터를 마련하여 지어진 자그마한 암자로 산 아래 장흥과 고양을 바라보며 서향하고 있다.

창건 초기에는 나한전 석굴과 인법당만이 있던 자그마한 산속 암자였으나, 지금은 도일스님의 불사로 여법한 가람을 가진 큰 사찰을 이루었다. 가람은 높이 쌓아 올린 축대를 대지 삼아 마치 산골마을의 밭을 보듯 전각이 들어서 있는데, 맨 아래 주차장을 시작으로 상부에 대중방과 공양간이 있으며, 그 위로 대웅전과 종무소, 범종각, 봉향각, 그리고 나한전 석굴이 자리하고 있다.

또 나한전 석굴 위로는 삼성각과 삼층석탑이 배치되어 있는데, 건물은 모두 서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남향을 고집하는 일반 사찰과 달리 산이 생긴 모양대로 지어졌으니 이 또한 풍수지리의 이법을 끄대로 사용하고 있음이다.

석굴암의 중심 당우는 나한전이나 대웅전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5년에 초안스님이 중수한 건물이다. 석굴암의 주법당으로 초입에 자리하며, 장방형의 화강암을 바른층쌓기 한 높은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이다.

건물 외부는 전면에 2분합의 꽃살창호를 두고 삼면을 내벽으로 마감한 모습으로 내벽에는 관음보살도와 문수동자상이 단청되어 있으며, 어칸에는 1970년 우봉(又峰)스님이 쓴 대웅전 편액과 주련4기가 걸려 있다. 건물 내부는 불단 위로 도일스님이 조성한 목조석가여래좌상과 관음과 지장보살이 삼존상을 이루고 있으며, 영단에 조선후기 설암당 관익스님이 조성한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불화로는 1998년에 회주 초안, 주지 도일, 그리고 금어 박갑철(朴甲鐵)이 조성한 석가모니후불탱과 1991년에 금어 김용희(金容熙)가 조성한 신중탱이 있다. 이외 불구로는 높이 100㎝, 구경 56㎝의 범종이 있으며, 어칸 평방에 '오봉산석굴암대웅전중건기(1975)', '오봉산석굴암석굴중수기(1964)', '오봉산석굴암축대공사(1971)'의 현판 3기가 걸려 있다.

가장 눈에 뜨이는 당우는 당연히 나한전 석굴이다. 석굴암이 나한기도도량으로 기반을 마련한 곳으로, 1964년에 중창주인 초안스님이 중수한 것이다. 1960년대에는 이 석굴에 초안스님과 조삼매심보살 등 3명이 들어서면 공간이 없을 정도로 작은 석굴이었으나, 현재 도일스님이 또 한차례 중수하여 넓은 공간이 확보되었다. 적어도 20여명 이상이 앉거나 불공을 드릴 수 있는 공간이 되어있다.

또 초안스님이 이곳에 처음 들어 왔을 때에는 석굴 내부에 나반존자와 지장보살, 그리고 수구성취다라니경(隨求成就陀羅尼經)목판만이 있었으나, 현재 지장보살은 삼성각으로, 여래좌상은 대웅전으로 이안되어, 현재는 나한전에는 나반존자상과 자그마한 석조나한상 4구가 나반존자 주위를 협시하고 있다. 특히 석조나한상은 앉은키 60㎝, 무릅폭 40㎝의 소형불상으로 설암당 관익스님이 18세기 경기도 지역에서 활동한 한봉당(漢峰堂) 창엽(瑲曄)과 금곡당(金谷堂) 영환(永煥)스님을 모셔 조성한 것이다.

나한전을 나와 오른쪽 뒤, 높은 곳을 바라보면 석탑이 보이고 그 뒤로 삼성각이 보인다. 삼성각은 석굴암에서 가장 놓은 곳에 자리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건물로, 저멀리 임진강을 바라보며 서향하고 있다.

마치 북녘땅을 지켜보시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건물은 자연암반을 기단 삼아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으로, 전면에 1ㆍ4분합의 띠살문을 단장하고, 삼면에 비천상을 단청하였다. 건물 내부는 후벽에 맞닿은 불단 위로 설암당 관익스님이 조성한 석조지장보살좌상을 봉안하고, 후불탱으로, 중앙에 약사, 그리고 칠성, 산신탱을 모셨다. 칠성탱과 약사탱ㆍ산신탱은 모두 1985년에 도일스님이 조성한 것이다. 이외 불구로는 근래에 조성된 법고가 있으며, 불단 좌우로 옥으로 만든 옥탑이 있다.

석굴암은 독성기도처이다. 아울러 나한기도처이기도 하다. 독성기도처의 특징은 하나같이 가파른 바위를 의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삼성암이 그렇고 운문사 사리암이 그렇다. 독성이 여러 가지 이적을 보인 곳으로 독성기도처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수행정진화고 기도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예로부터 산이 수려하고 바위가 영험한 곳에는 기도처가 자리하고 있었다. 반드시 사찰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무속인이든, 관료이건, 혹은 나라에서 제를 지내는 곳이든 가리지 않아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기도처가 있었는데 하나같이 바위를 의지하고 있어 영험함이 드러나는 곳이다. 이러한 기도처의 특징은 아름답고 서기어리는 바위를 등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다수 독성기도처가 하나같이 대단히 아름답고 서기하는 바위를 등지고 있거나 바위산을 주산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석굴암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오봉산의 정기가 뭉친 곳에 자리한 석굴암에서 앞을 바라보면 마치 족두리와 같은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안산이 족두리에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이는 관(冠)의 의미라 볼수 있을 것이다. 오봉이 문필봉이니 강한 문제(文才)의 기운을 얻을 것이다. 아마도 자녀의 학문성취를 비는 기도처로는 어디에 내어 놓아도 견줄 곳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남양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