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창녕에 발을 들였으므로 보물로 지정된 창녕 탑금당치성문기비를 찾아 섰다. 서울 인근에 살고 있는 내가 창녕에 오는 경우는 매우 특별하다.

물론 풍수를 배우고 익히며 연구를 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지만 어느 한 지방에 오래 머물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창녕이란 고장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고장은 아니다. 따라서 창녕에 왔다면 창녕에서 중요한 무엇인가를 찾아보아야 한다.

창녕 탑금당치성문기비(昌寧 塔金堂治成文記碑)는 보물 제227호로 지정되었다. 창녕에서도 보기 드믈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1963년 1월 21일에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니 역사가 제법이나 길다. 서기 810년에 만들어진 유물이니 역사성으로 따져도 새털같이 긴 세월 바라바리 묶어도 모자랄 긴 세월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유물이다.

탑금당치성문기비는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 294번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교리란 향교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지어지는 전통적인 색이 강한 마을 이름이다. 교동, 교리와 같은 마을은 예전에 이 마을에 향교가 있다는 뜻이니 어느 상황이든 모두 같다.

사실 어느 큰 마을에 이런 지명이 있다면 아직도 향교가 남아있을 가능성은 옹후하다.
탑금당치성문기비를 찾아가는 길은 창녕을 처음 찾은 초보자에게도 아주 쉽다. 물론 조금은 헤매지만 주소를 무시해도 창녕군청을 찾아가면 그만이다. 창녕군청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창녕군의회 정문 앞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면 탑금당치성문기비는 논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텅 빈 논 중간에 정성들여 세운 비각이 있어 멀리서도 쉽게 눈에 뜨인다. 이 비석은 일명 인양사(仁陽寺) 비상(碑像)이라고도 하는데, 이 부근에 세워졌지만 이미 사라진 인양사의 금당(金堂) 후편에 세워졌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일대는 전답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로 인정되는 문양의 기와 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있어 당시에는 대가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각 안에는 머리가 결실되고 없는 높이 55㎝가량의 석조좌상 1구가 안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곳에서 볼 수 없고 창녕 박물관에서 보관되고 있다. 또 비석도 한국전쟁 당시 피해를 입어 서쪽 편에 총탄흔적이 있고 북쪽 편 비상에도 총탄 흔적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비는 상부에 이수나 비갓을 세우고 받침돌로 귀부를 새ㅔ우는데 탑금당치성문기비는 귀부와 이수 대신에 장방형의 대석과 옥개형의 개석을 얹은 특이한 모양의 비(碑)로 불사(佛事)조성에 관하여 기록한 특수한 비석이다.

이 비상의 여러 면에는 인양사(仁陽寺)를 비롯하여 이와 관련 있는 여러 사찰의 범종, 탑, 불상, 금당, 요사 등의 조성연대와 소요된 양식에 관하여 낱낱이 기재하였다. 일종의 사적기록이고 달리 보면 연대를 기록한 기록물이다. 더불어 조각솜씨도 보여주려한 듯 보인다. 앞면과 양측면은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고, 뒷면 전부에는 우아한 기법으로 승상이 양각되어 있다.

앞면의 비문(碑文)은 비의 제목 없이 10행으로 각(各) 행(行) 28자(字)를 자경(字徑) 4㎝의 육조체(六朝體)로 새겼다. 육조체도 비석에는 많이 사용하지 않은 문체이므로 시선이 간다. 비문(碑文) 내용은 「조선금석총람」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뒷면으로 돌아보면 양각으로 드러나는 조각을 볼 수 있다. 조상(彫像)이라고 부르는 이 상은 언 듯 보면 머리깍은 승려를 새긴 듯 보이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지장보살(地藏菩薩像)이라고도 하고, 인양사 조관(造管)의 공로자인 한 고승의 조상(彫像)이라고도 하는 두 가지 설이 있는 비(碑)다.

이 비에는 통일신라 혜공왕 7년(771) 인양사 종을 만든 일로부터 이 비석을 세운 신라 헌덕왕 2년(810)까지 40년간 이루어진 일의 내용이 세세히 담겨 있다. 비문에 새겨진 글씨의 형태는 당시에 유행했던 해서체의 범주를 벗어나 여러 가지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새로운 서체의 전개를 살필 수 있다.

아무리 보아도 스님의 모습이 분명하다. 스님은 애띤 얼굴에 자비로운 모습이며, 사람의 몸을 모방한 부드러운 선이 8∼9세기 조각수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는 지장보살의 모습이라 주장하지만 나는 승인의 모습을 새긴 것으로 보고 싶다.

비의 형태를 보고 어떤 목적으로 새워진 것은 알지만 이제까지 내가 보아왔던 다른 여러 비의 모습과는 다르다. 당시 일반적인 비의 형태를 벗어나고, 지나치게 큰 지붕돌이 원래의 것인지는 의심스럽지만 통일신라 전성기의 불찰조성을 기록한 비석으로서 특수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지극히 단순하다고 볼 수 있는 모습의 비, 단순하지만 이 비석이 보물로 지정된 것은 내가 모르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비석이 금당의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지금의 군청이나 의회, 혹은 아파트 자리가 주산이나 뒤를 막아주는 배산의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다른 지역보다 조금 높은 형상을 지닌 곳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비석은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 그곳에 세운 것인가? 단순히 절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세웠다고 하기에는 무언가 설명이 부족한 것으로 보여진다. 혹은 뒷면에 승인의 모습을 지닌 조각이 다른 어떤 불상을 형상화 한 것은 아닐까?

세월은 흐르기 마련이고 역사는 지워져간다. 아무리 역사를 남기려 해도 세월의 흐름은 역사의 기록을 메꿔나간다. 지금 우리가 천년전의 역사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녀 그 시대의 생활상을 짐작으로 파악하는 것처럼 지금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모습을 역시 천년 뒤에는 역사가 지워져 추측으로 만족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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