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유람선 터미널과 군산 국가산업단지를 연결하는 도로는 해변가를 따라 달린다. 시원한 바람 속에 바다의 내음이 짭조롬하게 맛을 느끼게 한다. 이리 저리 눈을 돌려 보아도 도로 양 옆으로 시가지가 전개되어 있기 때문에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이미 해가 저물어가는 늦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본다. 그러나 바다를 보기란 애초에 틀린 듯하다. 목적지를 향해 차를 달린다. 유람선터미널에서 국제선 여객터미널 방향으로 불과 500미터를 갔을까?

목적지는 가까이 있음을 안다. 좌측으로 월명공원이란 표지판을 본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서 월명터널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왔다. 드디어 목적지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월명터널을 지나쳐 200여미터를 가지 못해 우측으로 동국사라는 간판이 보인다.

그래, 이곳이다. 생각 했던 대로 목적지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골목으로 방향을 틀어 비로소 목적지를 향해 간다. 간판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서서 200여미터를 가면 우측에 전형적인 일본 사찰형식을 지닌 동국사가 나타난다.

어라!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산을 보고 선현들의 묘를 살핀다. 때로는 높은 산에 오르고 때로는 파랑에 흔들리는 섬을 찾아 나선다. 우리나라 방방곡곡 어디를 가나 사찰이 자리한다.

건너다보니 절터라는 말이 있듯 우리나라에는 절이 무던히도 많다. 경주의 불국사나 강원도의 신흥사, 대구 팔공산의 대찰들처럼 규모가 큰 사찰도 적지 않지만 규모가 작은 사찰은 지천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사찰은 많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펼쳐진 이러한 구조를 지닌 사찰을 보기란 힘이 든다.

“일본식이네.”
동행한 홍대표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연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던 나도 참 보기 힘든 건물을 보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절을 보았지만 동국사는 다른 어느 절 보다 색다르다. 사실 동국사라는 절 이름은 전형적인 우리식 이름이지만 그 당우의 형태는 우리 것이 아니다.

동국사는 전형적인 일본식의 건물 형태를 지닌 사찰이다. 언젠가 일본에서 보았던, 그리고 일본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다큐에서 보았던 집의 형태가 눈앞에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군산만큼 일본의 잔재를 지닌 곳도 드물다.

일본의 잔재라고 해서 일본의 정신이나 그들의 혼이 남아있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강제로 점령했던 시기의 문화가 아직도 군산에 제법 많이 남아있다는 말이다. 문화라고 하니 정신을 포함하는 것 같지만 여기서 정신은 빼고 그들이 남긴 흔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유람선 터미널부근에서 시작하여 월명공원, 군산여고, 내항부잔교에 이르는 일대에는 일제 강점기 시대가 남기고 간 문물이 무척이나 많이 남아있다. 외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군산의 구히로쓰가옥은 물론이고 구세관 건물, 구조선은행건물 등등이 아직 남아 조선의 말기와 일본 강제 점령기의 건축 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동국사 앞에는 식당으로 변해버린 군산부윤관사 이외에도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일본의 가옥문화를 보여주는 건물이 다수 있다. 흔히 이러한 건물들을 척산가옥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동국사에 들어서면서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어느 절이 이렇게 일본식 절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까? 일본의 강제점령 시기에 지어진 건물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지금도 많은 절들이 '불사'를 지칭하며 오래된 건물을 헐어버리거나 뜯어내고 새 건물을 짓는 이때에 동국사는 온전히 그 모습을 보전하고 있었다.
사실 사진으로만 일본의 사찰을 보았던 사람에게 동국사는 전혀 색다름으로 느껴진다.
동국사는 작은 일본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새로 지은 것처럼 너무나 깨끗하게 잘 보존되고 있어 사용자와 거주자들의 정성에 놀라울 지경이었다. 동국사 건물의 기둥이나 서까래와 같은 구조물에 사용된 목재는 일본에서 직접 운반해서 쓴 나무로 습기에 강한 스기나무 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사찰이 지닌 목재치목과는 다른 것 같다.

스기목은 흔히 삼나무라고 불리는 나무다. 달리 적삼목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다 크면 높이40m, 줄기의 직경은 2m나 되는 침엽수이다. 나무의 중심이 붉게 물드는 목재는 부드러워서 가공하기가 편하고, 독특한 냄새를 지니고 있다. 

건축 외에도 물을 기르는 나무통이나 육교 등 여러 곳에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열과 습기 등의 외부적 요인에 특히 강한 면을 갖추고 있으며, 삼나무 특유의 향기로 인해 오래전부터 욕조로 만들어져 사랑을 받아 왔다. 일본에서는 목욕 시설에는 삼나무 이상의 대안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만큼 특유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원목주택의 내외장재, 조경용 목재, 표구재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계층은 삼나무를 이용해 욕조를 만들어 놓고 피로를 푼다. 공중목욕탕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 나무로 만든 시설을 접하는 경우도 있다.

발을 멈추고 동국사를 살핀다. 동국사의 본래 이름은 금강선사(錦江禪寺)이다. 금강선사는 1909년 일본인 승려 내전불관(內田佛觀)이 군산에 포교소를 개설하면서 창건한 조동종(曹洞宗) 사찰이다. 이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없는 종파였다.

일본불교는 1877년 부산의 개항과 함께 일본정부의 요청에 의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백제와 신라 시대에는 우리의 발달한 불교문화가 일본에 전해졌는데 일제 강점기에는 그들의 문화가 우리에게 전해진 측면도 적지 않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일본인들의 문화가 지금도 이 땅에 남아 망령처럼 우리 문화를 억압하거나 오염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도 한국 사회에는 일본의 흉내를 내는 사람이 있고 그들의 말을 쓰기 좋아하거나 입에 배인 사람들이 있다.

아무튼 조종동은 일본의 종파였고 일본의 침략이라는 물결에 동승하여 한국에 상륙했다. 사실 일본이 불교국가로 보이고 사찰이 많은 듯 느껴지지만 막상 다가가 세밀하게 살펴보면 일본은 불교 국가와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일본에 절이 그리 많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이 신사라고 부르는 곳이 절보다 많다고 보여진다.

어쨌든 일본은 한반도를 강제 점령하는 과정에서 우리네와는 다른, 일정 부분 우리의 불교 행위나 방식과는 달리 일본에 정착하며 변형된 일본 불교를 상륙시켰다. 가장 먼저 상륙한 정토진종 대곡파(淨土眞宗大谷派)가 일본의 힘을 등에 업고 포교를 개시하였고 1904년부터는 군산에도 포교소를 개설하였고 일연종(一蓮宗)이 뒤를 이었다.
종교라고 해도 때로는 순수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사실 종교는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하거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일본이 침략을 목적으로 하는 일환으로 불교를 사용했음은 명백하다. 결국 일본불교의 한국진출은 순수한 불교포교가 목적이 아니라 한국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일본정부의 의지를 그대로 반영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불교를 포교하고자 1911년 6월 3일자로 사찰령을 발령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불교는 전국에 별원, 출장소, 포교소 등을 건립하였다.

금강사가 창건되기 전 군산에는 우리의 불교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본원사, 군산사, 안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불교가 전래되면서 위축되고 압박을 받아 점차 퇴락의 길을 가게 된다. 금강사를 창건한 내전불관(內田佛觀)은 1909년 당시 77세의 고령으로 군산지역을 순석(巡錫)하다가 군산 일조통(一條通)에 있던 집을 빌려 포교소를 개설하였다. 1913년 7월에는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본당(本堂)과 고리(庫裡)를 신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일본 불교가 단기간에 군산에서 본당을 신축할 수 있었던 것은 단가(檀家)에서 많은 시주를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금강사에 등록된 단도(檀徒)로는 대지주였던 궁기가태랑(宮崎佳太郞)과 웅본이평(熊本梨平)을 비롯하여 대택등십랑(大澤藤十郞), 하전길태랑(下田吉太郞) 등이 있었다.

단가(檀家)란 사찰의 경영을 받쳐주는 단위조직을 말한다. 사찰이 융성하기 위해서는 시주가 필요한데 일본은 이런 시주를 하는 가구나 단체를 바탕으로 성장한다. 또한 특정 집의 장례나 그 외 불교의례를 전담하는 사찰을 단나데라(檀那寺; 단나사)라고 한다.

이 사찰에서는 불교 의례를 전담해 주고 단가로 하여금 불공을 드리고 시주를 하게 하였으며, 매년 그 대가로 현금이나 곡식을 단가로부터 받도록 되어 있었다. 한편 일본 사찰에서는 단가 집단이 하나의 분묘를 공유하는 형태가 있었는데 사찰 내에 묘나 납골당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한국의 불교에는 없는 방식이었다.

현재 동국사는 한국의 사찰이다. 군산(群山) 동국사(東國寺)는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한일합방.韓日合邦) 1년 전인 1909년 일본 승려(僧侶) 선응불관(善應佛觀)스님에 의해 창건(創建)되어 일제 강점기 36년을 일인 승려들에 의해 운영되다가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이하여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품으로 돌아온 뼈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1897-1910순종,隆熙.3)과 일제 식민지시대(日帝時代, 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9년(己酉, 불기2453년, 단기4242년, 대한제국 순종 隆熙 3년)은 일본의 년호로 명치(明治)42년이다. 격동의 시기, 동남아는 열강의 영향으로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본은 개화를 바탕으로 이미 힘을 기르고 호시탐탐 조선과 중국을 노리고 있었다.

이 시기는 일본이 1905년 이미 러일 전쟁에서 승리(勝利)하였고, 1909년 7월에는 대한제국에 대한 강제 병합이 일본 각료회의에서 결정된 해이며,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이에 분노한 민족주의자 안중근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驛)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いとう ひろぶみ)를 암살(暗殺)한 해이다. 

이를 기회로 일본 내에서 대륙 침략을 위장한 소위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는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대한제국(大韓帝國) 강제 병합(倂合)의 추진이 가속화되던 때이다.

1910년 8월 29일, 치욕적이고 항거할 수 없었던 한일합방조약(경술국치.庚戌國恥)이 맺어지면서 5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땅의 유일한 주권 국가인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어, 소위 일본천황 직속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의해 1945년까지 35년간의 고통어린 식민지배(植民支配)가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 전 세계적인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爭奪戰)의 일환으로 탈 아시아를 외치던 일본은 조선에서 일본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거부한다는 것을 명분삼아 공식적으로 정한론(征韓論)을 제기한 이래 메이지 덴노(명치천황.明治天皇)시대의 과도정부는 일본 국내에 대륙 침략을 위한 소위 정한론(征韓論)을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래 일본 정부는 조선을 무력으로 식민지화시키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였고, 1894년 청일 전쟁과 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가시화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그 외에도 엄연한 독립국인 대조선국의 국권을 무시하고, 영일 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으로 제국주의적인 침략을 본격화 하던 시기다.

이렇게 볼 때 동국사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합방에 앞서 당시 그들의 국교이다시피 숭상되고 있는 불교를 한국에 가지고 들어와 왜색불교를 전파 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오래전 한국에서 건너간 불교가 식민통치 수단으로 역수입 된 것이므로 종교도 국력 앞에서는 무기력 할 수밖에 없다는 좋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동국사 안으로 들어섰다. 동국사의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 정방형 단층팔자지붕 홑처마 형식의 에도시대(江戶時代)건축양식으로 외관이 그다지 화려하지 않으며 소박한 느낌을 준다. 단순하지만 그 형식이 우리네 건축물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지붕의 물매이다. 물매는 그 지방의 강우량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국사의 지붕물매는 75도의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이전의 우리네 건물보다 그 경사가 심하다. 동국사 건물외벽에 미서기문이 많으며, 용마루는 일직선으로 전통한옥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는 전형적인 일본인들의 건축물이 지니는 특징이다. 요사채는 복도를 통해 법당과 요사가 연결되어 있다.

동국사 대웅전에 자리한 석가삼존불은 좌로부터 아난존자입상, 석가모니불좌상, 가섭존자입상으로 이루어졌으며 2008년 1월 4일부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불좌상은 높이가 150cm로 그다지 크지 않고 촘촘한 나발에 육계가 뚜렷하고 통견법의를 두른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가섭존자, 아난존자 입상은 높이 160cm의 등신불이다.

오히려 주불보다 큰 모양을 지닌다. 그러나 주불인 석가모니불이 좌상이기에 눈으로 그 규모는 커 보인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효종 1년(1650년)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장을 지낸 벽암각성 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시고 응매 스님 등 6명의 화원이 불상조성에 참여했다. 즉, 건물의 형상은 일본식이지만 내부에 모셔진 불상은 이 땅에서 조성한 것이다.

정원처럼 보이는 마당에 자리한 일본식 범종은 1919년(대정8년) 2대 주지 주암 현정(周巖 玄鼎)스님이 주지로 계실 때 일본 경도(京都)에서 고교재치랑(高橋才治郞)이 제작했다. 전형적인 일본식 범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은 형식이다.

당우 곳곳을 세밀하게 살핀다. 동국사의 당우가 우리나라 사찰 건물과 틀린 점은 사찰의 본당인 대웅전과 승려가 거처하는 요사체가 붙어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임에 틀림없다.

요사채 또한 내부와 외부 모두 일본식 건물의 모습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었고, 폭이 좁은 복도도 가지고 있다. 내부적으로 복도를 배치한 것도 일본식의 건물이 지니는 특징이라 할 것이다.

동국사의 가장 큰 특징은 아마도 대웅전의 지붕일 것이다. 한국과는 다른 형태일 뿐만이 아니라 일본 양택 풍수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용마루의 모습은 발전된 일본의 양택풍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지붕이 한일(一)자로 곧게 뻗은 형태가 가장 강직하고 이상적인 지붕의 배치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양택풍수는 한국의 양택풍수보다 앞선 감이 있다. 동국사의 지붕도 그러한 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좋은 점을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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