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선교수

민불의 특징을 지닌 영암 학계리 석불입상[靈岩鶴溪里石佛立像]

비가 추적거리고 있었다. 이틀간의 여행에서 오늘은 마지막 날이다. 어제는 새벽부터 출발하여 완도항에 도착하였고 청산도를 들러 살펴보고 하루를 머물렀다. 섬에서 보낸 하루가 즐겁게 지나가고 이제는 육지를 더듬으며 서울을 향해 내달릴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어찌 맹숭맹숭한 정신으로 달려가리! 길을 따라 달리는 중에도 남도의 정치가 있는 곳이면 반드시 들리리라 생각했고 그 첫 번째가 영암이다.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학계리에 있는 석불을 찾아 나섰다. 어제는 어렵사리 참았던 빗방울이 줄기차게 차창을 때리고 있다. 완도에서 해남, 해남에서 다시 영암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달린다. 낮선 풍경들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길은 낯설지만 기분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 비가 태풍처럼 몰려 와도 기분이 흡족한 것은 새로운 문물과 새로운 문화재,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여러 번에 걸쳐 차선을 바꾸고 도로를 갈아타고 달려 영암군 학산면에 들어섰다. 왕복 2차선 도로를 달리다보니 우측 마을이 학계리라고 한다.

학산면이라는 지명과 학계리라는 지명으로 인해 처음에는 학산면 소재지가 있는 곳이 학계리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면소재지와 학계리는 제법 먼 곳이다. 따라서 학계리는 면소재지와는 좀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학계리 입구에는 나무가 자란 나지막한 산이 있다. 산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그저 나무가 자란 벌판 비슷한 곳이다. 그 앞에 삼거리가 나뉘어져 있는데 좌측 길로 바라보니 눈에 들어오는 간판이 있다. 학계리 석불입상을 알리는 간판이다.

그러고 보니 너무 쉽게 찾은 셈이다. 때로는 수없이 고생을 하거나 산꼭대기에 올라가 더듬고 몇 시간을 헤매다가 겨우 목적지를 찾아가거나 목적한 바를 이루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영암 학계리 석불입상은 쉽게 찾아도 너무 쉽게 찾은 셈이다.

비가 추적거리고 있었다. 이틀간의 여행에서 오늘은 마지막 날이다. 어제는 새벽부터 출발하여 완도항에 도착하였고 청산도를 들러 살펴보고 하루를 머물렀다. 섬에서 보낸 하루가 즐겁게 지나가고 이제는 육지를 더듬으며 서울을 향해 내달릴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어찌 맹숭맹숭한 정신으로 달려가리! 길을 따라 달리는 중에도 남도의 정치가 있는 곳이면 반드시 들리리라 생각했고 그 첫 번째가 영암이다.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학계리에 있는 석불을 찾아 나섰다. 어제는 어렵사리 참았던 빗방울이 줄기차게 차창을 때리고 있다.

 완도에서 해남, 해남에서 다시 영암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달린다. 낮선 풍경들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길은 낯설지만 기분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 비가 태풍처럼 몰려 와도 기분이 흡족한 것은 새로운 문물과 새로운 문화재,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여러 번에 걸쳐 차선을 바꾸고 도로를 갈아타고 달려 영암군 학산면에 들어섰다.

왕복 2차선 도로를 달리다보니 우측 마을이 학계리라고 한다. 학산면이라는 지명과 학계리라는 지명으로 인해 처음에는 학산면 소재지가 있는 곳이 학계리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면소재지와 학계리는 제법 먼 곳이다. 따라서 학계리는 면소재지와는 좀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학계리 입구에는 나무가 자란 나지막한 산이 있다. 산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그저 나무가 자란 벌판 비슷한 곳이다.

그 앞에 삼거리가 나뉘어져 있는데 좌측 길로 바라보니 눈에 들어오는 간판이 있다. 학계리 석불입상을 알리는 간판이다. 그러고 보니 너무 쉽게 찾은 셈이다.

때로는 수없이 고생을 하거나 산꼭대기에 올라가 더듬고 몇 시간을 헤매다가 겨우 목적지를 찾아가거나 목적한 바를 이루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영암 학계리 석불입상은 쉽게 찾아도 너무 쉽게 찾은 셈이다.

이슬비가 오고 있었다. 그래도 망설일 이유는 없다. 차에서 내려 다가가 보니 학계리 석불은 문이 닫혀 있었다. 까치발을 세워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자세한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힘을 주어 밀어보니 문이 열린다. 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열려 나를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하는 것 같았다.  

 문은 어염집의 중문 정도 되어 보였다. 아니면 사찰의 후원으로 이르는 쪽문이랄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풀이 자라있었지만 그것은 계절이 풀이 자라는 계절이기 때문이지 관리가 형편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보호가 잘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문을 좀 손보았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부는 조금 독특했다. 분명 나무가 자란 곳인데 주변으로는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울타리 안에는 무너져 가는 것이기는 해도 개인집도 보였고 제법 넓은 밭도 있었다. 대충 훑어보기에 개인 집의 후원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그런데 영암 학계리 석불입상이 서 있는 곳이 꼭 개인의 후원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차라리 마을의 당신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마을 당산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석불은 결코 작지 않다. 전체 높이가 380센티미터나 되는 거신불이라 볼 수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된 이 석불은 학계리 광암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입구에 위치하고 있어 찾기가 매우 쉬운 편이다.

석불을 보호하기 위해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현씨 문중에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사모집을 지어 그 안에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영암 학계리 석불입상은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사모집에 자리하고 있어 경건해 보이고 안정감이 느껴진다.  

영암 학계리 석불입상은 민불이라 보여진다. 그런데 그 형상은 어찌 보면 마애불이다. 1매의 커다란 직사각형 화강암에 불상을 양각 마애불처럼 조각하였다.

사실 마애불이라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큰 바위 전면을 모두 차지한 거대한 마애불이라 할까나! 사실 화려하지는 않다.

그래서 민불의 특징을 지닌다. 그 기법은 민불의 특징을 드러내듯 조잡하며, 상호(相好) 왼쪽에서 팔꿈치 부분까지 일부가 ㄴ자 모양으로 깨져 나갔다. 오랜 세월 보존이 되지 않던 시기도 있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이 불상에서 조각이 가장 뚜렷하게 잘 남아 있는 부분이 상호이다. 상호는 타원형에 가까우며 움츠러든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정상에 육계(肉髻)가 보이지 않는다. 영암 학계리 석불입상은 어쩐지 부처보다 소박한 할아버지를 새긴 듯 보이기도 하고 부처가 아니라 보살을 새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윽함을 보여주는 일반 부처상과는 차이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왼쪽 눈만 희미하게 보일 뿐 오른쪽 눈과 두 눈썹은 마모가 심하여 보이지 않는다. 아마 눈이 화려하지 않아 부처의 자비로운 미소를 보기 모양이다. 코는 오뚝하게 처리하였으나 콧방울은 보이지 않고 인중은 짧다.

이 모습만으로 부처상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입은 작고 턱 밑에 상호의 풍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을 생각해 보면 영암 학계리 석불입상은 민불로 보이도 좋을 듯싶다.

목은 아주 짧으며 생사를 윤회하는 인과(因果)를 나타내는 삼도(三道)가 없다. 삼도가 없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어찌 보면 삼도야말로 부처상의 특징 중 하나라 볼 수 있는데 없다는 사실에 고개가 갸웃해지는 것 같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다.

통견이라면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의 구분을 짓는 선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 민불이 모든 조영에 그러한 구분을 모두 적용했다고 볼 수 있을까? 옷 주름이 대부분 마모되어 목에서 가슴 부위에서만 약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단숨히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 때문이라고 보이지만은 않는다.

아마도 새김이 약했거나 새김이 없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영암 학계리 석불입상의 의문(衣文)이 전통적인 U자형이 아니고 凹자형으로 조각되어 있다. 수많은 불상을 보았지만 이 경우는 진정으로 색다르다. 목적을 가지고 이리 새긴 것인지, 혹은 이 불상을 새긴 도공이 의도적으로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깨선은 약간 곡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어깨와 가슴 부분에 약간 볼륨감이 형성되어 그런 대로 사실감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부분은 불상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모든 조각품은 생기를 불어넣는 장치가 있다 한다. 아마도 영암 학계리 석불입상의 생기는 이 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인(手印)은 그 형태가 매우 간략 형식화되었다. 수인이야말로 불상이 우리 같은 중생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바를 알게 해주는 요인이다. 시무외인이다, 또는 무엇이다 하는 사실로 이 불상이 어떤 의도로 조각되었는지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오른손은 길게 아래로 내리고 있으며, 왼손은 펴서 오른쪽 가슴 부위로 올려 유두를 감싸고 있는 듯하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수인의 형식이 어떤 불상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수인만으로도 짐작이 가능한 것인데 수인을 보아도 어떤 의도를 나타내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단순하게 민불이라 생각하자.

영암 학계리 석불입상은 여타의 많은 석불과 형식적인 괴리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남 지방의 다른 석불에 비해 매우 형식화되었으며 무엇을 의미하고자 하는지, 혹은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알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 영암 학계리 석불입상이 의미가 없이 새겨진 것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이 영암 학계리 석불입상에는 전설도 전하고 있어 그 생각을 더한다. 특이하게도 영암 학계리 석불입상에서는 섬세한 기법이나 불상으로서 갖는 자비감 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단순하게 민불이라 치부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 마을이 그다지 크지 않고 외지며 기원과 소원을 비는 그러한 목적으로 새워진 만불이 아닌가 판단하면 마음은 홀가분해진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 왔다고 한다. 그것만으로 보아도 이 마을을 지켜주는 의미를 지닌 민불이라고 치부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신앙 행위는 마을 사람들의 안녕과 기복(祈福)을 비는 미륵 신앙이 계속해서 영위되어 왔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조성 시기는 조각 기법의 조잡성, 양식의 형식화 등으로 볼 때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어쩌면 이 영암 학계리 석불입상은 이 마을의 신앙이 집약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조성된 불상인지, 혹은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인지도 알 수 없지만 이 마을에서는 부처상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늘 제사를 지낸다는 것으로 보아 이 영암 학계리 석불입상은 아마도 이 마을에서 당산의 역할까지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어쩌면 이 영암 학계리 석불입상은 오랜 세월 이 마을의 수문장 노릇을 했으며 당산으로, 혹은 시름을 달래주는 불상으로서 그 역할을 다 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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