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투데이에서는 9월 16일(월)부터 경민대학교 부동산학과에서 풍수지리를 가르치고 있는 성보 안종선교수가 집필하는 ‘성보의 풍수여행’ 연재를 시작합니다.

성보의 풍수여행은 대한민국의 여러 명소를 여행하며 여행지에 대한 소개와 함께 풍수지리에 대한 분석까지 제시하는 새로운 형태의 여행기로 독자여러분을 이끕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성보의 풍수여행’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편집자 주)

다산초당 가는 길

▲ 안종선교수

강진으로 들어섰다. 애초 목적지가 청산도였으니 강진을 지나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청산도를 가려고 한 일정이다. 완도항에서 오후 2시 30분에 뜨는 배가 있다 하니 아직 시간은 넉넉하다. 몇번이나 가고 싶었던 다산초당이 가까운 곳에 있으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강진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정다산이다. 사실 강진 하면 정다산ㅇ만 생각나는 것이 사실이다. 강진 땅은 목넘이가 없는 파릇한 차 향기와 함께 다산 정약용을 기억하게 만드는 곳이다.

예전부터 다산초당의 아름다움을 들어왔다. 눈으로 보기 전에야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소문만큼은 못되어도 전설만큼은 확실하지 않겠는가.

마음이 설렌다. 더구나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차분한 오솔길에 자리하는 정자 천일각에서 바라보는 구강포 앞바다의 모습은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장소라고 알려져 있으니 욕심이 난다.

아쉬움도 있다. 시간과 뜨거운 열기 때문에 백련사를 둘러볼 수 없는 것이다. 다음에 다시 올 수도 있겠지만 욕심으로 하면 지금 기회가 왔을 때 모두 둘러보아야 하는 것이다. 백련사를 둘러볼 수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어찌 되었든 오늘은 다산초당에 신경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위치한 자그마한 초당이었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은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할 때 11년간 머문 곳이다.

아직 가산 초당에 오르지 못했기에 그 규모나 풍수적 배경은 알 수 없는 곳이기는 하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은 이곳에서 실학체계의 대부분을 구상해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를 집필했다는 것만은 이미 알고 있고 알고 올라야 하는 곳이다.

다산초당이라는 곳이 단순히 풍수인의 눈으로만 볼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곳에는 정약용이 직접 판 샘으로 알려진 약천(藥泉)이나 차를 끓이던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부뚜막인 다조(茶竈)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 모습이 상상이 가는 것이 어쩐지 흥미가 몸으로 전해져 어깨가 으쓱거려지는 것 같다. 초당 왼쪽의 바위에는 유배의 고독을 잊기 위해 새긴 '정석(丁石)'이라는 두 글자가 남아 있다고도 한다.

기나긴 유배생활이 그를 얼마나의 고독과 회한으로 몰았을지 짐작이 가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원래의 초당은 도괴(倒壞)되었고 현재의 초당은 1958년에 중건된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 흔적이나마 남아있는 것이 기쁜 일이다.

다산초당이라! 다산 정약용 선생을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조선 후기의 실용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머물던 곳이다. 실사구시 학문의 꽃을 피운 다산 선생의 유배지인 이곳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찾아가는 곳이다.

꼭 다산을 존경해서가 아니라 그의 생애가 첨련하고 청빈했으며 모범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비롯한 그의 학문적인 완성을 이룬 수많은 저서가 이곳 다산초당에서 완성되었다.

그래서인지 이곳 다산초당은 조선후기의 실사구시를 이끌었던 실학의 성지로 여겨지는 곳이다. 남양주에 있는 다산의 묘와 생가가 하나의 성지처럼 여겨진다면 이곳 강진의 다산초당도 하나의 성지인 셈이다.

다산초당 아래 찻집 앞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도로를 따라 오르기 시작한다. 포장도로는 곧 끝나고 산길을 오른다. 입구가 좁아 해맬 것 같지만 안내표지가 잘 되어 있어 길을 잃거나 헛갈릴 틈이 없다.

서둘러 오르기로 한다. 다산초당은 만덕산 기슭에 있어 산길을 약 15~20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한다. 큰 길에 주차장에 있고 소형차는 초당 길로 들어와 귤동마을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울 수도 있다.

다산초당에서 남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다산유물전시관이 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다산 선생의 일생과 업적 등에 대해 비교적 잘 꾸며진 곳이다. 다산 선생과 관련된 여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다산 선생의 일생과 강진군을 소개하는 영상실이 있고, 터치스크 린 방식으로 다산 선생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다산초당의 동암 위쪽으로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1km 남짓한 거리로 호젓한 산길이 아름다우며 강진만을 내려다보는 경치도 좋다.

또 다산초당 아래에는 다산유물전시관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 백련사와 다산초당 그리고 다산유물전시관까지 산길을 따라 함께 둘러볼 수도 있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밀림을 생각나게 한다. 좁은 길 양 옆에는 기다란 대나무가 차나무와 함께 자라는 모습이 아무리 바라보아도 장관이다. 뿌리가 자라 드러난 모습이 어쩐지 힘을 쓰는 역사의 근육 위로 올라오는 힘줄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참을 오르자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다산초당 서암이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다보면 초당 앞에 있는 서암(西庵)은 다산의 제자들이 거처하던 건물로 알려져 있다. 그다지 특이한 건물은 아니나 입구에 있어 눈을 잡는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다산초당이다. 그러나 다산초당에 이르기 전, 서암 과의 사이에 작은 길이 있고 그 끝에 바위가 보인다. 그 바위에 이르는 길을 따라 올라가니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정석, 이 글자가 새겨져 있어 정석이라 부르는 바위이다.

다산4경이라 불리는 정석바위,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은 모두 다산 선생의 유배생활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정석바위는 다산초당 뒤쪽에 있는 바위인데 바위에 '정석(定石)'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임판길 님의 글에서 보여지듯 다산은 밤이면 정석이 새겨진 바위아래에서 북녘의 상감마마를 향해 절을 올리면서 유배생활에서 이렇게 많은 공부를 하고 글을 쓰도록 시간을 주었으니 오히려 유배생활에 감사를 드렸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얼마 안 있어 유배생활이 풀렸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유배생활 말기에는 마음이 성숙하였다는 근거는 ‘아방강역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유배생활이 다산선생을 역사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인물로 만든 샘이다. 이 해석이 임판길 님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실학자로, 유학자로 살았을 다산은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곳은 무척이나 적적하였을 것이다. 다산 선생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학문을 익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수도 있다. 학문을 연마하며 다산이 즐겼던 유일한 즐거움은 유난히 차나무가 많았던 만덕산을 산책하고 사람을 사귀며 향기로운 차를 마시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오죽하면 다산이라 호를 정하였을까! 차의 언덕(茶山)이라 칭할 정도로 차를 사랑하였던 그가 아니던가?

눈을 돌리고 보면 다산 초당 앞에 마당바위가 보인다.‘다조’라고 불리는 그 바위다. ‘다조’는 초당 앞에 있는 넓은 반석으로 이곳에서 다산 선생이 이 돌을 부뚜막 삼아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시던 곳이라 한다.

이 돌은 다산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약천의 물을 떠다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드는 부뚜막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솔잎을 태워 찻물을 끓였던 마당바위와 만덕산의 맑은 기운을 담는 물웅덩이를 만들고 정석(丁石)이라 새겨 넣었다. 그 바위가 정갈하기만 하다.

정석을 내려오면 바로 옆이 다산초당이다. 바로 이 건물이 이곳의 주 건물인 셈이다. 다산초당은 학문적 완성지로만 그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본디 초가집이었을 건물은 다산의 사상을 흠모하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다부진 기와집으로 다시 지어졌지만 60년을 지낸 건물의 모습은 여유로운 세월의 흐름을 담고 단아하게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초가집이 기와집으로 바뀌며 아름답고 단아한 정치는 많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산의 생애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다산이 강진 동문 안에서 4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술에 취하고 몇 년간은 현감에게 맞고 있다는 소식을 십리밖에 살고 있는 외숙 윤박(尹博)이 지켜보고 있다가 이제는 그냥 두었다가는 폐인이 되거나 제명을 살지 못하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굴동 부락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했다.

굴동 부락에서 다산이 거처하던 초가집을 다산초당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이 집이다. 이 초당에서 우리가 아는 무수한 저술이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은 고난을 이야기 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다산은 천주교인이었다. 일설에는 그가 나중에 천주교를 배신했다고도 하고 버렸다고도 하지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당시 다산은 서학이라 불렸던 천주교인이었기에 가시밭길을 걸었던 것이다.

다산, 그는 당시 이단의 사상으로 배척되었던 천주교에 물든 죄인이었다. 당시 이단으로 몰린 학자들은 대부분 귀양을 떠나야 했다. 학문적 깊이가 놀라웠기는 해도 다산이라고 당시 서학을 배척하는 서슬을 피해가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기나긴 유배생활이 그를 완성했는지도 모른다.

적지 않는 세월, 일생의 대부분을 귀양생활로 보내야 했던 다산이다. 18년의 유배생활을 하였던 다산에게 귀양은 일생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그는 이곳 남도에서 기나긴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그중 10년의 기간을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은 그가 정성을 들이고 이곳에서 생활을 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학자였다. 선비였다. 유배생활에 좌절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그의 업적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조선 후기, 이곳 강진은 아프리카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문화의 오지였을 국토의 끝자락에서 그는 헛헛한 외로움과 싸웠을 것이다.

머릿속에 든 학문을 이용하거나 펼쳐낼 수 없음을 한탄하였을 것이다. 천지를 이해하는 지식이 썩어가고 있음을 한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좌절하지 않고 학문의 꽃을 피웠다.

훗날 베트남의 혁명가 호치민은 자신의 관 속에 《목민심서》를 함께 담기를 원했다고 전한다. 목민심서가 단순히 한 사람의 사상으로 끝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까 한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나무 틈 사이로 빛이 파고든다. 팔월의 태양은 뜨겁기 그지없다. 그 빛 사이에 다조가 환하게 보인다. 아니 다조라는 바위로 빛이 몰려드는 것 같았다. 얼마나 몽환적인가? 당시 백련사의 고승이었던 해장선사와 차를 나누며 깊은 학문의 경지를 토론하였을 다산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차 한잔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그래서 인근의 백련사를 오르지 못함은 단순히 절을 보지 못함이 아니라 다산의 발끝을 모두 보지 못하였다는 사실에서 더욱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다산초당은 산 중턱에 자리한 건물이다. 어쩐지 지나치게 위압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마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숲속과 어울림에 있어 조금은 부족한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입지는 화려하거나 풍수적으로 완벽하거나 안정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배삼임수가 이루어졌다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기울어진 산의 측면에 터를 닦아 지은 것이니 나무가 없으면 바람이 칠 것이고 雨期가 되면 水氣는 흐를 것이며 기맥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터는 조용하다. 말이 없다. 정갈하게 살아갈 수는 있을지언정 안정되었거나 옳은 양기의 터로 보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은 지세에 자리하고 있다.

약천(藥泉)은 다산초당 건물 뒤에 있는 샘으로 다산 선생이 직접 파서 만든 샘이라 한다. 샘이 집 뒤에서 나오는 현상도 좋은 배치는 아니다. 언뜻 보아도 다산초당이 자리한 위치는 약간의 계곡과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은 본래 윤단이란 사람이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이곳 강진은 해남과도 가깝다. 해남은 해남윤씨들의 가세가 등등한데 아마도 그 때문에 이곳 강진도 해남윤씨들의 영향을 받는 지역이었을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18명의 제자를 가르쳤으며, 해남 대흥사 경내에 있는 일지암의 혜장선사, 초의선사 등과 더불어 다도(茶道)를 익혀 오던 중 자연생 차나무가 바로 이곳 유배지에 있음을 깨달아 다산동이라 하였다. 유배생활이 풀리어 이곳을 떠났을 때 두자식이 내려와 저서를 팔당의 거처로 옮겨갔다.

이곳 18인의 제자 중 글씨를 가장 잘 쓰는 윤종심이 팔당 여유당에 찾아가 필사본을 3년 만에 완성하여 초당으로 가져왔다. 그 뒤 갑오경장의 난을 피해 필사본을 석문산 너머의 옥천면 봉황리 마을로 옮겼다가 화재로 필사본은 거의 다 소실되었다

본시 다산초당은 서당으로 쓰던 건물인데 다산 선생이 이곳으로 옮겨오며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건물이다. 이곳 다산초당은 생거지로 사용하기에는 그다지 어울리는 곳이 아니다.

땀을 식히거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용도로는 그럴 듯 어울릴 수 있겠으나 먹고 자고 생활하는 데는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다. 아울러 배산임수와 전착후관, 전저후고의 풍수적적 이법을 인위적으로 맞출 수는 있겠지만 강한 지기가 흐르거나 자연적인 교쇄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없으며 풍수적으로 주변에 영향을 주는 좋은 사격을 갖춘 곳도 아니다. 풍수를 무시했던지 풍수를 생각하지 않은 건물로 보여 진다.

다산초당은 산 중턱에 자리한다. 만약 울창한 수림이 없다면 불어서 올라오는 바람에 속적삼이 마를 정도로 시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바람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바람이란 차단되거나 가벼운 것이 좋고 차단되어 입지가 교쇄되어야 길하다. 다행히 나무들이 많아 바람을 차단하고 있지만 안정된 터로 보기는 어렵다.

이 집은 본래는 초가집이었는데, 1936년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57년 해남 윤씨의 도움을 받아 기와집으로 다시 원되었다. 그래서 단아하지만 어찌 보면 지나치게 고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다산초당이 고압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애초에 산기슭에 지어진 탓이기도 할 것이다. 초가집은 어울리나 기와집은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해남 윤씨들이 복원한 이유도 이해가 간다. 해남 윤씨는 다산 선생의 외가라 한다. 다산초당의 현판의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는 집자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글자가 눈에 쏙 들어온다.

다산초당 옆에는 작지만 눈에 들어오는 네모진 연못이 있다. 잉어를 길렀던 연못이라고 한다. 네모진 형태의 연못에 둥근 형태의 가신이 보인다. 전형적인 천원방정의 형태를 지닌 연못이다.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은 초당 옆에 있는 연못과 연못 가운데에 있는 아주 작은 섬이다.

애써 이름까지 붙인 것이 재미있다. 연못에 인공석산이란 의미일 뿐 달리 의미는 없는 듯싶다. 다산 선생이 탐진강가에서 직접 돌을 주워 옮겨 만든 것이라 전한다. 소일 삼아, 혹은 수양을 하며 이 돌을 날랐을 것이다.

땀이 흐르는 모습이 절로 가슴에 파고든다. 산속에서 나오는 물이 이 연지로 파고든다. 대나무로 홈통을 만들어 산에서 흐르는 물이 연못으로 들어가게 해놓았다.

특이한 것은 물의 색이 지나치게 검은 것인데 아는 물이 더럽거나 오염된 것이 아니라 토질 때문이다.

다산초당 건물에서 동쪽으로 향한다. 어쩐지 밝은 빛이 스며든다는 느낌이 드는 방향이다. 산책로가 이어져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연못을 지나면 서암보다 조금 크거나 비슷할 것으로 보이는 건물을 만난다. 이 건물이 동암이다.

다산초당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동암이 있고 서쪽에는 서암이 있는 것이다. 이 모습이 어찌 풍수의 좌청룡 우백호를 연상하게 한다. 동암(東庵)은 다산 선생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거처를 하던 건물이다.

실제로 거처한 곳이니 숙소인 셈이다. 또한 이 건물에서 목민심서 등의 저술작업이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건물도 옛 건물은 아니다. 동암과 서암 모두 1970년대에 강진군에서 복원해 놓은 건물이다.

나마 복원해 놓은 것이 다행이다. 역시 풍수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것은 경사가 심한 탓이다. 좌측으로 작은 능선이 있는데 그나마 높지 않아도 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초당에서 동암을 지나는 길이 산책로이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백련사에 도착할 수 있다. 백련사에 들릴 수 없음이 못내 안타깝다. 작은 모퉁이를 돌면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정자를 만난다. 어쩐지 새롭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지나치게 흔한 형태라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세히 살펴보니 현대적인 건축물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물론 모습은 옛 모습을 모방했지만 옛 모습이 아니다. 이 정자는 다산 선생이 유배생활을 하던 당시에는 없던 정자이다.

어쩐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정자의 터는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선생이 가족이 그리울 때 나와 앉아 마음을 달랬던 자리라 한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멀리 강진만이 내려다보여 전망이 빼어난 자리이다.

아주 뛰어난 풍광이 눈을 파고드니 아름답기는 하지만 다산은 아마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안종선교수 블로그 http://blog.naver.com/sungbosun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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