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코레일에서는 여름철 전력수급 위기에 대비해 자발적으로 절전에 동참하고 있다. 역사(驛舍)의 모든 시설은 전산실을 제외하고는 28℃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고 사무실 및 조명등은 반감하고 있으며, 출퇴근시간대를 제외하고 하행 에스컬레이터 운행을 중지하고 있다.

또한 전력소비 피크시간대에 전동열차의 운행을 일부 중지하는 등 국가전력 수급 위기에 따른 국민적 절전 정책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그런데 간혹 이러한 정부정책에 반기를 들고 거칠게 항의하는 고객이 있어 난감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야간근무를 할 때였는데 우리역까지 운행하는 마지막 전동열차를 타고 온 50대 남성고객이 고객지원실로 들어서자마자 “역장이 누구야? 역장 나와!”라며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역에 근무하다보면 이런 상황은 예사라 최대한 예우를 해주며 공손하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러자 고객은 대뜸 하행 에스컬레이터 운행을 중지시킨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거칠게 따졌다.

그렇잖아도 요즘 에스컬레이터 운행중지에 따른 항의가 간간이 접수되었던 터라 국가전력 수급 위기에 따른 절전 정책에 호응해야 하는 상황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이미 술을 한잔 걸친 고객은 막무가내였다. 점점 더 소리를 지르며 갈수록 태산이었다. 심지어 심야전력 운운하며 더 이상 변명하지 말라고 을러대었다.

좀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상황을 쭉 지켜보던 여직원이 눈을 찡끗했다. 112에 신고하겠다는 표시였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설득을 시도했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스스로 말덫에 걸리기 마련이다.

우선 고객이 스스로 전기전문가라고 한 말을 상기시켰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조목조목 예를 들어가며 상황을 설명했다. 고객은 서서히 심경의 변화를 보였다.

조명이 반감된 어두침침한 사무실에서 밤늦게까지 선풍기를 튼 채 근무하는 모습에서 연민의 정을 느꼈는지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호기 있게 큰소리치던 고객은 결국 아무 말 없이 계면쩍게 사무실을 나섰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였다.

승강장을 순회하는데 운행중지된 하행 에스컬레이터에 어린 아이와 할머니의 상체가 언뜻 보였다. 몇 걸음만 더 가면 편리하게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는 걸 모르시는 것 같아 엘리베이터로 안내하려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갑자기 할머니께서 마구 손사래를 치시며 뜬금없이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막음을 하셨다.

그때 서너 살 쯤 된 여자아이가 바지가 벗겨진 채 슬며시 일어섰다. 나는 그제서야 상황을 짐작하고 절로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전동차를 타려고 승강장에 올라왔다가 손녀가 갑자기 소변이 마렵다고 하니까 때마침 운행중지된 에스컬레이터에서 볼일을 보게 하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연일 계속되는 장맛비에 물비린내가 진동하는데 거기에 지린내까지, 더욱이 에스컬레이터가 장애라도 난다면 하는 생각에 머리를 흔들며 맞이방에 있는 고객화장실로 안내해드렸다.

그랬더니 할머니께서는 전동차를 놓칠까봐 노심초사하시며 한번만 봐달라고 읍소하시는 거였다.

게다가 영문을 모르는 채 빤히 쳐다보는 천진난만한 여자아이의 해맑은 눈동자가 할머니의 청을 들어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승강장 끝부분을 가리키고는 에스컬레이터 운행중지에 따른 웃지 못 할 이야기가 먼 옛날의 에피소드로나 기억되기를 바라면서 모른 척 발걸음을 돌렸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남양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