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소크라테스의 아내인 크산데이페가 남편에게 옷투정을 하게 되었다. 곧 다가올 축제일의 행렬에 보다 멋진 옷차림으로 보란 듯이 축제 구경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워낙에 새 옷을 사 입는 일에 인색한 남편 소크라테스는 시치미를 떼면서 대답하였다.

“당신은 축제 구경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싶어 가고 싶은 모양이로군.”

또한 히틀러는 자신이 입은 의복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늘 갈색 셔츠의 제복과 푸른 사지로 만든 단추가 두 줄 달린 양복을 즐겨 입고 다녔다.

거기에 으레 따라 나오는 우의(雨衣), 그리고 앞 차양이 축 늘어진 모자가 그의 의복의 전부이며 그 밖의 다른 옷은 거의 입는 법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난 아주 오래 전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습관처럼 TV뉴스를 시청해 오고 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새삼 새로운 광경을 발견하고 신기한 느낌마저 들게 되었다.

뉴스를 진행하는 여성 앵커들의 의상 때문이었다. 뉴스를 진행할 때마다 늘 다른 의상을 입고 나와 뉴스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뉴스가 끝날 무렵엔 어김없이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출연하도 일기 예보를 전해 주곤 한다.

그런데 일기예보를 진행하는 여성 기상캐스터들 역시 날마다 다른 의상차림으로 일기 예보를 하고 있다.

난 그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곤 한다. 어쩌면 저럴 수가 있을까?

물론 온 국민들의 시선 앞에 서자면 말끔하고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차림으로 방송에 임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새로운 의상을 입은 모습으로 시청자들에게 늘 다른 옷차림으로 지루하지 않게, 그리고 신선감을 불어 넣어 주는 일도 매우 중요한 일의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아무리 눈여겨 보아도 한 번 입고 출연했던 의상을 두 번 다시 입고 나오는 경우를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발견한 적이 없었다.

난 그때마다 가만히 부질없는 생각에 잠겨 쓸 데 없는 계산을 해 보곤 한다. 그런 식으로 방송국에 매일 출연을 하자면 한 사람당 1년이면 365벌의 각각 다른 의상이 있어야 하고, 2년이면 730벌이 있어야 한다.

남달리 소심한 성격의 소치에서 오는 느낌일까? 아무리 좋게 이해하고 넘기려 해도 왠지 자꾸만 마음에 거슬리고 곱게 보이지를 않는다.

방송국의 스튜디오는 분명 출연자들의 팻션쇼를 하기 위한 장소이거나 의상 자랑을 하기 위한 무대가 아니다. 어느 특정인의 옷자랑을 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입으라고 방송국에서 강요하고 있는 것은 더 더욱 아닐 것이다.

우리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잿더미만 남은 폐허 속에서 온 국민들이 오랜 세월을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 겨우 배고픔과 굶주림에서 벗어난 지가 엊그제 같기만 하다.

그러기에 단 한 벌 밖에 없는 옷이 해졌을 때, 몇 차례나 기워 누더기 옷을 입고, 뚫어진 양말은 전구를 넣어 기워 양말이 다 닳을 때까지 신었으며 몽당 연필조차 알뜰하게 아껴 쓰던 시절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기만 하다.

옷이 날개란 말이 있다. 하지만, 가끔은 먼젓번에 입고 출연했던 의상을 다시 입고 출연하는 검소함과 소박한 멋을 보여 주는 것도 온 국민들에 대한 또 하나의 겸손이며 예의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겸손함을 보여 줄 때, 시청자들에게 더욱 친근감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러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 그것은 너무나 세대 차이가 나는 나 혼자만의 고루하고 진부한 지나친 부탁에 지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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