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은 이미 6백 년 전에 조림 실시

2010년 3월은 단기(檀紀)로 4343년이다. 단기를 바라보는 풍속학자(風俗學子)들은 양력과 음력을 떠나 즉, 음양의 논리를 떠나 음의 완전수 중간에 걸리는 4와 양의 출발이자 중심점인 3이 걸린 우리민족 숫자 논리의 충돌이라는 이도 나서고 있다.

하긴, 올 3월을 돌이켜보면 눈 구경을 하지 못했던 조선시대 3남 지방에서도 실컷 눈 구경을 했으며, 영동(嶺東)지방에서는 눈이 지긋지긋하다고 한다. 특히, 눈을 맞아야 익어가는 황태덕장에서는 눈이 너무 내려 물러질까봐 걱정이라 한다.

어디 그뿐이랴 보리밟기가 한창이어야 할 남도지방도 도드라진 땅껍질 때문에 이렇게 몇 해가 지나면 심상치 않다고 한다.

-3월 초 내린 습설로 조선왕릉 송림 초토화

하긴 갑자(甲子) 이상으로 변화하던 주기(週期)가 한 순배(巡倍)로 변하고 있으니 땅과 사람이 놀라고 있을 때 쏟아진 양력 춘삼월의 습설(濕雪)과 돌풍(突風).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민족의 상징이자 절개로 여겨졌던 송림(松林)을 무참히 짓눌렀다. 하늘을 가리며, 햇살과 싸움에서 어머니의 품속처럼 편안한 휴식을 주던 소나무의 그늘마저도 당분간 아니 그 포근함을 우리세대에서 느낄 수 있을까하는 감상에 젖는다.

지난 3월 8일 밤과 9일 아침까지 내린 봄눈으로 구리시의 상징이자 대한민국의 상징인 동구릉의 소나무들이 무참히 꺾어지고 자빠졌다. 자연의 순환을 인간이 갚을 수는 없는 법이지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평범한 성리학의 진리를 깨달은 문화재청은 세계유산 조선왕릉 40기의 주변에 우리소나무심기를 4일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이 식목행사는 자연이 준 재앙의 교훈에 맞춰 우리민족 축복의 유산인 조선 왕릉에 금강송(金剛松)을 식재해 선조(先祖)가 우리에게 준 혜택에 보답하고저 함이다.

이 소나무 묘목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우수하고 중부지방의 민감한 계절의 변화에 잘 적응하도록 남양주시 사릉(思陵)에서 배양하고 자란 우수종(優秀種)이다.

-이미 6백 년 전에 송림을 조성해..이번 금강송 식재는 과거의  보시(報施)

소나무를 왕실의 나무로 삼았던 조선왕실에서는 이미 6백년에 가까운 태종 때 소나무 식재에 대해 절대 왕권을 이용해 명을 내렸다.

“건원릉(建元陵) 에 소나무를 심도록 명하였다. 동반(東班) 9품 이상과 서반(西班) 4품 이상에게 각각 품종(品從)을 내게 하고, 또 경기좌도(京畿左道)의 연호군(煙戶軍)과 각사(各司)에 속한 제색(諸色) 장인(匠人)을 차발(次拔)하여 부역(赴役)하게 하고,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과 영양군(永陽君) 이응(李膺)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다.”

태종 9년 즉(1409) 1월18일자 기사이다. 이 시기는 태조가 1408년 5월24일에 죽고 9월9일 장사를 지낸지 4개월만이고, 동반 9품 이상과 서반 4품 이상의 벼슬을 하고 있는 공직자에게 품종(品從) 즉 관리의 등급에 따라 자신들의 종과 시복들을 동원하게 하여 소나무를 심게 했다는 것이다.

이보다 1년 앞서 “능침(陵寢)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없는 것은 예전 법이 아니다. 하물며 전혀 나무가 없는 것이겠는가. 잡풀을 베어버리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두루 심으라.”라 명한 것이 바로 이방원으로 알려진 태종이다.

조선 왕릉은 우리나라의 송림을 대표한다. 그래서 십 수 년 전에 잘 못 선택해 심은 리기다소나무를 과감하게 베어버리고 지난 폭설로 상흔을 당한 소나무들을 위로하고 왕릉주변에 부분적으로 성징(性徵)했던 외래종 소나무 대신 우리 소나무를 심는 것이다.

이번 우리소나무심기 행사가 던지는 메시지는 보전과 보존이 공존하는 아주 특별한 행사이며, 단지 바람은 시류(時流)에 의한 일회성 행사가 아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남양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