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호(작가)
내게는 무려 40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지우지기로 한결 같이 가깝게 지내고 있는 한 분이 있다. 그 분은 원로 작가로서 나보다 꼭 10년이나 연상이며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다.

그 분은 일찍이 지극히 동양적이며 현모양처형인 부인을 만나 행복한 해로를 같이 하다가 안타깝게도 50대 초에 부인이 사별하는 아픔을 겪고 하루아침에 혼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60대 초가 되었을 때 운이 좋아 다시 훌륭한 여성을 만나 재혼을 하는 기쁨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란 말인가. 다시 맞이한 부인 역시 불과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다시 사별의 아픔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재혼은 쉽게 하였으나 항간에서 흔히들 말하듯 이처럼 여복(女福)이 지질이도 없는 불행하고도 측은한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을까.

소위 글을 쓴다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재물이나 돈같은 것에는 별로 욕심이 없다고들 한다. 그래 그런지 그 후, 그 분은 단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출가시키자마자 자신이 살고 있던 집을 아들 내외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한 집에서 같이 살자는 아들 내외의 간절한 만류를 뿌리치고 아무 미련 없이 집을 나와 어느 허술한 빌라 꼭대기의 옥탑방 하나를 세로 얻은 후, 홀로 쓸쓸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 분은 전에도 그랬듯, 시간이 날 때마다 빈 방에 홀로 앉아 글도 쓰고, 또한 젊어서부터 명성이 어느 정도 알려진 분이어서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몇 군데 대단한 기업체의 이사직도 맡고, 몇 군데 강의도 나가고 있어서 외롭고 쓸쓸하긴 하겠지만 그런대로 바쁜 나날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럭저럭 그의 나이 67세가 된 어느 날이었다. 난 우연히 그와 술자리를 함께 한 자리에서 외롭고 쓸쓸한 그의 처지가 왠지 마음에 안쓰러워 다시 한 번 은근히 재혼을 할 것을 권유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은 현재 돈도 넉넉지 않으며 나이 70을 바라보는데 이제 무슨 재주로 재혼을 할 수 있으며, 그 어느 어리석은 여자가 뒤늦게 고생을 할 게 불을 보듯 뻔한데 그 누가 그런 사람에게 오겠느냐며 쓸쓸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벌써부터 재혼은 단념했다고 딱 잘라 대답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의 말은 백 번 옳은 말이며 사실이었다.

사람이 늙으면 어쩔 수 없이 추해진다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그 분만은 예외인 것 같았다. 젊어서부터 무더운 한여름에도 정장에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다니며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멋쟁이였다.

그런데 그 분은 어떻게 된 일인지 추해보이기는 커녕, 세월이 갈수록 노신사다운 멋과 중후함이 한층 돋보이는 특별한 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난 그분으로부터 깜짝 놀랄만한 반가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나 지난번에 다시 재혼을 했어. 미리 알리고 싶었지만 너무 늙은 나이에 재혼을 했기에 좀 쑥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했다네.”
이렇게 시작한 그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번에 새로 맞이한 부인은 20살이나 연하이며 그동안 눈이 너무 높아 결혼을 못하고 세월만 보내다가 47세가 된 숫처녀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향에서 한 때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직접 가르친 적이 있던 제자였으며 그 여인의 부친은 과거 모 장관을 지낸 유명인사라고 설명해 주었다.

과연 그런 평범하지 않은 대단한 가정에서 태어난 눈이 높을 대로 높아진 여인이 어떻게 이런 가진 것도 없고, 나이도 많은 분과 선뜻 자진해서 재혼을 원했을까?

그러나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뒤늦게나마 진정한 행복을 찾았기에 얼른 결정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여인이 바라는 그만의 행복은 오직 꼭 두 가지뿐이었다.

첫째, 그 누가 뭐라고 해도 끼니때마다 자신의 솜씨로 정성을 들여 장만한 밥과 반찬을 비록 초라하게 생긴 쪽상도 좋다며 그와 서로 마주 앉아 같이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없다고 말하더란다.

둘째, 남편이 외출할 때마다. 자신이 미리 빨래를 해서 다림질도 하고 잘 손질해 두었던 옷을 꺼내 정성스럽게 입혀 주고, 남편이 외출을 하는 모습을 현관에서 바라볼 수만 있어도 그게 바로 행복이지 더 이상의 다른 행복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단다.

이 이야기를 듣고 여인의 부모님들은 딸이 50이 다 되도록 시집을 못가더니 정신 상태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하고 펄쩍 뛰면서 반대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일 끝까지 그런 사람과 결혼을 한다면 부모 자식간의 인연을 끊자고까지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여인은 부모 자식간의 인연을 끊으면 끊었지 그 사람만은 결코 놓칠 수 없다며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자기 고집대로 재혼을 하게 되었다.

난 그 후, 가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분 댁을 방문할 기회를 얻어 그분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들 부부의 사이가 어찌나 좋아 보이는지 신혼부부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사랑과 행복!
사랑도 행복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마다 그것을 누리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자신만의 소유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희망이요, 꿈이기에 그것을 오직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지금 이 시각에도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그럼 과연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이며, 행복이란 무엇일까? 번화한 길거리에서 일일이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잡고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과연 한 사람이라도 똑 부러지게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정답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평양감사도 내가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남들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일일지라도 내 성격이나 취향에 맞지 않으면 그것은 불행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아무리 남들이 우습게 여기거나 좋지 않게 인식하는 일이나 직책이라 해도 내 취미에 맞아 내가 좋아서 택한 일이라면 거기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마다 각기 생김새나 모양이 다르듯, 이에 따라 성격도 추구하고 원하는 사랑과 행복의 목표와 수준, 그리고 취향도 각양각색이어서 어떤 것이 사랑이며, 행복이라고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옛 성현들이 정의를 내린 행복 역시 구구각색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기에 또한 사람들마다 각기 그들이 추구하고 희망하는 사랑과 행복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결코 어떤 게 사랑이며 어떤 게 행복이라는 정의를 정확하게 말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무리이며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사랑과 행복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주 오래 전, 한창 유행했던 대중가요 중에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란 재미있는 노랫말이 문득 떠오른다. 눈물의 씨앗이 사랑이라면, 행복은 뭐라고 대답해야 해야 옳은 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행복! 그것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으로 느끼는 것이 바로 행복이기에 어디까지나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위에서 예를 든 어느 여인의 아주 특별한 행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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